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아마 일지
<오전 8:00~9:50 등원 후 오전 간식, 나들이 장소 정하기>
"쑥 놀이터 가고 싶어." "거긴 얼마 전에 갔잖아, 무덤놀이터 어때?" 아이들이 오늘 나들이 나갈 장소를 두고 이야기 중이다. "두루미, 원래 놀이터는 우리끼리 정하는 거야, 조금 기다려 주면 나올 거야." 별이가 다가와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알겠어."
오늘은 내가 달님방의 교육아마를 맡은 날이다. 선생님들이 연차를 쓰시는 날이면 아마들끼리 순번을 정해 일일교사가 되는데 오늘 내가 교육아마를 맡게 된 달님방은 5세부터 7세까지의 최고참 방이다. 터전의 터줏대감 아니랄까 봐 아이들이 오히려 하나하나 나를 가르쳐 주고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놀이터 이름들이 나오더니 무덤 놀이터로 결정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우다다 바구니로 달려가 모자를 쓰고 겉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다. 알아서 척척하는 아이들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엔 다영이가 어디선가 커다란 배낭을 질질 끌고 와 건네주며 말한다. "두루미 이거 들고 가야 해. 저기 밥풀차도 넣고." 인절미(음식을 해주시는 맛단지 선생님)가 웃으며 커다란 물통과 컵들을 챙겨준다. 가방 안에는 이미 비상약과 휴지, 여벌 옷, 수건 등 갖가지 용품들이 가득하다. 물통과 컵까지 챙기고 단단히 배낭을 멘다. 미리 바깥에 나와 있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가지고 놀 모래놀이 장난감까지 챙겨 들고 서 있다. 앞장서서 뛰어가는 아이, 땅바닥에 고개를 묻고 벌레 쳐다보는 아이, 양쪽에서 어느새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들까지.... '오늘 내가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군.' 한 번 더 둘러보며 마음을 다진다. 출발이다.
<오전 9:50-11:50 나들이>
"아~ 나도 두루미 손 잡고 싶은데...." "나도!" "나도 잡고 싶어~" 출발부터 난관이다. 손을 잡지 못한 아이들이 동그랗게 에워싸고 아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먼저 손을 잡고 있던 별이가 주먹을 더 꽉 움켜쥐는 게 느껴진다. 이럴 땐 손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 "조금 있다가 또 바꿔 잡자." 아이들을 달래어 발길을 재촉한다. 동네 산 근처에는 고즈넉한 무덤가가 있는데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다. 도착한 아이들은 일단 익숙한 듯 무덤 앞에 가서 인사를 하고는 양해를 구한다. "저희 여기서 조금만 놀다 갈게요!" 그리고는 무덤 주변 언덕에 올라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엉덩이로 구르다가 어느새 완전히 누워 온몸으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다. "눈이 오면 훨~씬 더 잘 미끄러지는데... 근데 눈이 없어도 괜찮아!" "맞아! 대신 풀이랑 나뭇잎이 있어서 푹신푹신하잖아~" 친절한 가이드들의 설명이 재잘재잘 이어진다. 아이들 옷에 열심히 구른 흔적들이 무늬처럼 새겨진다. '저래서 구멍이 생기는구나.' 며칠 전 큰 아이의 바지 무릎에 생긴 동그란 구멍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무덤놀이터' 이름만 들어도 왠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곳이지만, 아이들에겐 천상(?)의 놀이터다. 양지바른 무덤가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 웃음소리, 뛰어노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누워 계신 분도 오랜만에 적적하진 않으시겠네 싶다.
"두루미~ 밥풀차 먹고 싶어." "나도~~" 옹기종기 모여드는 아이들 머리가 하나같이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다.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만능 배낭을 열었다. 물방울이 맺힌 큰 물통을 열기 전 밥풀이 잘 섞이도록 거꾸로 들고 흔들어 준다. 아이들 컵에 따라주니 구수하고 시원한 밥풀차 냄새가 진동한다. 아이들에겐 이 냄새가 여름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아이들은 컵에 달라붙은 마지막 밥풀까지 탈탈 털어 먹고 아쉬워한다. "맛있다!" "아~ 밥풀차 더 먹고 싶어." 밥풀차 한 통을 싹 비워버린 아이들이 이번엔 생일상을 차린다며 빠르게 흩어진다. 한 뭉치의 나뭇가지와 솔방울, 나뭇잎들을 들고 내 발 밑으로 다시 모이는 모습이 꼭 둥지를 트는 새들 같다. 흙을 긁어 모아 그 위에 나뭇가지 촛불을 꽂고 나뭇잎과 솔방울, 꽃잎과 열매들로 수를 놓자 아름다운 케이크가 완성된다. 그 옆에 이번엔 바베큐를 굽는다. "모닥불 하려면 나뭇가지가 아주 많이 필요해." "알겠어 언니~" 다들 발 빠른 조직력을 보여주며 흩어졌다 모였다 하더니 순식간에 아주 많은 나뭇가지가 쌓인다. 하루, 이틀로 만들어진 내공이 아니다. 멋진 모닥불에 이제 막 고기를 구우려는데 이런....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참을성 없이 쏴아 하고 소나기가 쏟아진다. 예보에 없는 소나기로 비옷은커녕 우산 하나 챙기지 못했다. 지나가는 소나기면 금방 그치지 않을까 싶어 나무 그늘 아래서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러다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자 비를 맞고 걷기로 한다. 걷다 보니 소나기가 다시 쏟아지고 잦아들고 또다시 쏟아지며 변덕스럽게 오락가락한다. 그러는 사이 이미 옷도 신발도 젖어 버려 그냥 터덜터덜 빗속을 걸어 터전에 돌아왔다.
