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멀어지는 거리, 가까워지는 마음〉
8월 24일.
도윤이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바람은 여전히 여름이었지만,
그 속에 아주 작게 가을이 섞여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투명하고, 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하늘이,
오늘따라 더 가까워 보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도윤] : 오늘 하루, 나랑 쓸래?
내일은 공항 일정 때문에 정신없을 것 같아.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수아] : 어디 가고 싶은데?
[도윤] : 그냥… 우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곳.
하루만 나 좀 따라와 줄래?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울렸다.
‘우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곳’ —
그게 곧 우리의 이별 준비 같아서.
도윤은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에는 늘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따라 여름이 덜 덥네.”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봐.”
“그런 말 하지 마. 마지막 아니잖아.”
“그래, 우리한텐 아직 여름이니까.”
도윤이 웃었다.
그 웃음 하나만으로
온 세상이 다시 여름 같았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카페 오르다였다.
처음 다시 만났던, 그 자리.
유리창 너머 햇살이 그대로였다.
“우리 여기서 다시 시작했잖아.”
“응. 네가 아이스초코 두 잔 시켰던 날.”
“근데 그때 너 되게 어색했어.”
“그때는 너랑 눈 마주치는 것도 힘들었거든.”
“지금은?”
“이젠 괜찮아.
이젠 눈 마주치는 게 좋아.”
도윤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 말, 기억해둘게.”
창가 자리에 앉자 바깥의 매미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커피를 다 마셔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멈췄으면 좋겠다고,
둘 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간 곳은 학교 교정이었다.
방학이라 사람은 없었다.
운동장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도윤이 천천히 말했다.
“여기 처음 걸을 때 기억나?”
“네가 전학생으로 들어왔던 날?”
“응.
너는 나한테 ‘조용한 애인 줄 알았는데’라 했었잖아.”
“근데 결국 제일 시끄러운 애였지.”
“그래서 너랑 친구가 됐잖아.”
“친구?”
“그게 시작이었잖아.”
그 말에 나는 웃었다.
‘시작’이라는 말이 이렇게 가슴이 아릴 줄이야.
교정 한가운데 멈춰 섰을 때,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사이로
그때의 우리 웃음소리가 섞여 지나갔다.
해질 무렵, 우리는 한강으로 향했다.
여름이면 늘 앉던 그 자리.
물 위로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이제 이 강을 건너면,
너는 멀리 가는 거네.”
“응.
그래도 이 물처럼,
다시 돌아올 거야.”
도윤은 말을 멈추고 가방을 열었다.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거.”
“뭐야?”
“선물.
비행기에서 열어봐.”
나는 봉투를 조심스레 받았다.
“이별 선물은 좀 슬프네.”
“이별 아니야.
그냥 잠시의 멈춤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수아야.”
“응.”
“나 가서도,
네 생각 진짜 많이 할 것 같아.”
“할 것 같아가 아니라, 해야지.”
“그래, 해야겠다.”
“그리고 나도,
네가 보고 싶어질 때마다
이 강을 보러 올게.”
“그럼 나도 같은 시간에 하늘 볼게.”
“시간 맞추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하늘은 같잖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이 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었다.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도윤의 차 창밖으로 불빛이 흘러갔다.
“이 노래 기억나?”
라디오에서 ‘여름 안에서’가 흘러나왔다.
“너랑 처음 드라이브할 때도 이 노래 나왔잖아.”
“그때는 그냥 배경이었는데,
이제는 기억이네.”
도윤이 중얼거렸다.
“시간이 참 이상해.
그땐 너무 빨랐는데,
오늘은 느리다.”
“그건… 떠나기 전날이니까.”
“그래도 오늘은 고마워.”
“뭐가?”
“나한테 오늘 하루를 줘서.”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도윤이 담요를 펴고
모래 위에 나란히 누웠다.
하늘엔 별이 떠 있었다.
“저기 봐. 저 별.”
“어디?”
“저기, 작게 반짝이는 거.
‘우리 별’로 할래?”
“그럼 사라지면 어쩌려고.”
“사라져도 괜찮아.
다시 생기겠지.”
그 말이 참,
그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고,
파도 소리가 가까워졌다.
“도윤아.”
“응.”
“우리, 다음 여름에도 여기서 보자.”
“약속.”
“진짜야.”
“응.
이번엔 꼭 돌아올게.”
그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았다.
뜨겁고, 단단하고,
그 온기가 오래 남았다.
다음 날, 공항.
사람들이 오가고, 방송이 울렸다.
유리창 너머로 도윤이 서 있었다.
“비행기 타면 문자할게.”
“응. 근데 기내 모드잖아.”
“내리면 보겠지.”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가 등 돌려 걸어갈 때,
햇살이 유리창을 가르며 반짝였다.
그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주머니 속의 봉투를 꺼냈다.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도망치지 않을게.
우리의 여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니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눈물은 슬프지 않았다.
공항을 나서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
그 두 계절의 경계선 위에서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멀어졌지만,
정말 멀어진 건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아름답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