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

7화. 아무 일도 아닌 순간들이

by 담치씨

봄의 끝은 이상했다.
하루는 맑았다가 하루는 비가 왔다.
햇살이 따뜻한 날이면 마음이 느긋해졌고,
구름이 낀 날엔 이상하게 수아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나는 여전히 그 애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거리, 같은 자세.
아침마다 창가 쪽으로 흘러드는 햇살 속에
수아의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걸 보는 게
요즘 내 하루의 시작이었다.


모의고사가 다가오면서 교실은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 책을 덮는 소리,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의 짧은 한숨.

수아는 조용히 필기를 정리했다.
책 모서리가 반듯했고, 노트의 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신기했다.
나는 늘 삐뚤게 쓰던 사람이라,
그 반듯함이 이상하게 부러웠다.


“너 글씨 진짜 반듯하다.”
“그냥… 보기 좋으라고 쓰는 거야.”
“보기 좋긴 해.”

“그럼 많이 봐.”


그 애가 말하곤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인데,
그 한마디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쉬는 시간마다
나는 괜히 수아의 필통 근처에 펜을 떨어뜨렸다.
그럼 수아가 말했다.


“또?”
“응, 이번엔 진짜 실수야.”
“그 말 세 번째야.”
“이번엔 진짜.”
“그래서 매번 주워주는 거야?”
“응, 고맙다는 뜻으로.”


그 애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아주 짧았지만,
교실의 모든 소리를 잠깐 멈추게 했다.


하루는 모의고사 전날이었다.
다들 공부하느라 조용했고,
햇빛이 길게 교실 바닥을 비췄다.


“이 문제 모르지?”


수아가 말했다.


“몰라. 봐도 모르겠어.”
“봐봐. 여기 공식 쓰여 있잖아.”
“아, 그래서 그렇게 쉬운 거였어?”
“응. 근데 너는 틀렸잖아.”
“나한텐 어려운 공식이야.”
“그게 무슨 공식인데.”
“‘너 앞에서는 집중 안 되는 공식’.”


수아가 고개를 들었다.


“진짜 이상한 애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때의 웃음은 공부보다 어려운 감정이었다.


하교 종이 울릴 때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
수업 종이 울리면 늘 그렇듯
아이들이 우르르 나가고,
나는 가방을 정리하며 늦게 일어났다.

그런데 밖에서 ‘탁,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봄비.
창밖이 금세 흐릿해졌다.

나는 가방 안에서 우산을 꺼냈다.
평소엔 잘 안 들고 다니는데
이상하게 그날 아침엔 챙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 이유도 없이, 그냥.
지금 생각하면 그게 시작이었다.


교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수아가 비를 맞으며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웃기면서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야, 너 우산 없어?”
“없는데?”
“같이 써.”


그 애가 머뭇거리며 나를 봤다.


“됐어. 나 금방 갈 건데.”
“거짓말.”
“아니라니까.”
“그럼 뛰지 말고 그냥 같이 가.”


나는 우산을 펴서 그 애 쪽으로 당겼다.
우산 아래로 수아의 어깨가 들어왔다.
비 냄새와 샴푸 냄새가 섞여서
공기가 이상하게 달콤했다.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잡이를 쥔 손끝에
그 애의 손등이 스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괜히 빨리 뛰었다.
빗소리가 귀를 덮고,
그 속에서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너, 원래 이렇게 친절했냐?”


수아가 물었다.


“원래는 모르겠고.”
“오늘만 특별한 거야?”
“응. 오늘은 비 오잖아.”


그 말을 하고 나서
내가 한 말인데도,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산 아래의 거리가 너무 좁았다.
손끝이 스치고, 어깨가 닿고,
그때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애의 머리카락이 내 손등에 닿았다.

그 모든 게
‘좋아한다’는 단어보다 먼저 와버렸다.


집으로 가는 길,
우산을 닫고 나서도
그날의 냄새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괜히 물을 틀어 씻었는데
없어지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려다
연필을 잡은 손이 멈췄다.


“오늘은 비 오잖아.”


그 한마디가 자꾸 떠올랐다.
그날의 빗소리,
그 애의 어깨,
그리고 내 안에서 처음으로 자라나던 마음.


그날 이후,
비가 내리면 네가 떠올랐다.
우산 아래의 짧은 거리,
그게 내 첫사랑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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