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우리가 해냈던 것처럼〉
그가 떠난 다음 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책상 위엔 도윤이 남긴 봉투,
그 안의 짧은 메모,
그리고 아직도 따뜻한 손끝의 기억.
‘우리의 여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니까.’
그 문장을 수십 번이나 읽었다.
그가 떠난 현실보다,
그 문장이 내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 생생했다.
창문을 열자,
햇살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름의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그의 첫 메시지가 도착했다.
[도윤] : 도착.
네가 말하던 하늘빛이랑 진짜 비슷하다.
여기 공기도 약간 네 생각나.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수아] : 여기도 아직 여름 같아.
너 없는 하늘이 이상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잠시 후,
그의 답이 왔다.
[도윤] : 나도 그래.
멀리 있는데,
자꾸 네가 있는 쪽 하늘을 찾게 돼.
그 말이,
왠지 고백보다 더 설레었다.
사랑은 말보다 이런 순간에 더 깊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흘러 9월이 되었다.
학교엔 다시 학생들이 돌아왔고,
교정엔 단풍이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도윤은 새 도시의 사진을 자주 보내왔다.
새로 산 머그컵,
그가 공부하는 책상,
창밖의 낯선 거리.
그 모든 사진이
‘나 여기 있어’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나도 종종 내 일상을 보냈다.
햇살 가득한 교실,
카페 오르다의 유리창,
그리고 가끔 찍은 내 그림.
그는 내 사진마다
짧게, 그러나 확실하게 답을 보냈다.
[도윤] :
너는 여전히 여름 같아.
그 말이 하루를 버티게 했다.
가끔은 시차 때문에
답장이 늦을 때가 있었다.
12시간의 공백은
가끔 하루처럼 느껴졌다.
어떤 날은
그가 잠든 시간에
혼자 메시지를 보냈다.
[수아] :
네가 없는 여름은 조금 조용해.
근데 아직 끝난 것 같진 않아.
너의 시간 속에서도 지금 여름이야?
그의 답장은 다음 날 새벽에 왔다.
[도윤] :
응.
여기선 아직 해가 길어.
그게 너 덕분인 것 같아.
이상하게 그 말을 읽는 순간,
심장이 따뜻해졌다.
멀리 있지만,
우린 여전히 같은 시간의 일부였다.
10월 초,
도윤이 처음으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화면 속 그는 여전히 낯익었다.
햇빛에 살짝 그을린 얼굴,
그 특유의 눈웃음.
“너 목소리 들으니까 여름 같아.”
“너는 좀 달라졌어.”
“어디가?”
“표정이 좀 어른 같아.”
“그건... 보고 싶어서 그런가 봐.”
말끝이 부드럽게 흘렀다.
그 말 하나에 공기가 달라졌다.
“그럼 내 목소리라도 자주 들려줘.”
“매일은 무리지만... 자주 할게.”
“매일이 아니어도 돼.
네 하루의 끝 어딘가에 내가 있으면 좋겠어.”
그 말이 너무 도윤 같아서,
나는 웃으면서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작은 방식’으로 연결됐다.
그는 아침마다 하늘 사진을 보냈다.
나는 밤마다 노을 사진을 보냈다.
그렇게 하늘이 하루에 두 번 겹쳤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이런 문자를 보냈다.
[도윤] :
오늘 음악 수업에서 너 생각났어.
교수가 말하길,
사랑은 두 음의 진동이 일정하게 맞물릴 때 생긴대.
우린 아마 그런 음일지도 몰라.
그 문장 하나에
나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떨리고,
눈가가 시렸다.
‘사랑은 진동이 맞는 두 음 사이에서 생긴다.’
그 말이 너무 도윤스러워서,
너무 우리가 같아서.
10월이 끝날 무렵,
그는 내게 작은 소포를 보냈다.
하얀 봉투 안에는
그가 직접 찍은 하늘 사진과 짧은 쪽지 한 장.
‘네가 보고 있을 때의 하늘은 이랬을까 궁금했어.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에 있었다면,
그건 기적이지.’
그 편지를 읽고,
나는 오랜만에 울었다.
그리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멀리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감사해서.
겨울이 다가올수록
우리의 대화는 조금 더 깊어졌다.
[수아] :
가끔은 무서울 때가 있어.
이 거리가 언젠가
우리 사이가 되는 게 아닐까 해서.
[도윤] :
그럴 때마다 이 말 기억해.
우린 이미 해냈잖아.
처음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하루가 됐잖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
그의 말이
마치 손을 잡아주는 듯 따뜻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날,
그가 보낸 짧은 영상이 도착했다.
그가 있는 도시엔 눈이 쌓여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이 눈이 녹을 때쯤,
다시 보자.”
그 목소리엔 약속 같은 단단함이 있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수아] :
그때까지 우리, 또 해내자.
우린 여름에도, 겨울에도 해냈잖아.
밤이 깊어지고,
창문 밖에 첫눈이 내렸다.
나는 창문을 열고
손바닥 위에 눈을 한 움큼 받았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눈이 녹을 때,
우린 다시 같은 하늘 아래 있겠지.”
눈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 어딘가에서
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