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연꽃을 아시는지? 지름이 3m에 이르는 자이언트 아마존 위터 릴리(Victoria amazonica)다. 어린이의 무게 정도는 거뜬히 견디는 튼튼한 식물이다. 꽃은 48시간 동안만 피는데, 신기하게도 첫날 밤에는 흰 색으로 개화했다가 둘째 날 밤에 핑크색으로 변하여 사진작가들로 하여금 그 귀한 순간을 포착하도록 자극한다. 1837년, 새롭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남아메리카의 British Guyana에서 처음 발견된 이 식물은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를 기념하여 빅토리아 아마조니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1849년 영국으로의 이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영국, 미국, 호주 등지로 퍼져나갔다. 이 거대한 수련이 있는 영국 큐가든의 온실에는 연중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미술사에도 끊임 없이 관람객의 발걸음을 불러들이는 연꽃이 있다. 모네의 수련이다.
모네, 수련, 1906, 89.9 × 94.1 cm
인상주의의 정수로 손꼽히는 클로드 모네는 생전 250여 점의 수련을 그렸다. 푸른색, 녹색, 보랏빛의 파스텔 톤이 어우러진 물 위에 분홍빛과 민트빛의 수련이 빠른 붓터치로 올려져 있다. 무엇보다 색의 조화가 아름다워 자꾸만 멈춰서 보게 되는 마법 같은 그림이다.
작품 제목이 <수련>이긴 하지만, 모네가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수련 자체는 아니었다. 그가 화면에 담고 싶었던 것은 수련이 떠 있는 연못, 그 반짝이는 물빛, 물결에 반사되는 빛의 변화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은 모네 평생의 화두였다. 1872년, '인상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모네의 대표작 <인상, 해돋이>를 그렸을 때부터 나머지 생애 내내 순간적으로 변하는 빛의 인상을 붙잡기 원했다. 사진기의 발달 때문이었다. 1839년 다게르가 사진기를 발명한 이래로 사진술은 탤벗, 아처, 매독스에 의해 계속해서 발전하였다. 급격히 발전하는 사진기에 화가들은 위기를 느꼈다.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화가의 역할을 사진기가 대신하게 된다는 것은 밥줄이 끊기는 것을 의미했다.
이 위기의 때, 모네는 정면 승부를 결심했다. 그림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순간을 정확히 그려보기로.
모네가 선택한 소재는 빛이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 새벽의 빛, 아침의 빛, 한낮의 빛, 석양의 빛... 비오는 날의 빛, 화창한 날의 빛, 안개낀 날의 빛... 봄빛, 여름빛, 가을빛, 겨울빛...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빛을 포착하고자 했다. 모네가 작은 캔버스를 들고, 루앙 대성당이나 짚더미 같은 대상을 연속해서, 빠른 붓질로 그렸던 것은 이런 이유였다.
모네는 오래도록 안정적인 거처를 찾아 헤맸다. 파리, 아르장퇴유, 푸아시, 1883년,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에 정착했고, 집 안팎으로 꽃을 심기 시작했다. 모네는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을 섬세하게 계산하여 수종을 택했다. 2주 간격으로 새로운 꽃들이 개화할 수 있도록. 미술 서적보다 원예 카탈로그를 더 많이 볼 만큼 관심이 있었고, 직접 잡초를 뽑고 땅을 파고 아이리스, 수선화, 양귀비, 장미, 모란을 심었다. 눈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동원해 자연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원을 돌보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하다던 모네는 손수 심고 가꾸던 자신의 정원이 무르 익으면서 꽃이 피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을 그렸다.
비평가 아르센 알렉상드르는 모네의 정원을 "온갖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팔레트"가 나나타는 "특별한 광경"이며, 그곳에서 "위대한 색채 전문가가 꽃으로 피워올린 폭죽"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p.104-105) 모네의 정원은 요즘도 정원 디자이너들에게 손꼽히는 곳이다.
