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 Ⅱ : 한여름에 다시 시작

14화. 여름의 끝에서, 우리는

by 담치씨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 오후 세 시쯤이었다.

예보에 없던 소나기였다.


처음엔 빗방울이 한두 개씩 떨어지더니

이내 거리를 흰 안개처럼 뒤덮었다.

사람들이 우산을 펴고 뛰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도윤과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었고,
그가 어딨 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익숙한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리창에 ‘카페 오르다’라는 이름이 보이자
심장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그곳은 우리가 처음 다시 마주했던 자리였다.


문을 밀자 종소리가 울렸다.
비 냄새와 함께 커피 향이 섞였다.


그는 거기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왔네.”
“그냥... 비 피하려고 들어왔어.”
“그럼 잘 됐네. 나도 피하고 있었거든.”

창가 자리엔 빗물이 맺힌 유리컵이 있었다.


그 앞에서 도윤은 웃고 있었다.
여전히 밝은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창밖의 빗줄기가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즘은 뭐 해?”
“그냥 학교. 과제 많아.”
“방학인데도?”
“디자인과는 방학이 없지.”
“그건 인정.”


그의 웃음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조용한 순간이 흘렀다.
그가 창문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작은 하트, 그리고 그 위에 선을 그어 지웠다.


“요즘 비가 자주 오네.”
“응. 여름이 끝나가나 봐.”
“그렇지만... 아직은 여름이잖아.”
“응, 아직은.”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아직은.
그 말 뒤에는 곧 ‘끝날 거야’가 붙어 있었다.



비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유리창 위로 빗물이 흘러내릴 때마다
내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도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
“우산 좀 사야겠어.”


그가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몇 분 뒤, 문이 다시 열렸다.
도윤이 투명한 비닐우산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옷은 조금 젖었고,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너 젖었잖아.”
“괜찮아. 금방 말라.”
“우산 두 개나 왜 사?”
“하나는 나, 하나는 너.”
“굳이?”
“비는 같이 맞는 거보다, 같이 피하는 게 낫잖아.”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는 내 앞에 우산을 하나 놓았다.
그 작은 행동이 왜 이렇게 심장을 뛰게 하는지 모르겠다.


카페를 나서자,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서로의 우산 끝이 살짝 겹쳤다.


“너 비 오는 날 좋아했잖아.”
“응. 근데 요즘은 좀 달라.”
“왜?”
“누군가랑 같이 있어야 좋더라.”


그의 말에 심장이 순간 멈췄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발끝에 닿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도윤이 갑자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인 것 같아서.”

“무슨 날?”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한 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산을 살짝 그의 쪽으로 기울였다.


비가 그를 덜 적시도록.

“그게 답이야?”
“응.”

그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사라졌다.



강가 근처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공기에는 흙냄새와 젖은 풀 냄새가 섞였다.


우리는 버스정류장 지붕 아래로 들어갔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도윤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그의 손끝이 살짝 닿았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심장이 크게 울렸다.


“이러면 곤란하잖아.”
“뭐가?”
“이런 거, 하지 마.”
“왜? 너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시선을 피했다.
도윤은 내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다시 오면, 그땐 도망가지 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비가 멈췄다.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졌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진짜였다.


“약속해 줄 거야?”
“모르겠어.”
“그럼 생각해 봐. 여름이 다 끝나기 전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우산을 들고 다시 걸어 나갔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밤이 되어 창가에 앉았을 때,
머릿속에 자꾸 그 말이 맴돌았다.


‘내가 너한테 다시 오면, 그땐 도망가지 마.’


그건 고백보다 더 솔직했고,
이별보다 더 두려운 말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하늘엔 구름이 걷히고, 희미한 별 하나가 보였다.


휴대폰 화면엔 도윤이 보냈던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오늘, 비 냄새 좋다. 너 생각나서.’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생각해 볼게.”


비는 멈췄고,
바람이 살짝 불었다.
밤공기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어디선가 가을 냄새가 조금 섞여 있었다.

여름의 끝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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