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테렐지 국립공원
매년 봄이면 훌쩍 떠나온 몇 년 간. 서른이 되면서부터는 통장의 잔고가 곧 네 자존심이라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터라 이번 봄만큼은 지나가 보자 하고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눈부신 햇살이 창문으로 부서져 들어온 어느 날, ‘어서 안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이 찬란한 햇살을 만끽해보렴’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기라도 한 듯 “승마를 배워야겠어”라고 결심해 버린다. 말을 타고 광활한 초원을 누빌 수 있다는 몽골로 승마 여행을 가야 지하고 바로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마침 3주 뒤 몽골 승마클럽에서 알맞은 승마 여행 패키지를 발견. 바로 이거야!
문제는, 말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초보라는 사실. 작년에 카타르 사막 투어에서 낙타를 처음 타보고 이후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동물들에도 매료되어 언젠가 말도 타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이 로켓과 같은 추진력과 함께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 머릿속 승마의 연관 검색어는 ‘낙마 사고’인지라 초보 주제에 몽골의 초원에서 말과 함께 달리고 싶은 욕구 하나로 덤비는 것이 슬쩍 걱정이 되어 충동적으로 예약을 마친 승마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저… 이번 여행에 합류하게 된 승마 초보인데 무리 없이 말을 탈 수 있을까요? 참, 동물이랑은 커뮤니케이션이 좀 되는 편이긴 한데요…” (순간 내가 뱉어놓고도 어이없음이다)
“하하 네~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하죠. 하하하.. 승마가 운동량이 많으니 짬짬이 운동도 하시고 몸 잘 풀고 오세요~”
여행사에서 보내준 승마 시 주의사항을 읽으며, 몸을 만들기 위해 얼마 안 남았지만 몽골 가기 전에 주말에 강아지들 데리고 동네 뒷산이라도 한번 올라가고 퇴근시간 버스 몇 정거장 앞에 내려 집까지 걷기 운동도 좀 해볼까 생각만 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정신 차려보니 이미 나는 몽골에 와 있다.
울란바토르의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전날 오후에 도착해 몽골의 테렐지 국립공원으로 이동하는데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승마 첫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의 승마를 위해 매여 있는 말들에게 다가갔다. 말을 이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본 적이 있던가. 우아한 속눈썹을 가진 눈을 깜박이며 풀을 뜯어먹는 진짜 말들을 보며 내심 긴장이 된다. 말들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사람을 태우고 저녁이면 초원에 방목되어 풀을 뜯어먹고 이따금 아주 멀리까지 나간 말들을 불러와야 하기 때문에 다음날 승마를 위해 말을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아침도 먹고 말이 다 준비될 때까지 긴장된 마음을 다스리며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일행이 우리를 찾으러 왔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말을 타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깜박 잠이 든 사이 말을 타실 줄 아는 분이 길들이기 힘든 말에 올라타다가 시작부터 말에서 잘못 떨어져 목을 다쳐서 긴급히 울란바토르 시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걱정스러운 소식과 함께…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더욱더 긴장하여 남은 말에 올라타게 되었다. 말잡이 몽골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올라탔는데 몽골의 말들은 작은 편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는 꽤 높게 느껴졌다. 내가 올라탄 말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일단 앉았는데 오전에 기초 교육을 해준다던 얘기만 믿었는데 바로 출발을 하는 것이다. 몽골 말들은 “츄”라고 하면 달리고, 말을 세우려면 고삐를 서서히 당기면 되고 방향도 한쪽 고삐를 당겨 말에게 알려주면 된다고 한다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주의사항에서 다 읽은 내용이긴 하지만 몸이 긴장으로 뻣뻣한 상태에서 출발을 감행하게 되었다.
다행히 말이 신기하게 먼저 가는 말들을 알아서 따라가서 방향 잡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처음이라 불안해하니 몽골 길잡이 아저씨가 내 말의 끈을 잡고 같이 가 주셔서 슬슬 적응이 줄고 있었다.
탁 트인 초원지대에서 승마클럽에서 준비해 준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서 다시 오후의 승마 일정이 시작됐다. 오전에 문제없이 말을 탔으니 오후에는 혼자 탈 수 있을 것 같아 출발하는데 말이 갑자기 이상하다. 내가 탄 말이 가다가 멈춰서 자꾸 고개를 확 숙이고 풀을 뜯어먹으려고 하는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잘 부탁한다 말도 없이 다짜고짜 탔기 때문에 그런가? 하고 찜찜해하면서 탄 상태로 말을 달래려는데 말은 계속 풀을 먹고 싶어 했다. 자세히 보니 오전에 탔던 말이 아니다! 일행 중 아침에 어떤 말을 탔던 언니가 말 다루는 걸 힘겨워하는 걸 보고 기억이 났는데 말이 바뀐 것이다. 말과의 기싸움에 밀려 승마가 힘들어지고 있어 이 사실을 길잡이 분들에게 알려야 했다.