지베르니에 정착한지 10년 후, 모네는 집 근처의 땅을 약간 더 구입했다. 1200평에 약간 못 미치는 땅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모네는 이곳을 연못 정원으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빛을 반사하는 반짝이는 물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네가 연못을 만들겠다고 계획서를 관청에 제출하였을 때, 인근의 주민들은 물의 흐름이 막히거나 수질이 오염될까봐 염려했다. 모네의 계획은 세 번 거절 당했다. 네 번째 도전 만에,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 연못물의 순환을 마을 주민들이 물을 사용하지 않는 밤으로만 제한하겠다고 합의한 결과였다.
고생 끝에 연못 조성에 성공하였지만, 모네는 일년 정도 연못을 그리지 않았다. 주변의 수목이 자리를 잡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더러, 자신도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대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이젤 대신 모네는 벤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매일 거기에 앉아 연못을, 물을, 그리고 수련을 관찰했다.
"수련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 순간 갑자기 연못에서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나는 바로 팔레트를 집어들었다." (모네가 사랑한 정원, p.16)
이후 모네는 30여 년 동안 수련을 그렸다.
수련 그림은 시기마다 변주를 보인다. 1899년에는 일본식 다리 주변의 풍경을 자잘한 붓터치로 채웠고, 1906년 경에는 수련을 띄운 연못으로 화면 전체를 채웠다. 색채와 붓놀림이 한층 부드러워진 것이 특징이다.
1908년에는 둥근 캔버스를 사용하면서 장식적측면을 부각시켰다. 채도가 더 높은 색채를 사용하였고, 붓의 율동감이 크게 느껴진다.
1912년 백내장을 진단을 받은 뒤에는 그림이 눈에 띄게 어둡고 거칠어졌다. 병이 진행되면서 세상이 점점 더 뿌옇게 보였기 때문일 거다.
1919년 검사를 받았을 때는 오른쪽 시력은 모두 사라졌고, 왼쪽은 10%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모네는 그간 거부하던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세 차례나. 시야가 노랗게 보이는 황야증과 푸르게 보이는 후유증을 겪고 나서 모네는 다시 수련에 매달렸다. 그의 마지막 대작을 위해서였다.
1899
1908, Diameter 80 cm
Water Lily Pond and Weeping Willow, 1916, 140 x 150 cm
인생의 끝에 선 노화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수련 연작에 매달렸다. 높이 2m, 폭 4.3m에 이르는 거대한 캔버스에 빠른 손놀림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이번에도 이루고자 하는 바는 똑같았다. 빛에 반짝이는 물을 재현하겠다는 것. 연못에 떠 있는 수련, 움직이는 버드나무 가지, 물에 비치는 구름은 그 목적을 위한 보조 장치였다. 경륜의 화가는 이 모든 것들의 색채를 섬세하게 조절하여 하나로 어우러지게 묶어 내면서 물의 반짝임을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모네의 유언에 따라 이 작품들은 캔버스에서 분리되어 오랑주리 미술관의 타원형 모양으로 된 두 개의 방안, 그 둥근 벽 위, 자연광 아래에 전시되었다. 가운데 배치된 벤치에 앉으면, 모네의 지베르니 연못으로 둘러쌓인다. 모네가 연못 옆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자연을 관찰했다면, 관람자는 전시실의 벤치에 앉아 자연을 담은 모네의 작품을 한없이 바라보게 된다.
모네의 인생이 집대성된 이 전시실은 순간을 잡기 위한 그의 일관된 목표가 과녁을 꿰뚫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Claude monet, Ninfee e Nuvole, 1920-1926 (orangerie), 부분
모네는 1926년 12월 5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소박한 장례였다. 꽃이나 화환은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신신 당부하며 정원에 있는 꽃을 이런 일에 쓰려고 꺾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유언에 따라 가족들은 밀풀 다발로만 관 위를 장식했다.
일평생 하나의 목표를 추구했고, 결국 그것을 달성했던 모네. 그의 <수련>을 마주할 때마다 어쩐지 숙연해지는 것은 거기에 모네의 인생 전체가 농축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 인생의 화두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느만큼 깊이, 또 얼마만큼 오래 추구할 수 있을까. 길고 하얀 수염을 드리운 모네가 <수련> 앞에 서서 내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