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위한, 사진에 의한, 나만의 사진 인생
수업 중 선생님 손에 들린 카메라에는 렌즈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보이는 렌즈, 다른 하나는 찍히는 렌즈라고 하셨다. 그럼 시각 차이가 나지 않냐고 물으니 선생님은 내게 천재라고 말씀하셨다. 그 날부터 나는 사진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사진을 전공했다. 오로지 배운 거라고는 사진 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진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사진을 잘하는 고등학생이라 여겼다. 대학 입시 면접을 보던 날, 교수님들 앞에서 아주 당돌하게 말했다.
겁을 상실한 하룻강아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범 무서운 지 모르는 법. 하지만 겁 없는 고등학생의 패기로움은 강렬한 인상을 남겨 그냥 합격도 아닌 '수석 합격'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역시 이때부터 내 말빨은 세상에 먹혔던 것이다. 4년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졸업 전시를 위해 사진 전공 중 2가지를 골라 작품을 제출해야 했는 데 'Fine Art'와 'Video'를 골랐다. 'Fine Art'는 순수 예술이라 원하는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고 'Video'는 영상을 제작하여 작품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두 전공에 대한 포트폴리오 구상이 끝난 상태였기에 이대로만 간다면 졸업 심사는 무사통과였다. 그런데 전공 신청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던 그날 저녁, 술 취한 선배'놈' (님 아님 주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공 뭘로 정했어?"
"순수랑 비디오"
"야! 사진 할 놈이 무슨 비디오야?"
"비디오가 어때서?"
"너 영화할 거야? 아니잖아! 그냥 광고해, 광고!"
그날따라 술 취한 선배'놈'의 말이 왜 그렇게 신빙성 가득해 보였던 건지.. 다음 날 나는 조교 사무실로 찾아가 전공과목 중 'Video'를 'Commercial'로 바꿨다. 'Commercial'은 광고 사진으로 상업적 제품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었는 데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분야였다. '카메라 각도를 어떻게 해야 예쁜지, 조명은 어떻게 써야 예쁜지' 마치 정해진 답을 찾아야만 하는 과학 문제 같았다. 졸업 심사가 열리던 난 결국 나는 순수에서는 '최고점'을, 광고에서는 '최하점'을 받는 '아주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심사 결과를 두고 교수님들 간의 긴급회의가 열렸고 그 결과 광고 포트폴리오를 다시 제출하라는 기적과도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혼자가 아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촬영하라는 것이었다. 오죽 사진이 못났으면 교수님이 저렇게 까지 말씀을 하셨을까? 그래도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그 이후 나를 수렁에 빠트렸던 그 선배'놈'은 내 인생에 도움이 1도 안 되는 세 남자 중 '첫 번째 남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웨딩 스튜디오', '베이비 스튜디오', '쇼핑몰'을 거쳐 '사진 입시 학원'에서 면접을 보던 날 원장은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말과 함께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리 '지방대'라고 하더라도 '국립 4년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건만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제대로 안면강타 당한 기분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했던 나는 입시 기간 내내 학원 옆 고시원에서 쪽잠을 자며 보란 듯이 밤낮으로 수업을 했다. 수면부족으로 인해 '단기 일과성 기억상실증'을 얻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공부를 하게 된 시간이 되기도 했다.
학원이란 곳에서는 '지방대' 꼬리표가 교사의 자질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결국 나는 학벌 세탁을 위해 대한민국 예술 교육의 메카라 불리는 어느 대학원에 진학했다. 최고라고 하니 분명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건만 그 기대는 한 학기만에 무참히 박살 났다. 수업보다 휴강이 많았고 매주 이어지는 교수님들과의 술자리에 내야 하는 회비는 등록금 못지않았다. 그런데 나를 더 좌절하게 만들었던 건 출신 대학에 따라 학생들을 대하는 교수님의 일관적이지 못한 태도였다. 서울 유명 대학 출신인 동기의 작업은 20분간의 평가가, 지방 대학 출신인 내 작업에는 '응~잘했네!'가 평가의 전부였다.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나는 700만 원에 가까운 수업료를 내고 4시간 동안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수업이 끝나고 모인 술자리에서 만취하신 교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겨우 이런 말이나 듣자고 이 자리에 있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에서는, 교수에게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보였다. 한 학기 만에 휴학계를 던지고 팔자에도 없는 백수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내게 사촌 오빠의 여자친구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보라고 권했다. 바다 건너 가 본 곳이라곤 '제주도'가 전부였고 할 수 있는 영어라고는 'I can't speak English' 뿐인데 어떻게 호주를 가냐며 손사래 쳤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태평양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겁이 없는 하룻강아지였고 저돌적인 추진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못 먹어도 'Go'라는 심정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했다. 