brunch

매거진 책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 May 15. 2020

아홉수, 1년간 순수하게 놀기로 결심하다

폭식증을 겪을 때 읽은 책, 이 순간에 존재하는 법에 대해

나는 과거에 폭식증을 겪었었다. 그전에 극한 다이어트를 오래 한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 '먹는 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텄었다. 그 강박은 금세 나를 사로잡았고 어느 것도 쉽게 먹을 수 없었다. 결국 먹고 뱉는 상태까지 치닫았다가 폭식이 시작됐다. 폭식하고 나면 죄책감에 시달려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다음 날은 죄책감을 지우려 단식이나 절식을 했고, 며칠 못가 또 폭식을 했다. 그러한 굴레에 자꾸 빠져 악순환이 반복됐었다.


폭식증을 이겨내려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심리, 철학책을 많이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항상 현재에 존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먹을 때 미래를 생각하며 죄책감을 가지고 먹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동원하여 순간에 존재하며 먹는 것.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를 발견했을 때도 나는 그 속에서 허우적허우적 노력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제목을 보자마자 크게 이끌렸다. 이 책도 현재에 존재하는 법을 이야기할 것이라 느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이 책은 그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폭식증뿐만 아니라, 당시 내가 남들 따라 지내던 인생 전반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다.




이 순간에 깨어 있기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서 습관대로 선택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지 않고, 좋은 가치를 실현해가려면 이 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잘 사는 일의 최소 단위가 순간에 깨어 있기라는 결론을 냈다."


"몸의 감각으로 일상의 행위들을 만나간다면, 순간에 깨어서 살기가 가능할 것 같았다. 몸의 감각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과 환경을 새로이 만난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나 인생의 질문을 발견했다."


"먹기를 도구로 명상하면 느리게 먹게 된다. 잘 곱씹으려니, 느낌을 계속 인지하려니 자기도 모르게 느려지는 것이다."


 폭식증을 겪으면서 난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먹으면 살이 찔 것을 알지만 폭식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꾸 먹어야 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야 했다. 하지만 먹는 게 먹는 것 같지 않고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차라리 즐겁게 먹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것 같은데 나는 먹는 그 순간이 미치도록 싫었다. 먹는 그 순간에도 나는 미래에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곧 살이 불어날 것이라는, 이렇게 '처'먹기만 하는 과거의 내가 혐오스럽다는, 그런 미래의 꼭대기에 서서 현재의 나를 벌레 보듯 봤다. 나는 나를 자꾸 부정했다.

폭식증을 겪으면서 썼던 일기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를 읽으면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이 순간에 내가 느끼는 것들을 집중하려고, 알아차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최대한 이 순간도 깨어있으려고,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고 혐오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지금의 '나'를 자꾸 만나려고 했다. 처음엔 어색하고 이상했다. 항상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를, 미래를 보며 현재의 나를 채찍질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사랑으로 보고 같이 존재하고자 했다.


존재의 근원인 찰랑이는 물 한 잔, 따뜻한 햇빛과 반짝이는 별빛 아래 수많은 날을 견디고 재배되어 식탁까지 온 반찬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눈물 날 듯이 감사했다. 먹을 수 있음에, 이 순간 살아있을 수 있음에.


지금 있는 것들과 최선을 다해서 이 순간에 존재하자고, 그렇게 나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1년간 순수하게 놀기로 결심하다


뒤이어 저자는 29, 39세에 1년씩 총 2년의 갭이어를 보낸 경험을 풀어낸다. 한국에서 갭이어라, 그것도 대부분 대학생 때 보내지 않나? 그런데 29, 39살 사회생활을 몇 년 한 후에 갭이어라니. 심지어 갭이어의 주제가 "오로지 재미있는 것만 하기"다. 마음속 무언가가 소용돌이쳤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에 더 깊이 빠지기 시작했다.


"작심하고 1년 동안 오로지 재미있는 것만 하기로 했다. (...) 1년간 오로지 순수하게 놀자고 생각하니 할 수 있는 것이 무척 많았고, 인간의 원래 배우고 창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재밌는 것만 하니 사람이 부지런해진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재미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당근을 다지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면 당근을 사러 간다. 사 온 당근으로 말도 안 되는 요리를 시작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스티비 원더 공연 실황을 틀어놓는다. 춤을 춘다. 눈치챘는가? 이런 테마는 재미있는 감각을 우선해서 따라가며 사소한 습관들에 균열을 낸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적인 행위에 몰두하게 만든다."


