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 앙케르, 1859-1935
처음 보는 그림이 떠 있는 컴퓨터 화면을 한참 들여다 봤습니다. 너무 좋아서요. 가장 먼저는 푸른 벽 위로 들어오는 햇빛이 제 눈을 사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푸른 색의 벽과 노란 빛의 커튼, 소녀의 머리카락이 만들어내는 색의 대조에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자칫 강하거나 촌스러울 수 있는 이 보색이 카페트의 중화된 푸른빛과 노란빛에 의해 완화되고, 방 안 가득한 햇빛에 의해 합쳐지고 있어요. 화면의 대부분이 푸른색인데도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적당한 보색의 사용과 톤의 조절 때문에요. 앙리 마티스 외에 푸른 색을 이렇게 용감하게 사용하는 화가는 본 적이 없습니다. 훨씬 더 온화한 푸른색이죠.
눈을 뗄 수 없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낯선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나 아케르 (Anna Ancher). 덴마크의 작은 바닷가 마을, 스카겐에서 살며 평생 그림을 그렸던 여성 화가였습니다.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주는 미대를 찾아 코펜하겐에서 3년을 보내고, 파리에까지 건너가 그림을 배웠던 열정의 화가였어요. 남편 미카엘 앙케르와 딸 헬가 앙케르도 화가였고, 스카겐에서 예술가 동료들과 예술가 마을을 이루며 살았고요.
그림을 더 찾아 보았습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 바느질을 하는 이름 모를 여성, 창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뒷 모습... 하나 같이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지만, 그림을 보면 볼 수록 '좋다-'라는 느낌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그녀가 그린 실내 풍경에도 매료되었습니다. 추상화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화된 화면인데, 역시나 푸른빛과 주황빛의 대조가 너무나도 따뜻하고 세련됩니다.
마음이 자꾸 가더라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구글창을 열어 그녀의 그림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곰곰 생각했어요. 왜 자꾸 아나 앙케르의 그림에 끌리는 걸까. 그것이 그저 세련된 보색의 사용 때문일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제가 아나 앙케르의 그림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그녀의 그림 가득 흐르는 빛이란 걸요.
빛은 그 당시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의 화두였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해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수많은 화가들이 평생을 걸었죠. 파리에서 유학을 했던 아나 앙케르도 그 영향을 분명 받았습니다. 화사한 색으로 빛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것을 보면 말예요. 그런데, 아나 앙케르의 빛은 프랑스의 인상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녀의 빛은 순간보다는 영원에 가까운 느낌이 듭니다. 지금 당장 잡지 않으면 내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은 조바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찾아올 것 같은 평안한 빛이죠. 그것은 그녀의 빛이 쏟아지는 대상이 책 읽는 어머니, 바느질하는 여인, 집 안의 한 귀퉁이처럼 늘 그곳에 있는 익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아나 앙케르의 그림 속 빛은 개인적으로 제가 늘 그리워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그린 빛은 대개 낮과 오후의 빛이에요. 집 안을 가득 내리 쬐는 오후의 빛. 벽을 타고 길게 내려오는 창틀의 그림자. 그 빛을 받고 있는 딸 아이.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의 저로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고 느낄 수 없는 빛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며 대리만족 하나 봐요. 평일 낮에 집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요.
그런데 사실은 알아요. 그것이 이 결코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요.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 보고 살림 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지 압니다. 해봤으니까요. 그땐 또 사회에서 한 몫 멋드러지게 해내고 싶어했죠. 집안에 내리쬐는 빛, 아이의 뒷모습에 온전히 김탄하지 못핬어요.
그래서 아나 앙케르의 그림이 더 대단해 보여요.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 만족감이 느껴져서요. 본인이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과 살림과 육아라는 노동에 대해 비참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그림은 나올 수 없었겠죠.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은 기본적으로는 내면이 건강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엄마 아내 직장인으로 살다보니 '엄마의 마음 먹기'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아요. 아나 앙케르가 그린 소소한 일상이 아름다운 것은 자존감이 건강했던 것도 있지만, 그녀가 자신의 삶을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도와주는 환경도 분명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남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봐요.
아나 앙케르의 남편인 미카엘 앙케르는 화가였습니다. 예술가 마을 스카겐을 찾아와 예술가 공동체에서 아나 앙케르를 만나서 결혼했지요. 그리고 3년 뒤인 1883년에 딸 헬가를 낳았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그로부터 1년 뒤, 남편 미카엘 앙케르가 완성한 아나 앙케르의 초상화입니다. 미카엘은 이 그림을 위한 습작을 헬가를 출산한 1883년에 해에 그렸는데, 그래서인지 1884년에 완성한 그림에서도 아나 앙케르는 임신 중인 것처럼 보여요.
제 눈을 잡았던 것은 그림의 제목이었습니다. <화가의 아내, 화가 아나 앙케르>. 남자 화가가 자신의 아내를 그릴 때, 그녀가 아무리 화가라 하더라도, 작품 제목에 "나의 아내는 화가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본 적 없어서일까요. 이 제목은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도, 아이를 출산한 후에도, 미카엘은 자신의 아내가 자신과 동등한 동료임을 잊지 않았던 거에요. 아내와 엄마라는 틀로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화가'로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이,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당당히 알리는 태도가 적어도 미술사에서는 이례적입니다.
남편의 따뜻한 응원과 든든한 지지를 받는 아나 앙케르는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들고, 외출복을 입고, 당당히 집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또 그림 밖에서요. 아나 앙케르는 1913년 덴마크 정부 훈장을 받았고, 앙케르 부부의 초상화는 덴마크 1,000 크로네 지폐에 새겨져 있습니다.
안나 앙케르의 그림에서 녹아 있는 지금 자기의 삶에 자족하는 태도 또한 제 마음을 끌어요. 그녀의 그림 속에는 호화로운 것들이 없습니다. 화려한 꽃이 만개한 정원도, 최신 유행의 최고급 드레스도, 삐까번쩍한 저택도 아니에요. 회가의 삶이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그치만 그림 속 사람들은 그 자체로 만족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합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요. 그대로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소박한 일상을 감사히 누리는 평범함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꾸만 마음을 갑니다.
안나 앙케르의 화업도 그림과 꼭 닮았습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깜짝 놀랄 만한 예술적 혁신에 대한 욕심이나 세계의 중심에 서야겠다는 야망, 또는 미술사에 족적을 남기겠다는 야심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저 고향인 덴마크의 작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내 행복을 가꾸며 살았죠.
살아오면서 현재에 안주하는 태도에는 발전이 없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듣는 우리네의 삶...현재보다 많은 돈, 큰 집, 높은 지위... 우리는 혹시 별 부질 없는 것들로 찬 미래를 욕망하며 지금 내 마당에 핀 작은 꽃 하나, 우리 집 안에 내리쬐는 햇살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요.
안나 앙케르의 그림은 별 것 없는 일상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줍니다. 저 또한 가진 것에 감사하고 받은 것에 만족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오늘보다 대단한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때요. 자족하는 마음이 오늘을 충분히 충만하게 만들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