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by 율이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 편이다.

믿는 "편"이라고 한 건 나도 날 잘 모르겠어서다.

내가 믿는 것을 신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세례를 받아 성당을 다녔다.

하지만 "어떤 종교를 믿느냐" 라는 말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가 않게 느껴진다.

귀찮아서 그냥 "천주교"라고 답하고 다니긴 한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개똥 철학자 같은 나만의 얕은 생각들을 좀 늘어놓자면 이렇다.

나에게 신은 거대한 진리 같은 이미지다.

인간 개개인은 절대 진리를 다 알 수 없다.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코끼리 만지듯,

인간은 거대한 진리의 일부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진리는 하나(?)인데, 각자 일부만을 보니 종교가 갈라질 수밖에.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종교는 인간의 산물로 봐야 하고, 그래서 종교의 가르침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종교적 해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어떤 끔찍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는지는 역사가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그럼 종교가 아니면 신이 너한테 무슨 의미냐, 라고 한다면,

글쎄..

내가 추구하는 신앙은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어쨌든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나의 근간에 많은 영향을 줬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사랑 받아 마땅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다.

사람이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세상이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이런 출발점에서부터 더듬더듬, 미약하게나마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파이터였다.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의 진리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던 시절, 나는 "세상에 모든 차별이 없어지면 지금 죽어도 좋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게 초등학생 때다.

장애인 글짓기 대회에서 다른 친구들이 "장애인을 잘 도와줘야 한다"는 내용으로 글을 쓸 때 "장애인을 왜 도와야 할 무기력한 대상으로만 보느냐, 장애인을 도와준다고 할 때 정작 도움의 대상으로 지목받는 그들의 감정이나 생각은 왜 아무도 묻지 않느냐" 는 취지의 글을 쓴 것도 초등학생 때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같은 반이었던 자폐장애인 친구를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장애인으로만" 대하는 일을 참지 못해 대상이 누구든 상관치 않고 반항하고 싸우기도 했었다.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장애 여부가 끌고 오는 사회적 시선 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적 관계에 불필요하게 큰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들에 분노했다.

(그렇다고 내가 착한 학생이었던 건 아니다. 선생님들에게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 늘 골칫거리였고, 인간으로 한참 성숙하지 못하던 시절 동급생들에게 못되게 굴었던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사회적 맥락이나 차별과 같은 문제들을 잘 감지했고 늘 그런 문제들이 아팠다.

나에게는 너무 선명한 것들이 친구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이상했고, 외로웠고, 아팠다.

결국에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됐었다.

나는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나는 이제 보건대학원에서 건강 격차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결국에는 차별 문제로 돌아온 것이다.

돌고 돌아 이 진로를 택하면서 가장 크게 마음에 걸렸던 지점은, "과연 내가 분란을 일으킬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오만" 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간 개개인은 절대 진리를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로만 살아봤다.

심지어 나는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런 내가 뭐라고 사회를 휘젓는 연구를 해보겠다는 당찬 야망을 품는다는 건가.

하지만 모두가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회가 한 발짝도 더 진리에 가깝게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에는 이 진로에 뛰어들었다.


최근에 이런 고민에 종지부를 찍어준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귀찮더라도 웬만하면 본가에 갔을 때라도 성당 미사에 참석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부모님과 시간도 보내고 오랜만에 속세에서 떨어져 환기도 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그 날도 부모님과 함께 미사를 하러 가서 가만히 있기 힘들어 꼼지락 거리던 중이었다.

미사 중간에는 신부님께서 강론이라는 것을 하는데, 해당 주말에 정해져 있는 성경 구절에 대해 여러가지 말씀을 해주시는 시간이다.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다.

"... 예수님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합니다. ... "

분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내가 생각하는 그 분열이려나?

뭔가 묘하게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앞에 놓여 있던 책에서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찾아 보았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또 이런 구절도 있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신부님께서는 해당 구절에 대해, '누군가의 고통과 구조적 타락에 대해 침묵하는 사회의 고요한 "평화" 는 진짜 평화가 아니며, 분열과 갈등이 필요한 경우'라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내가 위로 받은 부분은 여기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탄식은 실망과 개탄의 탄식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탄식이 나에게는 큰 용기를 줬다.

이 구절에서 신은 예수의 입을 빌려 실망한다.

실망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신뢰와 기대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신은 인간이 직접 분열을 일으켜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는 믿었고, 기대했다.

(라고 내 맘대로 해석했다.

이래서 내가 신에 대한 나의 신앙을 신과 나의 "개인적인 관계" 라고 한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나의 진리가 절대 진리의 조각들과 얼마나 닿아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턱없이 부족할 거다.

그래도 최대한 흉내는 내보려고 노력한다.

하나는 확실하다.

갈수록 더 분명해진다.

내가 붙잡고 있는 진리의 방향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절박하다.


조금만 더 믿어보자.

나를? 내가 붙잡고 있는 진리를? 음..

일단은 나의 연구가 절박한 사람들의 실재를 붙잡고 가보자.



힘내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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