읽으면서 햇빛 좋고 바람 좋은 시원한 날에 사방이 뚫려있는 옥상에 올라가 진한 세제 냄새 가득한 빨랫감을 안고 물기를 탁탁 털어내며 빨랫줄에 걸고 하늘 한 점 바라보는 듯한 파란색 자유의 기분이 들었다. 저자의 갭이어를 보면서 나는 대리 자유를 마음껏 느꼈다. 하루를 저렇게 자유롭게 느낄 수 있다니, 눈을 뜨는 순간에 재밌는 걸 찾을 수 있다니, 당근을 다지는 일이라니! 아, 당근을 다지는 일이 이토록 자유로워 보일 수 있다니. 너무 자유로워 낭만적이기까지 한 그 경험을 읽는 순간이라.


"내가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뭘 배울까, 어떤 사람을 만날까, 어딜 갈까"를 내키는 대로 정했다. 열두 살의 나라면 뭘 고르겠어? 어딜 가겠어? 누굴 만날래?"


"사회의 눈으로 보면 분명 뒤처지는 시간인데, 아니 어른이 되기 싫은 초보 어른의 유치한 반항인데, 스스로는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나는 이렇게 하면 집중을 잘하고, 이렇게 하면 힘들어하는구나. 어떤 포인트를 건드리면 계속할 힘을 얻는구나 등등 자기 탐구를 무겁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은 중고생, 아니 늦어도 사회인이 되기 전에는 충분히 했어야 했는데, 우리나라 교육이 알 기회를 계속 막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학교보다 더 크고 공고한 학교인 사회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강화되고 있는 점도 잘 보였다. 매우 효율적이고도 안전하게 어른으로 키워지고 장년으로 성숙시키는 이 프로세스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나도 그런 시간이 갖고 싶어 졌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참 많았는데, 그때마다 앞으로 해야 할 것들에 초점을 두고 다른 것은 '하등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나눈 기준은 모두 남들이 말해준 것, 즉, 남들이 좋거나 나쁘다고 하는 것들, 남들이 해야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진로를 정하는 것도,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도, 앞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도 다 남들의 말을 들었다. 사회가 인정을 해주는 지를 가장 우선시했다. 돌아보니 그중 내 인생을 채워주고 행복을 준 것은 10%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하등 쓸데없는 것'인 경우가 더 많았다.


"부디 테마를 정할 때 무슨 자격증 따기, 논문 잘 쓰기 같은 실질적인 것들은 택하지 말길. 해야만 하는 일을 정하면 자기 틀을 뒤흔들지 못한다. 구체적이지 않되 순수한 감각을 자극하면 좋다. 매일매일 그 테마에 헌신할 수 있는 순진한 가치여야 한다."


"이 귀한 시간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마인드 훈련이다. 고집부리는 기술을 터득하라.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원래 고집을 잘 못 부린다. 나보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착함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다른 때는 그렇게 살든지 말든지. 이번만은 내 고집대로."




용기 있게 총 2년이란 시간 동안 갭이어를 보내며 끊임없이 사색하고 발견한 그 경험을 토대로 글을 써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전국 어디서 2년간의 갭이어 경험과 흔하지 않은 팁들을 세세하게 그리고 낭만적이게 들을 수 있을까. 내가 직접 해보지 않고도 방구석에 앉아 해 본 사람의 경험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임이 분명하다.


읽는 내내 가슴 떨린 시간이었다. 왠지 이젠 내가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 그 결정권은 나에게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회를 살아가되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꽃 향기가 나는 차와 함께 진한 햇빛 아래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삶을 네모로 그려놓고, 할 일을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한 조각씩 쓰고 버리듯이 산다. 딱딱하고 네모난 시간들이 버려진다. 하루가, 1년이, 10년이 그렇게 흐른다. 어느덧 나는 기계와 사람의 중간쯤이 되었다. 파릇파릇한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시간을 재지 말고 그리는, 눈금자 대신에 연필을 쥐여줄 순 없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감히 해외여행을 떠난 기초생활수급권자를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