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꼬리 원숭이의 도시
우리는 삼겹살을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리시케시에서 델리까지 내려왔고, 짐을 풀자마자 디우에서 만났던 일행들과 만나 넷이서 한국 식당에 가 삼겹살과 김치찌개를 먹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 인가 본 것이,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먹고 나니 지난 여행의 여독이 전부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오로지 삼겹살 하나 때문에 온 델리이다 보니 미션을 수행하고 나니 할 것이 없어졌다. 여행을 시작한 지 두 달이 훨씬 넘어가고 체력은 바닥이어서 그런지 몸이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슬슬 여행에 대한 권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삼겹살과 김치찌개를 먹었으니 이제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숙소로 권태감을 보상받기 위해 850루피짜리 숙소를 예약했지만, 사실 이 지루함과 권태는 마음가짐의 문제였지 음식이나 숙소, 온수 같은 물질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물질적인 것들로부터는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지난 여행을 돌이켜 보면 모든 순간이 나름대로 행복했었고, 옆자리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 콜카타에 도착했을 때의 가슴 설레는 순간을 떠올려 보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권태감은 진정한 권태가 아닌 잠시 몸이 피곤한 탓에 느껴지는 착각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권태감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지루함을 이겨내고 푸쉬카르에 가기로 했다. D는 인도에 며칠 더 있고 싶다고 비행기를 연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함께 푸쉬카르에 가게 되었다.
델리에서 아즈메르까지 기차로 약 7시간, 아즈메르에서 다시 버스로 약 1시간 여를 달리면 라자스탄 주의 작은 도시 푸쉬카르에 도착한다. 호수를 둘러싸고 형성된 이 작은 마을은 1년에 한 번 열리는 낙타 축제로 이미 많은 여행자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며, 힌두교의 주요 성지 중 한 곳이라고도 한다. 푸쉬카르라는 도시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파란 연꽃'을 뜻한단다. 참 예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푸쉬카르를 작은 바라나시에 비유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많은 여행자들이 예찬하는 남인도의 함피보다 훨씬 좋은, 인도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라며 이 도시를 칭송했다. 안타깝게도 푸쉬카르는 나에게는 그저 호객이 심하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도시로 기억될 것 같다. 또 작은 도시 답지 않게 사람이 무척 많고 시끌벅적했던 이 곳에는 유난히 긴 꼬리 원숭이가 많아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십수마리의 원숭이들과 길게 내려온 꼬리들이 보였다. 나는 그 꼬리들이 무서웠다. 리시케시에서 원숭이에게 한 번 공격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사리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길거리에 깔린 원숭이들을 피해 호숫가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원숭이는 어디에나 있어서 피할 길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여행이 끝나갈수록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던 몸이 낫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온 뒤로 이미 몇 번의 감기 몸살을 앓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는 아픈 것이 지겨웠다. 아팠던 이야기만 따로 책으로 써도 될 기세였다.
하루는 D와, 그 사이에 생긴 또 다른 일행과 함께 셋이서 동네 뒷산에 올라가기로 했는데 감기 기운인지 체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침부터 머리가 심하게 아파서 가지 못하고 낮 시간을 꼬박 숙소에서 쉬었다. 그래도 밥을 챙겨 먹고 두통약을 먹었더니 하루 이틀은 괜찮은가 싶었지만, 푸쉬카르를 떠나기 전날 밤에 나는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D가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함께 델리로 돌아가서 D가 가고 나면 나는 혼자 암리차르나 찬디가르에 갔다가 돌아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델리행 기차를 예약해 놓았는데 딱 떠나기 전날 밤부터 죽도록 아파서 먹은 것도 다 토해내고 잠을 한 숨도 못 자고 만 것이다. 도저히 기차를 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D와 델리에 같이 가지 못하고 푸쉬카르에서 혼자 며칠 더 쉬었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막상 델리로 떠나는 당일 아침이 되니 꽤 견딜만해져서 우리는 함께 델리헹 기차에 올랐고 그것은 지옥의 서막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 푸쉬카르에서 어디에 갔고, 무얼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려고 해도 전선 위에 앉은 긴 꼬리 원숭이들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바라나시를 떠올리면 수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숙소 옥상에 누워 시집을 읽고 음악을 듣고 망고를 먹던 여름날, 가트에 앉아 바라 본 갠지스강의 풍경, 뱅갈리 토라의 좁은 골목길 사이를 거침없이 걷던 나 자신, 시타르가 만들어 내는 음악 소리, 밤 9시가 넘어도 30도가 넘는 열대야가 계속되던 5월, 매일 오후에 빠뜨리지 않고 먹던 라씨 등등. 콜카타도, 다르질링도, 디우도, 리시케시도 모두 다 그랬다. 지나왔던 도시들에는 모두 도시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었다. 어떤 도시를 떠올릴 때, 아팠던 기억과 어디에나 있던 긴 꼬리 원숭이들과 그들의 꼬리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