전날 밤 마음껏 풀을 먹지 못했나 싶은 말에게 내심 미안해하면서 어쨌든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통제를 부탁하여 몽골 길잡이 아저씨가 오는 순간 내가 탄 말이 뭐에 놀랐는지 냅다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내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아 이러다 떨어지는 거구나’라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으나 절대로 이렇게 떨어질 수 없다는 오기가 불끈 들었다. 쭉 도보 정도로만 가다가 갑자기 달리는 말 위에 있게 된 나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날아가는 선글라스, 벗겨진 모자를 뒤로하고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자세를 낮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본능적 힘으로 버티고 어느 순간 말이 멈췄다. 내가 고삐를 잡아당긴 건지 말이 스스로 멈춘 건지도 모르겠고 심장은 벌렁벌렁했지만 그제야 내가 달리는 말 위에서 버텨낸 현실로 감각이 되돌아왔다. 길잡이 아저씨가 탄 말에 내가 탄 말의 끈을 묶어 다시 출발하며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 뒤로도 몽골 길잡이 아저씨는 나만 보면 엄지를 치켜세우셨다. 잘 버텼다고.
첫째 날의 혹독한 신고식을 마치고 다음 날, 전날의 충격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는 온순한 성격의 말을 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둘째 날도 어쩐지 이미 다들 말을 잡고 올라타버렸고 하필 또 남은 말은 달리고 싶어 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걱정이 된 몽골 길잡이 아저씨가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 안장을 바꿔주는 등 이리저리 준비하는 사이 또 일행들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고 나는 또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일단 달리고 싶어 하는 말 위에 탄 뒤 몽골 길잡이 아저씨가 내가 탄 말의 끈을 잡고 출발했다. 일행들과 한참 뒤떨어져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달려가야 했다. 어제 잠깐 질주하는 말 위에 앉아 버티긴 했지만 마음과 몸의 준비는 안되었는데 달리기 시작하니 또 고된 하루의 시작인가 싶었다.
몸에 힘을 빼니 속의 장기까지 흔들거리며 곧 말에서 튕겨 나갈 것 같아 허벅지에 힘을 줘서 말에 고정하고 리듬을 울며 겨자 먹기로 타면서 앞의 몽골 아저씨들이 말을 타는 몸짓을 보고 또 따라 해 가며 내가 탄 말과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갑자기 나는 달리는 말 위에서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앗, 이거다! 그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어 안 보였던 몽골 초원의 탁 트인 시야와 자연이 눈앞에 확 다가오면서 행복감이 몰려왔다.
말과 함께 열심히 달려서 일행을 따라잡고 난 뒤에는 호흡이 맞는 말로 바꾸고 고삐를 잡고 말 위에서 드디어 진정한 승마를 즐기기 시작했다. 풀만 겨우 뜯어먹고 물살이 세서 혼자 건너기도 힘들 냇가와 강물을 무거운 나를 태우고 무사히 건너 초원을 달리기도 하는 말의 목을 때때로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격려해주고 점점 더 말과 교감하는 느낌이 들었다. 둘째 날은 다른 장소의 몽골 유목민 캠프인 게르를 말 타고 이동하여 숙박하는 일정이어서 첫날보다 더 많이 달렸지만 감을 익힌 후에는 몸은 약간 고될지라도 마음은 더욱 즐거웠다. 또한 완전 초보인데 처음부터 힘든 말을 만나 넋이 나갔던 내가 불쌍했는지 승마 여행 끝까지 잘 챙겨주신 몽골인들 덕분에 내가 마치 칭기즈칸의 후예라도 된 양 (처음에는 말도 혼자 못 타고 줄에 끌려갔으니 살기 위해 원나라에 끌려가는 노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몽골 초원에서의 승마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아침에는 말을 타고 몽골의 자연을 만끽하며, 오후에는 승마 후 휴식을 취하고 여유롭게 캠프에 있는 개들과 놀기도 하며, 밤에는 고원의 쏟아지는 몽골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보낸 낭만적인 몽골 여행을 오래도록 회상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