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브리즈번으로 온 이유 :)
어느새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아도 갈 수 있는 단골 가게들이 생겼고 아침 조깅에 마주친 사람들에게 먼저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여유도 생겼지만 차에선 여전히 기초 영어 회화 오디오북이 흘러나오고 있다.
호주로 오기 전 지인들이 물었다. 호주 어디로 가냐고. 그래서 '브리즈번'이라 답하면 다들 거기가 어디냐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시드니'다.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정도가 그다음 이야깃거리였다. 시드니만큼 큰 도시인 멜버른을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니 브리즈번이 생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브리즈번은 호주에서 세 번째로 손에 꼽을 수 있는 규모의 도시며 시드니에서 무려 900km 이상 떨어져 있어 차로 간다면 약 10시간 이상 운전을 해야 한다. 호주가 워낙 남다른 스케일의 나라다 보니 심지어 여름에는 시드니와 1시간의 시차가 존재한다. 1일 생활권이 가능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왜 브리즈번으로 가는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살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호주는 내가 처음으로 와 본 외국이었고 브리즈번은 처음 도착한 도시였다.
중학교 영어책 표지를 장식하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사진을 보며 '만일 내가 외국에 나가게 된다면 첫 번째로 호주에 가야지!'라고 생각했었다. 만일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아마 미국까지 갈 용기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호주는 이미 나에게 운명처럼 정해진 나라였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겠노라 결심하며 안내 책자를 펼쳤다. 호주 도시에 대한 내용을 훑어보았지만 '시드니'와 '멜버른' 같은 대도시는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부산 촌년에게는 3년간의 서울 생활이 대도시가 싫어진 시골 쥐의 마음을 공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소개된 도시가 '브리즈번'이었는 데 타이틀로 소개된 문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겨우 날씨가 좋다는 걸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는 건가 싶었다. 한 페이지를 다 읽어 보아도 정말이지 날씨 외에는 특별한 장점도, 단점도 없는 곳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날씨가 좋은 지 한 번 봐야겠네'라는 알량한 도전 정신이 생겼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브리즈번행 티겟을 끊었다. 그렇게 나는 16년 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벗어나 브리즈번에 도착했다. 책의 말이 맞았다. 브리즈번 중앙역에 도착해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부시도록 파랬고 구름은 뽀얗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1년을 맑은 날씨 속에 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떻게 날씨가 도시의 자랑이 될 수 있는지.
시티 중심에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 있었지만 현대적인 고층빌딩들도 즐비했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활기가 넘쳤지만 해가 지면 모든 게 고요해졌다. 누군가에게는 노잼 도시라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 적막함이 안도감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디를 가든 살아남을 수 있는 잡초의 근성을 지녔기에 제 아무리 노잼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나만의 유잼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밤낮으로 호텔과 모텔 청소를 하며 쌍코피를 쏟는 투잡러가 되었고 당시 '주 천불(1주일에 백만 원 벌기)'이라는 워홀러 사이의 최대 목표치를 달성했다. 7명의 다국적 여자 룸메이트 들과 한 집에 살며 문법도 맞지 않는 영어로 우리만의 소통을 즐겼다. 게다가 규모가 큰 사진 공모전에 입상을 해 시드니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고 소박하게 개인전도 열었다. 그렇게 보낸 브리즈번에서의 1년은 내가 꿈꾸는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아마 미리 끊어 둔 독일 유학행 티켓이 아니었더라면 호주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렇게 호주는, 브리즈번은 내게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다.
호주에서와 같은 꽃길을 상상하며 독일에 도착했지만 독일은 독일이었다. 꽃길은커녕 내 몸 하나 누울 곳 찾기가 어려웠고 스산한 날씨는 내가 뼛속까지 이방인임을 느끼게 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한 후 다시 독일에서 전의를 불태우리라 다짐했건만 하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렸다. 예상치 못한 결혼과 육아는 늘 내 마음속 화를 들끓게 만들었지만 역마살에 의한 여행은 내가 현실을 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었으니 국경을 넘나들 때마다 해외 살이에 대한 욕망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번 밖에 못 사는 인생이라면 여행 같은 일상을 살고 싶었다. 그게 꿈이라면 그 꿈 안에서는 예고 없이 쏟아진 소나기에 신발이 젖어도, 라면 국물을 들이켜다 코로 뿜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마냥 즐거울 것만 같았다. 절반은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한때나마 대한민국의 교육계의 녹을 먹고살았던 나는 부모가 원하는 대학이라는 정상을 향해 치열하게 내달려야 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어떤 학교에 가고 싶냐고 물으면 '엄마가 이 대학에 가래요'라고 답하는 게 대다수였고 어떤 과에 가고 싶냐 물으면 '아빠가 이 과를 나와야 돈 잘 번대요'라는 대답이 절반이었다. 그러다 네 꿈이 뭐냐 물으면 놀랍게도 아이들의 대답은 '생각 안 해봤어요' 내지는 '모르겠어요'였다. 내년이면 성인 될 아이들의 대답이 이러했던 덕분에 나는 결혼도 하기 전에 다짐을 했었다. 내 아이만큼은 절대 꿈이 없는 아이로 키우지 않으리라! 반드시 하고 싶은 게 있는 아이로 키우리라!
