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우리라는 이름으로
그날 이후,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도윤은 오전엔 짧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는 수업과 과제를 마치면 바로 그를 만났다.
저녁이면 늘 비슷한 자리에 앉았다.
카페 오르다, 창가 두 번째 자리.
“오늘은 뭐 먹을래?”
“너 먼저 고르지.”
“나? 음...”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메뉴를 고민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사랑스러웠다.
짧은 여름 연애는 생각보다 바빴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렀고,
서로를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은
시간보다 빨랐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었다.
그가 피곤해 보이면 괜히 걱정이 됐다.
그가 나를 부르면,
그 목소리 하나로 하루가 환해졌다.
“우리, 이제 진짜 연인 같지 않아?”
“이제야 그런 말 하네.”
“그럼, 이제 인정하는 거야?”
“응. 우리.”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이 잠시 멈춘 듯했다.
우리.
그 말 하나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한강으로 향했다.
바람이 불었고,
강물 위에는 노을빛이 길게 퍼졌다.
도윤이 자전거를 타다 멈춰 섰다.
“이거 봐. 완전 영화 같지 않아?”
“응. 근데 영화는 엔딩이 있잖아.”
“우리도 있지.”
“엔딩?”
“아니. 에필로그.”
그의 말에 웃었다.
도윤은 그런 식으로 늘 불안을 덮었다.
나는 그런 그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가끔, 믿는 게 두려웠다.
며칠 뒤,
작은 균열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그날도 평소처럼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도윤이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30분, 1시간.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다가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도윤아, 어디야?”
“아, 미안. 나 친구들 만나서 얘기 좀 하느라.”
“연락이라도 하지.”
“시간이 금방 갔네. 미안.”
그는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그게 더 서운했다.
“그래. 다음에 보자.”
“화났어?”
“아니.”
“거짓말.”
“진짜 아니야.”
“그럼, 내일 봐.”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름 한정’이라는 약속이
이렇게 가볍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아무 일 없던 듯 만났다.
하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도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일, 아직 마음에 남았지?”
“아니.”
“수아야.”
“진짜 괜찮다니까.”
“거짓말하지 마.”
“그냥... 나도 헷갈려.”
“뭐가?”
“우리가 뭐 하는 건지.”
그 말에 도윤이 잠시 멈췄다.
“우리... 여름이 끝나면 끝내자고 했잖아.
근데, 자꾸 그런 말이 무의미해져.”
“그게 나쁜 거야?”
“아니. 근데 무서워.”
그는 고개를 떨궜다.
“나도 그래.
처음엔 그냥 짧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짧은 게 싫어.”
그의 말은 바람처럼 조용히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럼 어떡할까?”
“모르겠어.
근데 난... 이제 이게 진짜였으면 좋겠어.”
그 말에 눈을 마주쳤다.
눈빛이 흔들렸다.
서로가 같은 감정에 닿아 있었지만,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며칠 뒤,
우리는 작은 싸움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도윤이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가면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SNS에 올라온 사진 속
그의 옆에 있던 여자 후배.
“그냥 동기야.”
“그냥?”
“응. 진짜 그냥.”
“그냥인데 왜 말 안 했어?”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나한텐 중요했어.”
순간, 공기가 싸늘해졌다.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짧은 연애는 어려운가 보다.”
“뭐?”
“아니, 그냥...”
그 한마디가 마음을 찢었다.
“그래. 짧으니까,
이런 것도 대충 넘어가면 되겠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침묵이 길어졌다.
카페 안의 시계 소리만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한강 바람이 차가웠다.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이었다.
“미안.”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말, 함부로 한 거 아니야.
그냥...
너한테 미안한 게 많아서,
괜히 방어하듯 나온 말이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었다.
도윤의 얼굴에는 후회가 묻어 있었다.
“난 진짜야.”
“뭐가?”
“너 좋아하는 거.”
“...”
“이게 여름 한정이면,
나는 평생 여름만 살고 싶어.”
그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바람이 불었다.
강물 위에 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의 팔에 이마를 기댔다.
“그럼...
이제 우리, 진짜로 연습 그만하자.”
“그럼?”
“이제 그냥... 진짜로 하자.”
도윤이 나를 꼭 안았다.
그 품이 따뜻했다.
여름의 냄새가 났다.
그날 밤,
그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이제부터는,
‘우리’라고 해도 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그 한 단어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웠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잔잔히 남았다.
그 후로,
우리는 더 많이 웃었다.
같이 영화도 보고,
밤늦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었다.
도윤은 내 이름을 자주 불렀다.
그때마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어딘가에서는
조용히 초침이 흘러가고 있었다.
8월 25일.
그의 비행기표에 적혀 있던 날짜.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많던 날,
도윤이 말했다.
“수아야.”
“응.”
“이제 우리, 진짜 같지 않아?”
“응. 진짜.”
“그럼 약속 하나 하자.”
“어떤 약속?”
“이 여름이 끝나도,
‘우리’라는 이름은 남기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응.
그럼, 여름이 끝나도... 우리는 그대로.”
그의 손이 내 손을 꼭 감쌌다.
손끝의 열기가 마음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세상에 단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