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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라떼 Jun 22. 2018

검은 숲 어느 작은 카페 주인 할아버지 이야기

독일 티티제 그리고 펠트베르크 베렌탈

 혹시 독일 남부에 위치한 검은 숲에 대해 처음 들어본다고 할지라도,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어버려 마녀를 만났던 바로 그 숲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것이다.  

독일어로는 슈바르츠 발트(Scwarzwald), 영어로는 Black Forest,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블랙포레스트케익도 바로 이 검은 숲 지역의 특산품(?)이다. 

 

 나는 예전부터 눈 쌓인 전나무숲에 대한 어떤 환상 같은 것이 있어서(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숲에 가게 되었다. 물론 본고장에서 먹는 블랙포레스트케익도 목표 중 하나였다. 깊게 들어가면 트래킹도 할 수 있지만 나는 프라이 부르크에서 기차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검은 숲 초입에 있는 호수 티티제와 티티제에서 다시 기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마을 펠트베르크 베렌탈에만 다녀오기로 했다.  

 

 그날, 프라이 부르크는 진눈깨비만 흩날리고 있었는데 기차를 타고 티티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티티제역에 내리자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이 펼쳐졌다. 걸어서 호수 앞까지 갔지만 눈이 많이 내려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나는 별생각 없이 어그부츠를 신고 갔기 때문에 발이 녹은 눈에 젖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당연히 그 날씨에 놀러 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가게는 죄다 문을 닫았고 오직 나만 눈발을 막아주지도 못하는 작은 우산을 쓴 채 다 젖은 어그부츠를 신고 눈밭 위를 걷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예전부터 겨울이 좋았다. 모두들 내게 휴학까지 해놓고 시간도 많으면서 왜 굳이 날도 춥고 해도 빨리 지는 겨울에 유럽여행을 가냐고 물었지만, 나는 눈 쌓인 유럽에 가보고 싶었고 크리스마스 마켓도 보고 싶었다. 티티제에 간 것은 유럽에 도착한 지 딱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언 발이야 어쨌든 간에 이틀 만에 눈 쌓인 유럽을 보겠다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기에 그냥 바로 다시 기차를 타고 펠트베르크 베렌탈로 올라가기로 했다. 베렌탈에는 가장 유명한 블랙포레스트케익집이 있다. 나는 가게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 그저 그곳에 가면 유명한 케이크집이 있다는 것만 알고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티티제에서 펠트베르크 베렌탈까지는 기차로 고작 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하지만 그 10분 사이에 창 밖 풍경은 프라이 부르크에서 티티제로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변했다. 절벽 아래에서부터 눈발에 가려 높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키가 큰 전나무들이 솟아올라 있었다. 거센 눈발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고, 자연의 장엄함 앞에서 공포심 반 경외심 반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펠트베르크 베렌탈이었다.  


펠트베르크 베렌탈 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풍경


 베렌탈역은 엄청나게 작아서 마치 우리나라 시골 간이역 같았으며, 역 주변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몇 명이 나와 함께 내렸지만 그들은 전부 역에서 나오자마자 앞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스키장에 가는 길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동네에 나 혼자 남았다. 눈은 아까보다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해서 어디를 걸어도 발목이 푹푹 빠졌다. 5분 정도를 무작정 걸어 올라가다 보니 카페가 하나 나왔다. 블랙포레스트케익을 파는 바로 그 가게였다. 그러나 가게 문 앞에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간다는 푯말만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그냥 돌아와야 했던 바로 그 케익가게


 크리스마스가 대목인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몇 주 동안씩도 문을 닫는 가게도 많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별생각 없이 올라간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티티제에서부터 이미 다 젖어 버린 어그부츠를 신은 채로 여전히 눈밭을 걷고 있으니 발가락은 점점 감각이 없어져 가고 있었다. 프라이 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는 한 시간 뒤에나 있었고, 눈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고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플랫폼 앞 벤치에 앉아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혹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역에 없나 싶어 둘러보다가 역사에 작은 카페가 딸려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제대로 된 간판도 하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그 카페의 출입문을 역무원용 사무실 문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카페에 들어서자 머리가 하얗게 샌 주인 할아버지와 아무래도 손님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친구들로 보이는 다른 할아버지 두 명이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외국인인 내가 들어서자 할아버지들은 내가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나는 너무 추워서 할아버지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일단 따뜻하게 데운 와인인 글뤼바인을 한 잔 달라고 했는데, 주인 할아버지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인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화장실이 아니라 글뤼바인이 먹고 싶다고 다시 말했더니 할아버지는 그제야 알아듣고서는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글뤼바인을 갖고 나온 아저씨는 내 꼴을 보더니 가게 한편에 있던 히터를 켜주고는 따뜻한 바람이 잘 닿는 테이블로 손수 내 자리를 옮겨 주셨다.  

히터의 온기를 느끼면서 따뜻한 와인을 마시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추위가 가시고 나니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의 시선이 다시금 느껴졌다. 할아버지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신경 쓰지 않고 티비를 보는 척을 했지만 곁눈질로 계속해서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어 죽을 뻔 한 나를 살려 준 글뤼바인




 어느새 프라이 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계산을 하기 위해 일어나 동전 지갑에 있는 동전을 털어 내었다. 유럽에 도착한 지 고작 이틀째였던 나는 아직 유로화 단위가 헷갈려 할아버지에게 동전을 드리며 이 금액이 맞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내 동전을 하나하나 세어보더니 맞다며 웃어 주었다.  

떠나기 전, 주인 할아버지에게 사진을 함께 찍고 싶다고 했다. 나는 첫 유럽여행 이후로는 몇 군데의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특히 내 사진을 거의 찍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생애 첫 배낭여행 이틀 차인 나에게는 모든 것을 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로 나를 데려가 친구들에게 내 카메라를 대신 넘겨주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고 할아버지들에게 인사를 하고 플랫폼으로 다시 걸어 나와 기차를 기다리는데, 기차가 오기 직전 갑자기 주인 할아버지가 플랫폼으로 나오더니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손을 펼쳐보니 가게 사진이 인쇄된 성냥갑 3곽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주고 간 성냥 세 갑


 여행 이틀 차인 내게 할아버지는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프라이 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할아버지가 건네 준 성냥갑들을 보니 기분이 갑자기 울컥해져 왔다.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독일인이었던 할아버지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똑같은 성냥갑이 한 갑도 아니고 무려 세 갑이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아주 잠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렀던 이 가게를, 이 잠깐의 추억을 오래도록 잊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나는 한참이 지난 아직도 할아버지가 주신 성냥갑을 쓰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당시 나는 여행 가계부를 쓰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 프라이 부르크의 숙소에서 가계부를 적으며 돈 계산을 해보니 심지어 나는 할아버지에게 글뤼바인 값을 덜 주었더라. 돈도 덜 냈으면서 뻔뻔하게 웃으며 사진까지 찍자고 한 나에게 몇 분 후 가게에서 뛰쳐나와 성냥갑들을 건네주고 간 할아버지가 유럽여행을 하는 35일 내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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