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이스초코 한 잔
햇살이 너무 밝았다.
점심이 지나고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
카페 유리창 밖으로 빛이 길게 번지고 있었다.
여름의 공기는 달았고,
얼음이 녹은 커피 향이 공기 속에 묻어 있었다.
문을 밀자 종소리가 살짝 울렸다.
그 순간, 눈앞의 시간이 잠시 흐려졌다.
몇 걸음 앞, 창가 자리에 앉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도윤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접혀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했고,
또 어딘가 낯설었다.
더 말라 보였고, 어깨가 넓어졌고,
웃을 때 입꼬리 옆에 생긴 작은 주름이 어른스러웠다.
그런데, 웃는 방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왔네.”
그의 목소리가 여름처럼 따뜻하게 울렸다.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러게, 진짜 왔네.”
4년 만의 인사치고는 너무 짧고 가벼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 안에
그동안 못 한 수많은 문장들이 숨겨져 있었다.
도윤이 의자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네 자리 아직 비워놨거든.”
그가 손으로 창가 쪽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심장이 들킬까 봐,
눈을 피하려고 창밖을 봤다.
햇살이 유리창에 부서지고 있었다.
창가 옆 화분 위로 먼지가 반짝였다.
테이블 위엔
아이스초코 두 잔이 놓여 있었다.
“기억하지?” 도윤이 웃으며 말했다.
“시험 끝나면 마시자던 거.”
“아직도 그걸 기억해?”
“그때 못 마셨잖아.”
잔 속의 얼음이 서로 부딪히며 찰랑거렸다.
초콜릿 향이 달콤하게 퍼졌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걸 아직 생각하고 있었네.”
“그거밖에 생각 안 났는데?”
그의 농담에 가볍게 웃었지만,
가슴은 더 세게 뛰었다.
잔 속의 얼음이 녹아드는 속도보다
내 심장이 더 빨랐다.
“어떻게 지냈어?”
“그럭저럭. 과제 많고, 바쁘게. 너는?”
“나도 뭐… 여전히 디자인실에 묻혀 살지.”
“역시, 너는 그럴 줄 알았어.”
“그 말, 옛날에도 했었지.”
“그래. 그리고 지금도 틀리지 않았네.”
둘 다 잠시 웃었다.
대화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시간이 멈춘 것도, 이어진 것도 아닌
묘한 여름의 중간쯤에 우리가 있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오가고,
가게 안에는 냉방기 소리가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햇살이 유리컵에 닿아
반짝이는 선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다시 마주 앉을 날이 올 줄 몰랐다.’
한때는 이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흔들렸었다.
그 감정은 분명 사라졌다고 믿었는데,
지금 그 앞에서 다시 웃고 있는 나를 보니
그건 착각이었다.
“한국 오자마자 여기 왔어?”
“응. 공항에서 바로.”
“왜 하필 여기야?”
“그냥… 보고 싶었거든.”
“카페가?”
“아니.”
도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내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대답은 안 했지만,
그 말의 의미는 너무 쉽게 전해졌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국 오니까 이상하더라.
똑같은데, 달라졌어.”
“그건 네가 달라진 거 아닐까.”
“나? 뭐가 달라졌는데?”
“글쎄. 예전보다… 조금 더 멋있어졌어.”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우리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묘한 온기가 번졌다.
4년이라는 공백이
그 웃음 하나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했다.
좋은 의미로.
창밖의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흔들리고,
햇살이 그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도윤은 천천히 컵을 들었다.
“얼음 녹기 전에 마셔야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빨대를 살짝 물었다.
달콤한 초코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맛있다.”
“너도 여전하네.”
“뭐가?”
“좋아하는 것도, 말투도, 웃을 때도.”
“너는… 여전하지 않네.”
“나?”
“응. 좀 다르다. 예전보다 말이 부드러워졌어.”
“부드러워진 게 아니라… 조심스러워진 거야.”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도윤이 물었다.
“그날,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어떤 날?”
“마지막 날. 교실에서.
나 떠나기 전.”
그 질문 하나에,
머릿속이 순식간에 그날로 돌아갔다.
햇살이 길게 쏟아지던 오후,
칠판에 남아 있던 분필가루,
가방을 메던 손,
아무 말도 못 하고 웃기만 하던 나.
“그냥… 말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래도, 듣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때는… 나도 모르겠더라.”
“뭘?”
“좋아한다는 게 뭔지도.”
도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는 알아?”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조금은.”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은 예전보다 조금 더 조용했고,
조금 더 솔직했다.
“나도.”
“뭘?”
“이제야 알겠어.”
그의 손이 컵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렸다.
잔 속 얼음이 부딪히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마저도 심장 박동처럼 들렸다.
“그때 너 좋아했어.”
도윤이 말했다.
순간, 공기가 멈췄다.
햇살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 끝에서 숨만 흘렀다.
“지금 말하면 반칙이지.”
도윤이 웃었다.
“그럼 지금 다시 하면 되잖아.”
“다시?”
“응. 이번엔 제대로.”
그의 말은 가볍지 않았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4년 동안 생각만 하다 왔는데,
이 정도는 쉬운 거지.”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이 여름보다 더 따뜻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둘 다 컵을 비우고 나서야
대화가 조금 느려졌다.
밖은 여전히 눈이 부셨고,
햇살은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이번 여름, 한국에 얼마나 있어?”
“두 달. 8월 말까진.”
“그럼 두 달 동안 뭐 할 거야?”
“모르겠어. 일단 너 만나러 왔으니까.”
그의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었다.
“그래, 오랜만에 잘 왔다.”
“응. 그리고 아직 안 간다.”
도윤이 그렇게 말하며 잔을 비웠다.
잔 속 마지막 얼음이 천천히 돌았다.
카페를 나서자, 햇살이 한층 강해져 있었다.
하늘은 깨끗했고,
바람은 초콜릿 냄새가 났다.
도윤이 내 옆을 걸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걸음이 같은 속도로 맞춰졌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던 순간,
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여름이 끝나기 전에 또 보자.”
“언제?”
“그건 네가 정해.”
“만약 내가 안 정하면?”
“그럼 매일 기다려야지.”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햇살 속에서 도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필통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했다.
그때 빌려줬던, 도윤의 샤프.
손끝이 닿자, 심장이 또 뛰었다.
눈을 감으니 오늘의 햇살이 떠올랐다.
유리잔의 얼음 소리,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
여름은 그렇게,
진짜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