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 Ⅱ : 한여름에 다시 시작

19화 〈봄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

by 담치씨

그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부드러워졌고,
캠퍼스 길가엔 이름 모를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다름 아닌 그의 메시지였다.


[도윤] :
우리 학교에서 한국이랑 공동 워크숍 한다네.
한 달 정도 참여하게 됐어.
서울에서.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아] :
진짜야?
언제 와?

[도윤] :
3월 초.
봄이랑 같이 간다고 생각해.


그 대답이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가 떠난 지,
벌써 일곱 달째였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눈앞의 온도는 늘 비어 있었다.
화면 속 웃음은 익숙했지만,
그리움은 여전히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제,
그 거리가 사라진다고 했다.
한 달 동안이라도
같은 하늘, 같은 시간 속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사실 하나로,
모든 게 달라 보였다.


3월의 어느 오후,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버스정류장 유리벽에 비친 내 얼굴이
묘하게 긴장돼 있었다.

그가 곧 도착한다고 했다.

바람이 살짝 불었고,
버스가 멈췄다.

그 안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내렸다.

도윤이었다.
후드 모자를 벗으며
햇살 속으로 얼굴을 들었다.


“왔어?”
“응.”
“진짜네.”
“사진보다 낫지?”
“응.
화면보다 훨씬, 살아 있네.”


둘 다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일곱 달의 시간이 녹아 있었다.


그날은 따로 계획이 없었다.
그냥 걷고,
그냥 이야기하고,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좋았다.

우리는 학교 근처 작은 공원을 걸었다.
잔디가 덜 자라 삐죽삐죽한 초록이 보였다.


“너 오는 동안,
계절이 세 번 바뀌었어.”
“나도 그거 생각했어.
우리, 벌써 세 계절이나 떨어져 있었더라.”
“그럼 이번 봄은,
우리한테 네 번째네.”
“그럼 네 번째 계절은 같이 보내자.”


도윤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계획으로 저장해도 돼?”
“당연하지.”


우리는 캠퍼스 뒷길의 오래된 벤치에 앉았다.
저녁 햇살이 길게 내려앉아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동안은 어떤 느낌이었어?”
“매일 네가 있는 시간대를 계산했어.
내가 잘 때쯤 너는 뭐 하고 있을까.
그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어.”
“나도 그랬어.
네가 자는 시간에는
괜히 메시지를 한 줄 더 남기게 되더라.”
“왜?”
“혹시 모르잖아.
눈뜨자마자 내 이름을 보게 될지도.”


그 말에 도윤이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랬구나.
그럼 이제는,
그 계산 안 해도 되겠네.”


봄은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도윤은 한국 대학 팀과 함께
캠퍼스 내 디자인 랩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자주 마주쳤다.

같은 교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의 노트북 화면 속 디자인 시안을 함께 보고,
밤에는 도서관 근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진짜,
우리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살고 있네.”
“이게 이렇게 낯설다니.”
“왜?”
“그동안은 다 상상으로만 이어졌잖아.
너의 표정, 목소리, 온도…
근데 지금은 그냥,
내 앞에 있잖아.”


“그럼 지금이 상상이랑 달라?”
“응.
상상보다 좋아.”


그날 밤,
학교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도윤이 내 어깨 위로
자신의 후드 집업을 덮어줬다.
“이거 입어.”
“괜찮아, 금방 탈 건데.”
“이건 나의 이기적인 결정이야.
네가 감기 걸리면,
내 하루가 더 불안해지거든.”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냥 고개를 숙여
집업의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향이 났다.


버스가 도착했을 때,
도윤은 내 앞에 멈춰 섰다.


“오늘,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것 같아.”
“그럼 내일 이어서 하면 되지.”
“내일도 괜찮아?”
“매일도 괜찮아.”

도윤이 웃었다.
“그 말, 진짜 위험하다.”
“왜?”
“내가 진짜 매일 찾아올지도 몰라.”
“그럼, 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 문이 열렸고,
나는 발을 올리려다
도윤이 부른 목소리에 멈췄다.


“수아야.”
“응.”
“이 봄은,
네가 만들어준 계절 같아.”


그 말이
버스의 문이 닫히기 직전,
따뜻한 바람처럼 스쳤다.


다음 날,
도윤이 보내온 사진에는
교내 워크숍 포스터가 찍혀 있었다.

‘봄, 서로의 세계를 잇는 디자인’

그 밑에 작은 메모.


[도윤] :
이번엔,
우리가 서로의 세계였으면 좋겠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심장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뛰었다.


며칠 후,
도윤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날
우리는 도서관 옆 언덕에 앉아 있었다.
노을이 천천히 기울고,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곧 돌아가야지?”
“응. 다음 주.”
“이번엔 좀 덜 아쉽네.”
“왜?”
“이번엔 ‘끝’이 아니라 ‘계속’이니까.”
“그래도,
조금은 아쉽네.”


그는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약속 하나만 하자.”
“뭔데?”
“다음에 올 땐,
그냥 ‘프로젝트 참여자’로 오는 게 아니라,
그냥 ‘너 보러 오는 사람’으로 오기.”
“그럼 그때는,
내가 네 공항에 마중 나갈게.”


우리 둘 다 웃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머리 위로 흩날렸다.
그 순간,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도윤이 말했다.


“이번 봄은,
내가 돌아올 이유였고,
너는 그 이유의 시작이었어.”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봄도 우리 이유로 남겠네.”


그는 대답 대신
내 손을 천천히 감쌌다.

그 따뜻한 온도 속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봄은, 우리를 다시 데려오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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