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 Ⅱ : 한여름에 다시 시작

15화. 조금 더 너에게

by 담치씨

다음 날, 날씨는 맑았다.
어제의 비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하늘은 너무 파랬다.
공기엔 여전히 비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어제 도윤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너한테 다시 오면, 그땐 도망가지 마.’


그 말은 밤새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꿈에서도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말이 무서우면서도… 듣기 좋았다.


휴대폰을 켰다.
메시지는 없었다.
어제의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가 나를 부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예감은 이상하게 자주 맞았다.


정오쯤,
도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도윤] : 오늘 오후, 시간 있어?
보고 싶은 게 생겼어.


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보고 싶은 게 생겼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사람일까, 풍경일까, 아니면…


[수아] : 뭐 보고 싶은데?


[도윤] : 너. 그리고 바다.


심장이 크게 두 번 뛰었다.
이건 분명 감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서
조금 무서웠다.


기차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두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차창 밖으로는 여름의 끝이 흐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들판, 희미하게 익어가는 논,
하늘 아래에서 반짝이는 강물.


도윤은 옆자리에서 창밖을 보다가 내게 말했다.


“이제 여름이 끝나간다.”
“응, 그렇게 보여.”
“이번 여름, 이상하게 빨랐어.”
“짧아서 그런가 봐.”
“짧다고 다 특별한 건 아니잖아.”
“근데 이번 여름은 특별했어.”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왜?”
“너랑 있어서.”


그 말은 바람처럼 가볍게 들렸지만,
심장은 그보다 훨씬 무겁게 반응했다.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봤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고,
모래 위엔 여름의 끝이 느껴지는 공기가 가득했다.


바람은 따뜻했지만,
햇살은 조금씩 누렇게 바뀌고 있었다.


“마지막 여름 바다네.”
“아직은 여름이야.”
“또 그 말이네.”
“그 말이 좋잖아.”

도윤이 웃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그는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와,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차가워?”
“아니, 적당히 따뜻해.”
“나도 해볼까.”


나는 망설이다가 신발을 벗었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햇살이 피부에 닿았다.


그 순간, 도윤이 내 손을 잡았다.
아무 예고도 없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이 따뜻해졌다.


“이러면 곤란하잖아.”
“또 그 말?”
“이건 좀 달라.”
“어떻게 달라?”
“이번엔... 진짜니까.”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 나를 보는 확신이 있었다.


“도윤아.”
“응.”
“우리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냥, 같이 걷는 거.”
“그건 알겠는데.”
“그럼 뭐?”
“이게... 뭐야.”
“글쎄.
내가 이름 붙이기엔 좀 아깝네.”


그 말에 웃음이 났다.
그는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여름이 끝날 때까지만,
너랑 있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여름이 끝나면?”
“그땐, 다시 생각하자.
근데 지금은... 그냥 이렇게.”


짧고 단단한 문장이었다.
그 말속에는 ‘사랑한다’라는 단어보다
더 많은 의미가 들어 있었다.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바다 앞 벤치에 앉았다.
파도가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
그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수아야.”
“응?”
“내가 너 좋아해.”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이게 갑작스럽게 들리겠지만...
그냥,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 아직 잘 모르겠어.”
“괜찮아.
나는 알아.
내가 지금 너를 좋아한다는 거.”


그 말은 파도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봤다.
햇살에 비친 눈동자가 투명했다.

그 안에 거짓이 없었다.


“그럼 나도 연습해 볼게.”
“뭘?”


“좋아하는 거.

이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도윤이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바람에 실린 듯 가볍고 맑았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여름 연습 시작이네.”


우리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도가 발목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그 물결이 마치 리듬 같았다.
도윤은 발끝으로 물을 튕겼고,
그 물방울이 내 다리에 닿았다.


“야!”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이는데.”
“그럼 다시 튕길까?”
“하지 마.”
“그럼 도망가.”


그의 장난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바다는 붉게 타올랐다.


“이 여름은... 진짜 예쁘다.”
“응. 그리고 짧다.”
“그래서 더 예쁘지.”

도윤이 나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따뜻해서,
말을 잃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짧은 시간이어도 괜찮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거니까.”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스쳤다.
그가 손으로 살짝 넘겨줬다.
손끝이 닿는 그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나는 웃었다.
“너, 이런 말 자주 하면 안 돼.”
“왜?”
“진짜로 믿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믿게 할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으로 내 손을 감쌌다.


햇살이 점점 사라지고,
노을이 파도 위로 길게 번졌다.
세상은 조용했지만,
우리 사이에는 작은 떨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차창에 비친 도윤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는 창밖을 보며 작게 말했다.


“오늘은 진짜 여름 같았다.”
“그럼 내일은?”
“내일은... 너를 더 좋아하는 날이겠지.”


그 말에 나는 웃었다.
창밖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내 마음엔 아직 노을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일기장에 한 문장을 적었다.


‘짧은 여름이지만,
그 안엔 모든 계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조금 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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