그렇게 1년간 '브리즈번'에서 꿈만 같은 청춘을 만끽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과 친구가 되어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어설펐지만 그래도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오만함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석사를 할 수도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사진으로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은 데 그중 딱 맞게 떨어지는 선과 그들만의 정체성을 사진에 녹여내는 독일 작가들의 작품이 내게는 마치 교과서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독일은 유학생이라고 하더라도 학비가 공짜나 다름없다니 생활비만 해결한다면 충분히 자립으로도 유학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나는 또 한 번 겁을 상실한 채 패기롭게 호주에서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러나 독일 프랑크프루트에 도착한 첫날부터 내 인생은 좌절의 늪에 빠져 들게 되었다. 4년간 만났던 남친'놈'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던 것이다. 눈물과 콧물이 앞을 가렸지만 당장 먹고살아야 했기에 이틀 만에 시내의 한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리고는 몸져누울 곳을 찾아 여러 곳에 세입자 면접을 보았다. 그런데 결과는 낙방, 낙방, 낙방이었다. 어쩌면 대기업 면접에 붙는 게 독일 룸메이트 면접에 붙는 것보다 더 빠르지 싶었다. 그렇다고 마냥 좌절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나를 탈락시킨 집주인 중 '락 스피릿'이 충만해 보였던 룸메이트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부디 실연에 빠진 작고도 가녀린 동양 여자아이를 가엽게 여기시어 제발 룸메이트로 받아주면 안 되겠냐고. 절실히 두드린 덕분인지 그녀는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다. 아르바이트도 구했고 방도 구했으니 더 이상 걱정이 없어야 할 독일 생활이었지만 신이 날래야 신날 수 없었다. 이별에 대한 아픔이 베이스로 깔려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 나를 더 가라앉게 만들었던 건 독일의 날씨였다. 맑은 날이 대부분인 호주에 살다 흐린 날이 대부분인 독일에 살자니 날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나를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던 건 바로 독일의 대학이었다. 독일은 대학마다 입학 시기가 다른 데 내가 가고자 했던 대학은 도착 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시험을 치러야 했다. 영어도 어설픈 내가 어떻게 독일어로 시험을 본단 말인가? 결국 시험장 문턱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며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고등학교 은사님의 전화였는 데 부산으로 돌아와 사진 교과 기간제 교사직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며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타지 생활 10년 만에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월급을 꼬박꼬박 통장에 모을 수 있다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당장 짐을 싸기 시작했고 다시 돌아오겠노라 말하며 남겨둘 짐을 아르바이트 사장님께 맡기던 날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듯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나는 독일로 돌아가지 못했고 10년이 더 지났으니 이미 그 짐들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부산에서 내가 근무하게 될 학교는 인문계 고등학생 중 전문계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위탁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교과목에 따라 학과가 나뉘어 있고 그중 나는 사진 촬영과 포토샵 교과 수업을 맡게 되었다. 특수한 교과목들이 많다 보니 교사 중 절반 이상이 정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분명 공립학교였건만 교장의 권력이 여느 사립학교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교장은 걸핏하면 우리 학과 사무실에 찾아와 문제아가 제일 많은 학과니 곧 폐과 시킬 거라는 협박을 일삼았다. 사실 이런 교장의 행동은 기간제 교사들에게 금전을 요구하는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었는데 태생부터 눈치가 빠른 나였건만 어찌 된 일인지 그때는 정말 눈치가 없었다.
학년이 끝날 무렵 갑작스레 교내에 감사실이 차려졌는데 감사 위원들은 전체 교사들 중 나를 첫 번째로 호출했다. 이유는 내가 교장에게 가져다준 '떡 상자' 때문이었다. 봄이면 꼭 쑥떡을 해 먹는 우리 집에서는 그 해도 어김없이 햇 쑥을 캐다 떡을 했다. 손이 큰 엄마는 떡이 많다며 학교 선생님들과도 나눠먹고 교장 선생님께 따로 가져다 드리라며 떡 상자를 챙겨주셨다. 출근하는 길로 나는 상자를 교장실에 두고 나왔는 데 문제는 상자 속 '떡'이 '돈'으로 둔갑하여 교사들 사이에서 내가 교장에게 돈을 상자채 주더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그 덕분 나는 기간제 교사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는 데 이것이 흔한 여자들의 텃세 정도라고 생각해 마냥 '깡'으로 버텼다. 그리고 그날 감사실에서 이 소문을 들으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감사 결과가 알려졌을 때 나는 어이마저 상실하고야 말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기간제 교사들이 교장에게 돈을 상납했다는 이유로 '경고'조치를 받았고 교장에게는 겨우 '징계성 전보'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유일하게 교장에게 돈을 상납하지 않은 사람이 나 하나라니. 그래놓고 누가 누굴 왕따 시키고 있었던 거냐. 가끔은 눈치가 없는 게 득이 되기도 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감사가 끝나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신 학기를 준비하던 중 교무실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나를 독일에서 한국으로 불러들인 은사님이었다. 어쩐 일로 오신 거냐 반갑게 묻는 내게 선생님은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셨다.
