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하지 않으려던 날들 Ⅱ : 한여름에 다시 시작

11화. 멈춰 있던 계절이 다시 흐르는 순간

by 담치씨


여름방학 첫날이었다.

새벽까지 리포트를 붙잡다 잠든 탓에 눈을 뜨자 햇살이 벌써 방 안 절반을 덮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기도 전에 공기가 끈적했고, 창밖에선 매미가 울었다.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눈이 시릴 만큼 밝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은 무겁지 않았다.
그냥, 괜히 들떴다. 이유도 없이.

습관처럼 인스타를 열어 피드를 넘기던 순간,
손끝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췄다.


‘도윤 — 4년 만의 한국 ✈️�’

그 이름.


그 한 줄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공항 유리벽 너머에서 도윤이 웃고 있었다.
흰 티셔츠, 반쯤 들고 있는 커피잔, 약간 길어진 머리.
예전보다 조금 말랐고, 표정은 어른스러워졌다.
하지만 웃는 눈 모양은 여전히 그때 그대로였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공항의 냄새, 여름의 공기, 5월 25일의 기억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날 이후 여름이 오면 마음이 항상 서늘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모든 게 그 애를 닮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여름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았다.


손가락이 스스로 움직였다.
“진짜 한국이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엎어두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게 무서워서,
그러면서도 기다리는 게 좋았다.

심장은 계속 빨리 뛰었다.


그 애가 지금 어떤 얼굴로 이 메시지를 보고 있을까 상상했다.

아마 공항의 카페 어딘가,
커피를 반쯤 마신 채로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얼음이 녹아드는 컵을 손으로 굴리면서,
바깥의 햇살을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도윤은 공항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공기는
기억보다 훨씬 따뜻했다.
습하고, 낯익고, 어쩐지 그리운 냄새였다.


“4년 만의 한국.”
그는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유리컵 안의 얼음이 부딪히며 ‘또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도윤은 휴대폰을 들었다.
사진을 찍고,
짧은 문장을 적었다.


‘4년 만의 한국 ✈️�’

그리고 게시 버튼을 눌렀다.


단지 여행의 시작을 기록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사진을 누군가 볼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사실은 보고 싶었다.
딱 한 사람 —
수아가.


그 애가 그 사진을 본다면,
그날처럼 다시 한번 심장이 뛰어줄까.
아니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까.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이번 귀국의 목적이었다.


‘그 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나처럼, 아직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4년 동안 수없이 바뀌는 계절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완전히 잊히지 않았던 얼굴.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는 여름을 택했다.


여름방학, 단 두 달의 귀국.
그 시간 안에서
자신이 놓쳐버린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감히 연락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났던 그날처럼,

그녀의 마음이 자신과 같았던 건지 몰랐으니까.

섣불리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그때의 기억을 훼손할까 봐 겁이 났다.


그저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한 번이라도 ‘봤다’는 신호를 보내주길.


그리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진짜 한국이야?’

그 한 문장을 보는 순간,
도윤은 웃었다.


몸속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굳어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녹는 느낌이었다.


‘응. 두 달만. 7월이랑 8월.’

답장을 보내고도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얼음이 다 녹아내린 커피잔 안에서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이상하게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이 여름의 시작 같았다.


도윤은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망설임도, 계산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때 말했던 카페, 아직 있어?’

보내고 나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공항의 소음이 희미해지고,

햇살이 점점 더 밝게 번졌다.
모든 게 순간 멈춘 듯했지만,
자신의 세상만 다시 흐르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 애의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화면을 보면서,
하루치의 시간이 모두 그 메시지 한 줄 속으로 들어가 버린 느낌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짧은 진동이 손끝을 스쳤다.

‘응. 나 아직 가끔 거기 가.’

단 한 문장.
그 문장이,
여름 전체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도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천천히 웃었다.

창밖의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고,
유리벽에 비친 얼굴 위로 햇살이 번졌다.


그 빛이 손끝을 따라 가슴까지 닿았다.

이번 여름은,
그냥 덥기만 한 계절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막, 멈춰 있던 계절이
진짜로 다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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