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너를 닮은 여름밤
도윤이 한국에 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는 세 번이나 만났다.
별다른 이유 없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한강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밤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들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날 밤,
네 번째 만남이었다.
“오늘은 밤공기가 괜찮다.”
도윤이 말했다.
손에 든 캔커피에서 희미한 김이 났다.
강바람이 살짝 불었다.
“그러게. 좀 덜 덥네.”
“여름이 이렇게 온순한 날도 있구나.”
“그건 아마, 네가 있어서일걸.”
그 말에 나는 웃었다.
“이제 너, 말 진짜 잘한다.”
“그게 다 너 때문이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발끝에 부딪히는 자갈 소리가 리듬을 만들었다.
멀리서 자전거가 지나가고,
불빛이 물 위에 흔들렸다.
강 위로 달빛이 떨어졌다.
물결이 반짝였다.
그 빛이 도윤의 눈에도 비쳤다.
“내가 한국 오면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게 이거였어.”
“한강?”
“응. 이 빛. 이 여름밤.”
“그래도 그게 나보단 덜 반갑겠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둘 다 반가워. 근데 순서가 있지.”
“당연히 한강이 먼저겠지.”
“아니, 너.”
그의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웃었지만, 가슴이 간질거렸다.
한참을 걷다가
도윤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잠깐, 여기 앉자.”
둔덕 위 벤치였다.
강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살짝 날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 순간, 도윤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런 거 하지 마.”
“뭐?”
“그거. 귀 넘기는 거. 그거 진짜 예전이랑 똑같다.”
“그래서?”
“그래서 심장에 안 좋아.”
그의 농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내 심장도 진짜로 안 좋았다.
너무 빨리 뛰어서.
도윤이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생각보다 많네.”
“여기선 잘 보여.”
“저기 저 별, 기억나?”
“어떤 별?”
“옛날에 네가 샤프 빌려주면서 했던 말.”
“내가 뭐랬는데?”
“‘별처럼 반짝이는 게 소원이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런 말 했어?”
“응.
그때 너는 별 보는 걸 좋아했잖아.
나는 네 얼굴 보는 걸 좋아했고.”
순간, 숨이 막혔다.
나는 웃었지만, 얼굴이 빨개졌다.
“너 그때도 이렇게 말했어?”
“아니. 그땐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지.”
“지금은?”
“지금은 용기 내보는 중.”
그의 말이 바람에 실려왔다.
그 목소리는 여름밤보다 부드러웠다.
잠시 후, 도윤이 조용히 물었다.
“수아야, 너는 나 떠난 뒤에 어떤 여름 보냈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로. 그냥 지나갔어.
그냥 공부하고, 일하고, 살았지.”
“그럼 행복했어?”
“행복… 음. 모르겠어. 그냥, 무난했어.”
“그게 제일 슬픈 말이다.”
“왜?”
“무난한 게, 가끔 제일 외로운 거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도윤을 봤다.
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 표정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너는?”
“나?”
“너는 어떤 여름 보냈어?”
“그냥... 바빴어.
공부도, 사람들도, 다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진짜 같지 않았어.
매일 바빴는데, 매일 심심했어.”
“그래서 돌아왔구나.”
“응.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그 말은 바람에 실려
물결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벤치 위에 올려둔 내 손 옆에,
그의 손이 닿았다.
우연처럼, 그러나 분명하게.
손끝이 닿는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매미 소리도, 바람 소리도
모두 멀어졌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내 손보다 약간 컸고,
조금 더 단단했다.
“이상하지?”
“뭐가?”
“이렇게 만지는 게,
처음인데, 익숙해.”
“나도 그래.”
우리는 웃었다.
웃는데,
그 웃음이 눈물처럼 따뜻했다.
강물 위로 불빛이 번졌다.
도윤이 손가락으로 물결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 불빛이 흔들리는 게 꼭 우리 같아.”
“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그럼 그다음엔?”
“붙잡히겠지.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이번엔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그 손을 꼭 잡았다.
심장이, 그 여름밤의 박자에 맞춰 뛰었다.
밤이 깊어졌다.
공기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바람은 조금 선선했다.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냥,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말이 통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이런 여름, 오랜만이다.”
“어떤 여름?”
“네가 있는 여름.”
그 말에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 여름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건데.”
“글쎄.”
“그때 또 떠나야 하잖아.”
“응. 근데 그게...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
“왜?”
“돌아올 이유가 생겼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가 나야?”
“응.”
짧은 대답이었는데,
그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손끝의 온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엔 도윤에게서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오늘은 별이 예쁘다. 너 닮아서.’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저 창밖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말로 별이 많았다.
유난히 밝고, 유난히 가까웠다.
눈을 감았다.
그의 손, 웃음, 목소리,
그리고 그 밤의 공기가
한꺼번에 마음속으로 밀려왔다.
이번 여름은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너를 닮은 여름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