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랑 Nov 30. 2023

그들의 온기

"자고 갈래?"


처음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한 대학 친구들에게 내가 꺼낸 말이다. 아이들의 친구나 조카가 자고 간 적은 있지만 당시의 이유는 '어쩔 수 없이'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여름, 우리 셋은 서울에서 핫하다는 곳에서 만났고 그중 한 친구와는 15년여 만의 만남이었다. 연락을 못하고 지낸 그 사이, 우리는 결혼을 했고 똑같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남매맘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나왔던 그때와 달리 아이들도 함께 편하게 만나는 자리를 갖고 싶어 우리 집에서 한번 모이자고 한 터였다. 과메기를 택배 주문하고 어디서 배달 음식을 시킬지 대강 머릿속에 그려 놓은 뒤 친구들에게 어떤 술을 준비해 놓으면 되겠냐고 물었다. 평소 술을 즐겨하는 친구들의 대답이 운전해야 하니 술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며 집에 있는 와인 한 병 가져가 보겠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선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남편이 새벽에 공항까지 친구를 배웅해줘야 한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었다. 남편에게 친구네서 같이 자고 데려다주고 오라고 하면 되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그 한 마디에 친구들이 갑자기 들뜨기 시작했다. 진짜 그래도 되냐며, 엠티 가는 기분이라며, 칫솔이랑 잠옷만 챙겨 가겠다며, 와인은 한 병 더 챙기겠다며.


그렇게 우리 집에서 1박을 하고 친구들이 떠난 집을 정리하는데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겨울방학에 꼭 다시 초대하자고 졸라대는 첫째의 모습을 보며 자고 가라고 하길 잘했구나 싶었고 예쁜 이모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둘째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새벽까지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한 상태였고 평소라면 기운을 못 차리고 꼼짝 않고 있었을 텐데 친구들이 떠나간 자리를 정리하며 다음 만남을 계획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나도 20년 전과 다를 게 없음에는 굉장한 힘이 있구나 생각하며.


브런치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썼던 글 중에 하나가 혼자만의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도 혼자만의 시간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귀한 시간만큼 그들과의 시간도 똑같이 사수해야 한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지금 떠오르는 그 사람이다. 나에겐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자고 간 대학 친구들이 그랬고 며칠 전 오전 산책을 함께 한 육아 동지들이 그랬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하원 버스에서 내린 후 매일 같이 노는 아이들을 함께 지켜보던 육아 동지들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들과 함께 할 시간이 현저히 줄었고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음에도 이제는 약속을 잡아야 커피라도 한 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전 그들과 커피 한 잔씩 들고 오전 산책과 점심을 함께 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장갑을 나눠 끼고 걷는 모습이, 나란히 앉아 똑같은 메뉴를 먹으며 소곤거리던 시간이 애틋하다.


20대의 인간관계와 40대의 인간관계는 많이 다르다. 현저히 좁아지지만 깊어지기에 아쉬움은 없다. 아무리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세상이라고 외쳐봐야 우리에겐 람의 온기가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흔한 남매의 흔하지만 특별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