"인절미~~ 우리 다 젖었어!" 비를 맞고 기분이 좋아진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빗물에 기분 좋게 하는 무슨 성분이 들어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 웃어버린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너도 나도 보송한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맛있는 밥 냄새가 솔솔 코끝을 간지럽힌다. '나갔다 돌아오면 남이 해주는 따끈한 밥상이 날 기다리다니 너무 좋군' 생각이 든다.
<오후 12:00-2:00 점심식사 후 자유시간, 낮잠 준비>
달님방의 배식은 자율배식이다. 인절미가 방 안으로 밥과 국, 반찬들을 각각 통에 담아 들여놔 주시면 아이들은 줄을 서서 자기가 먹을 수 있는 만큼씩 스스로 자기 식판에 담는다. 별이가 식판 가득 국과 반찬을 담는다. "별아,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어?" "응. 다 먹을 수 있어. 난 잘 먹거든." 별이 뒤에 선 세하의 식판에는 밥도 조금, 김치도 두 조각뿐이다. "세하야, 이걸로 안 부족하겠어?" ".... 응" "두루미, 세하는 밥을 아주 조금 먹어. 김치는 매워서 못 먹었는데 봄이(달님방 교사)가 조금씩 맛보라고 해서 이제는 먹을 수 있어." 어느새 내 옆 자리에 다 채운 식판을 내려놓고 앉아 있던 다영이가 알려준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식전 노래가 시작된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가질 수 없듯이 밥은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다. 인절미~ 잘 먹겠습니다!"
"응~~ 맛있게 먹어." 부엌에서 인절미의 대답이 들려오면 식사 시작!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진리다. 아이들 반찬이라 어느 것 하나 맵거나 자극적인 것이 없는데도 어쩜, 하나같이 입에 착착 붙는다. "김치 맛있죠? 아이들이랑 같이 담근 거예요." 인절미가 비워진 반찬통에 김치를 더 떠주며 말한다. "맞아! 그거 우리가 만든 거야." "밥이랑 반찬이랑 골고루 먹으면 몸이 튼튼하고 길어진대~" "두루미 이거 봐. 나 엄청 길다!"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열리는 스트레칭 대회. 활짝 웃으며 입안엔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쭉쭉이를 하는 녀석들. 갑자기 열린 방문으로 별님방(3세 동생방) 은이가 들어온다. 뒷짐을 지고 배는 볼록, 그 위에 귀여운 밥풀 한 점을 올려놓고 근엄하게 언니 오빠들 밥상을 돌아본다. "황 회장님~ 또 오셨어요, 가서 식사마저 하시지요." 동백(별님방 교사)이 뒤따라 들어와 은이 손을 잡고 나간다.
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양치를 하고 다시 한번 신나게 에너지를 분출한다. "와~ 주안이는 입이 엄청 크구나, 꼭 토토로 입 속 같네." "토토로가 뭔데?" 칫솔질이 서툰 다섯 살 아이들 양치질을 도우며 토토로 이야기를 들려주니 다들 한껏 입을 벌려 속을 보여준다. 방 안에 낮잠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대공간으로 내보내고 먼지를 쓸고 이불을 깔았다. 커튼을 내리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오후 2:00-3:30 낮잠시간>
"두루미, 여기 읽을 차례야." 누군가는 옛이야기 책을 가져와 펼쳐 주고, "노래 켜줘~" 자장가 노래를 조용히 켜 주었다. 별이와 세하는 어느새 바구니에서 엄마(냄새가 나는) 옷과 애착 인형을 각각 꺼내 들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다. "두루미~구름 로션 발라줘." "구름 로션이 뭐야?" 아이들이 선반 위 구름이 그려진 로션을 가리킨다. "이 로션을 발라주면서 마법을 외우면 돼." "어떤.... 마법?" "구름 로션아 구름 로션아, 우리를 멋~진 꿈나라로 데려다 주렴."