그런데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나 혼자만 그렇게 키운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나는 학구열이 높은 동네에서 국영수 학원만큼은 보내지 않는 특이한 엄마였다. 큰 아이는 피아노, 태권도, 코딩 같은 예체능을 배우길 원했고 이왕 보낼 거면 아이가 좋아하는 걸로 보내자는 게 아이 아빠와 나의 생각이었다. 물론 아이가 혼자서도 제법 공부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던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혼자 놀이터에 앉아 있기 심심하다는 푸념이었다. 친구가 없냐고 물으니 때마침 지나가는 친구가 있다며 반가운 마음에 "같이 놀 수 있어?"라고 묻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친구의 대답은 "학원 가야 돼"였다. 그 순간 아이들의 대화가 한없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의 물음이, 학원을 가야 하는 아이의 대답이. 대체 학원이 뭐길래. 아무리 귀를 닫고 눈을 감아보려 했지만 나 역시 어느 날부터 인지 들려오는 말들에, 보이는 장면들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학부모인지라 하루는 아이 손을 이끌고 어렵게 자리를 마련한 수학 학원에서 '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테스트'를 치르게 하였다. 학교도 아닌 학원 입시 테스트라니..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4학년이었지만 같은 학년 아이들은 이미 선행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함께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아이의 실력을 가늠해 봐야 한다는 게 당연한 학원의 입장이었다. 테스트 결과는 '통과'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인원이 다 찬 상태라 자리가 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였다. 학원은 감히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학원의 문 턱을 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앞으로 쓰게 될 사교육비와 유학을 갔을 때의 학비를 비교해 보았다. 무리가 있긴 했지만 단기적으로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추진력 하나만큼은 불도저 급이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며 본격적으로 유학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부터 아이 아빠에게 이민에 대한 장점을 무수히 세뇌시켜 두었고 '괌', '베트남'으로 시장 조사까지 다녀온 전적이 있던 터라 유학은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동안은 '이민'을 목표로 했기에 호주가 범주 안에 없었던 것이지 노선을 '유학'으로 변경하고 나니 내게 친숙한 '브리즈번'이 단연 1순위로 떠올랐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인 데다가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게 압도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유학을 생각한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유학원을 통해 입학 신청 서류를 접수했다. 그리고는 곧장 큰 아이와 떠날 2주간의 호주행 비행기표도 구매했다. 아이가 미리 호주에 대한 호감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나의 계략이었다.
단 둘이 떠난 호주 여행은 시드니-울룰루-멜버른-브리즈번-시드니 일정이었고 대체로 순조로웠다. 아이는 처음 와보는 큰 나라에 낯설어했지만 잘 따라와 주었다. 그러다 하루는 아이의 억지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와서 너네 딸 데려가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곳이 브리즈번 미술관 앞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나에게 가장 힐링이 되는 장소이다. 벌써 3년이 지난 이야기이기에 지금은 웃지만 그때는 앞으로 다가올 사춘기가 너무나 치열할 것 같아 내심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원으로부터 희망 학교 중 3순위 학교로 입학이 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유학 기간은 2년이었고 학교 입학 까지는 7개월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떠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숙제는 아이들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차린 사진관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숙제는 손주들이 이 세상 전부인 시부모님께 2년간의 유학 계획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떠나기 한 달 전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우시는 어머님의 눈물을 보며 나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먼 곳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겠냐면 핀잔도 한 달이면 충분했다.
모든 유학 준비는 순조로웠다. 출발 4시간 전까지 240Kg의 수하물을 쌌다 풀기를 반복했지만 우리는 14개의 가방과 함께 무사히 브리즈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5년 전 스물 다섯살, 처음 브리즈번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홀로 창 밖을 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마흔이 된 나는, 공항으로 향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나를 믿고 따라오는 11살 딸과 7살 아들에게 나약한 엄마의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온 가족이 공항에 나와 눈물로 우리를 배웅하는 모습이 출국장 문 사이로 사라지는 순간 '이제는 다 내 책임이구나' 싶어' 이내 또 눈물이 났다. 한 손에는 전기밥솥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아들의 손을 맞잡고 있었기에 그 손을 끌어다 눈물을 닦았다. 그런 내 모습을 올려다보던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남자에게는 한 방이 있는 것 같다. 브리즈번에 도착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 테스트를 봤던 학원에서 아이를 받아줄 수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국을 떠나던 아들에게서 들었던 그 말 한마디 덕분에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는 중이며 앞으로도 우리는 잘할 수 있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