세상에 믿을 남자 하나 없다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오라고 한 거냐고 도끼눈을 뜬 채 선생님을 노려봤지만 전근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기에 선생님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선생님은 내 인생에 도움이 1도 안 되는 세 남자 중 '두 번째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 만이 내 인생을 바꾼 건 아니었다. 학교를 그만둔 지 석 달만에 내 인생에 도움이 1도 안 되는 세 남자 중 '마지막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봄날, 벚꽃 그리고 너'를 들으며 앞으로의 내 인생은 봄날과 같으리란 희망을 품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로 봄이 짧아진 것처럼 나의 봄날은 언제 오나 싶었건만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발가락 빼고는 나를 쏙 닮은 '아옹'이가 태어나고 네 살 터울로 똥고집까지 아빠를 똑 닮은 '아하'가 태어났다.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있건만 아이 아빠의 회사 사장님이자 시아버지는 급감하는 출산율을 보시며 과감하게 교복 공장 문을 닫으셨다. 하루아침에 '후계자'에서 '실직자'가 된 아이 아빠를 보고 있자니 네 식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아옹'이를 모델 삼아 사진관을 운영 중인 대학 선배 언니에게서 사진관을 해보라는 조언을 듣게 되었다. 내가 장사라니. 사진을 공부하고 경력을 쌓는 동안에도 사진관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 아빠가 한번 해보자고 권했다. 지가 할 것도 아니면서. 아이들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사진관 간판이 올라가던 날, 아이 아빠에게 말했다.
처음 사진관을 하겠다고 시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을 때 시어머니는 '그거 해서 먹고나 살겠나' 라며 한숨을 쉬셨다. 다행히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픈 한 지 두 달 만에 맘카페 입소문을 타고 멀리서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 입시 시험장에서 먹혔던 내 말빨이 이번에는 '공감'이란 힘이 더해져 주요 고객층인 엄마들에게 제대로 먹혔던 것이다. 신생아-백일-돌까지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기억해 주는 동네 언니 이미지 또한 매출 성장의 한몫을 차지했다. 매월 늘어나는 매출을 바라보며 남몰래 어깨춤을 추고 있을 즈음, 오라는 손님 대신 '코로나 바이러스'가 제 발로 코 앞까지 찾아왔다. 기하급수적으로 감염자가 늘어났지만 백신이 개발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소상공인 얼굴에는 한 없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며 어느새 마스크가 당연시 여겨질 때쯤 다시금 손님들이 발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과감히 도시 건너편에 사진관 2호점을 오픈하였다. 그리고 중학교와 평생 교육 센터를 오가며 사진 강의를 했고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사진기능사' 감독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복을 타고 난 사람은 세상을 뒤엎은 바이러스가 나타났을지 언정 그늘 아래 누워 기타나 치는 베짱이의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생 구세주와도 같은 선배 언니가 다시 한번 천금 같은 아이디어를 하사해 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찾아가는 사진관'이었다.
기존 스튜디오 촬영했던 콘셉트들을 집에서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아기와의 외출이 쉽지 않았던 엄마들에게 꽤나 반응이 좋았다. 덕분에 공중파 방송에도 출현하게 되었는 데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한껏 긴장된 모습으로 어설프게 서울말을 구사하고 있는 내 모습은 절로 쥐구멍을 찾게 만들었다.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하루의 배경 음악이 되었고 출고될 액자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으로서 '최고점'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역할인 엄마에서는 '최하점'이 매겨지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밤샘 작업으로 인해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엄마 없는 캠핑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아이들이 크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마냥 바쁘기만 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오는 유치원, 학원의 전화를 받으며 무엇이 먼저인지 고민했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진 하나가 지금의 나를 키워냈지만 지금 나에게는 내 손으로 키워내야 할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그렇게 나는 20년이 넘도록 이어온 나만의 사진 인생에 잠시나마 쉼표를 찍기로 했다. 사진관 간판을 내리던 날 아쉬움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꽤 잘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이란 원동력이 있었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도전할 수 있었고, 당당할 수 있었다.
사진관을 그만둔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내 손에는 카메라 대신 효자손이 들려 있지만 전화벨 대신 새소리를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이 마냥 행복하다. 수정해야할 컴퓨터 속 원본 대신 휴대전화에 쌓여가는 사진을 볼 때면 내 쉼표가 아이들에게 큰 느낌표 되어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비록 업데이트된 포토샵 설정을 바꾸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펜 마우스를 현란하게 휘두르는 그날이 돌아 오길 기다리며, 대한민국 워킹맘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