아이들이 원하는 각각의 낮잠 의식을 하나하나 해 나가다 보면 입을 오물오물하며 잠든 아이, 눈꺼풀에 까무룩 잠이 내려앉은 아이, 눈을 억지로 꼭 감고 잠들어 보려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나는 억지로 눈을 꼭 감고 있는 아이 곁으로 가 조용히 눕는다. 토닥토닥 가슴을 다독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것저것 알려주며 발 빠르게 산을 타던 아이들은 어디 가고 영락없는 아기 얼굴들이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아침부터 나름 긴장한 채 아이들과 오롯이 시간을 보냈더니 아이들 틈새 모로 누운 불편한 자세에도 자꾸만 눈이 감긴다. 깜빡 잠이 들었나 아니면 잠깐 들 뻔했나. 눈을 뜨니 잠든 아이들 가운데 잠 못 든 다영이가 보인다. "다영아 잠이 안 오니?" 다영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영이를 데리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다.
이 정도면 낮잠 성공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지난 교육아마 때는 미세먼지가 심해 나들이를 나가지 못했고, 그 덕분에 아이들은 쉽게 잠을 자려하지 않았다. 결국 한 시간 즈음이 지났을 때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뜬 눈으로 수다를 떨며 깔깔 거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옆 방 선생님의 방문으로 간신히 조용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동안 대공간에서는 다영이처럼 잠들지 못한 아이들이 조용히 그림책을 보고, 교사분들은 서류 작업을 하고 계셨다. 간신히 찾아온 쉬는 시간이 너무나 달콤했지만, 서류 작업에 열심이신 선생님들 앞에서 차마 드러누울 수가 없다.
"두루미, 날적이 써보실래요?" 어색한 공간과 시간을 배회하는 나에게 동백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제가요?" 날적이는 교사들과 아마들 간의 교환일기 같은 것이다. 다만 글의 주제가 내 아이에 관한 것으로 집에서 보낸 이야기와 터전에서 보낸 이야기가 오고 가며 아이의 컨디션이나 요즘 관심사 같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다른 아마들이 아이에 대해 쓴 솔직한 글들을 읽어본다는 호기심과 내가 거기에 답해도 되는 건가 하는 부담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늘은 달님방 선생님이시니까요."
조심스레 날적이를 펼쳤다. 날적이를 읽으며 부모와 선생님이라는 양 날개가 아이를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도록 받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는 '내가 아이를 잘 기르고 있는 걸까'라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너무나 진솔하게 깃들여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어른이들을 다독이고 위로하며, 마치 두 사람의 '아이'에 대한 끝없는 러브레터 같은 글들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마지막 페이지에 덧붙일 러브레터를 작성하기 위해 가만히 오늘 아이들의 모습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다. 터전에서의 불과 몇 시간이 마치 며칠이 지난 것처럼 파노라마로 길게 펼쳐졌다. 나는 펜을 들어 천천히 문장을 적어나갔다.
<오후 3:30-5:00 오후 간식, 자유놀이 후 하원>
고요했던 낮잠시간이 끝나간다. 인절미는 아이들이 일어나면 먹을 오후 간식의 세팅을 이미 마쳐 놓으셨다. 광주리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냄새를 맡으며 방문을 열고 커튼을 걷는다. 부스스한 머리, 퉁퉁 부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들, 발 빠르게 이불부터 개고 옷을 갈아입는 아이들,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섞여 자기 속도대로 간식을 먹는다. (날적이에 의하면) 어제 늦게 잤다던 세하는 방 안에서 좀 더 꿈나라에 있도록 두고, 간식을 먹으며 아이들 머리를 빗겨주었다. "엘사 머리 해줘 두루미." "난 이렇게 위에 동그랗게 올려줘, 만두처럼!" 화려하게 묶어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손이 렉 걸린 PC처럼 버벅 거린다. 결국 양심 고백. "두루미는 머리 묶는 걸 잘 못해. 미안해."
간식을 먹고 잠이 완전히 깬 아이들이 내 손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데려간다. 가리키는 곳은 천장 가까이 높은 선반 위에 놓인 작은 상자. "저거 꺼내 줘, 우리 보물이야!" 눈들이 반짝인다. 상자를 꺼내니 뚜껑 위에 봄이가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보인다. "두루미, 이건 비장의 무기예요." 상자를 열어보니 영롱한 빛깔의 색색깔 구슬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손톱만 한 것도 있고 알사탕만 한 것도 있다. 아이들이 "와~~"하고 구슬을 잡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작고 아름다운 보물들을 보면서 나도 작은 소리로 '아...' 하고 감탄했다.
그리고 하나 둘 하원 하러 반가운 아마들이 온다.
"두루미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많이 힘드셨죠, 고마워요~" 하원 하는 아마들의 인사를 받으며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다. 우리 사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그냥 알 수 있었다. 함께 보낸 하루가 아이들과 나 사이에 끈끈한 동지애나 비밀을 공유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남겼다. 아이들과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조금은 인정받지 않았을까 하는 설렘으로 특별해진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어릴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신나게 놀고 난 다음 헤어질 때 하는 인사를 했다.
"두루미 안녕~ 다음에 또 놀자!"
"응 다음에 또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