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에 홀려 이직을 하려다가 잠시 멈추게 되었다.
같은 회사를 약 10년을 다녔다.
꽤나 이름있는 공기업이라 이름을 대기에도 밀리지 않고, 급여도 나쁘지 않고, 업무 강도가 세지도 않고, 칼퇴가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잘릴 걱정이 없이 안정적이다.
같은 회사에서 10년 동안 있으면서 3가지 직책을 경험해 보았다. 예산 쪽 일을 너무 한 명이 오래 맡으면 안 된다는 지침에 따라 일정 기간 후 타의반으로 한 번, 동료가 이직해서 나가는데 외부에서 사람을 뽑는것 보다 일을 잘 하는 내부 사람(으쓱)이 맡으면 좋겠는데 혹시 내부적으로 인사이동을 원하냐고 묻기에 자의반으로 한 번. 이렇게 두 번을 옮기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가지 직책을 경험해 보게 되었다.
이렇게 3가지 일을 경험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의 자존감 지킴이였다. 왜냐고 한다면면, 일단 우리 회사는 급여 인상은 있지만, 승진 제도는 없다. 그냥 5년 이상 일하면 '선임' 이라는 한 단어가 더 붙을 뿐이다. 팀원이 나 밖에 없는 팀일 지언정 팀장이 되고, 나 밖에 없는 과일 지언정 과장이 될 수 있는 명칭적 승진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기를 저하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 회사는 복지가 괜찮고 상사들도 젠틀하며 우리의 능력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기에 이 회사를 떠나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나를 조급하게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래서 떠난 동료도 있고, 떠나지 못한 동료들도 있지만, 떠난 동료의 대부분은 현재보다 연봉을 낮춰서 나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한 직책을 10년 일했던 것이 아니라, 3가지를 경험해 본 것이 나에게는 이직과 비슷한 효과라고 스스로 생각했으며, 또한 내가 직책을 바꿀 때마다 동료며 상사 모두 '당신이 잘 할 것 같으니 새 직원을 뽑기 전에 우선권을 주겠다'고 한 것이 나에게는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자존감 지킴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를 나가야 할 것만 같은 조급함이 몰려왔다. 새로운 직책에 3년차로 일하고 있으니 지금 나가야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도 하고, 친한 친구가 연봉을 계속 올려가며 척척 이직을 잘도 하는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한두달 정도 구직 광고란을 미친듯이 훑었다. 그러다가 한 번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잠깐 정신이 나갔는지, 집 근처라고 넣고, 쉬워 보인다고 넣었다. 어차피 붙었어도 안 갔을 회사들에 준비도 없이 마구잡이로 넣어놓고는 또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오지 않으니 자신감이 땅으로 꺼졌다.
그러던 중에 운명인지 뭔지 이번 회사에서 또 다른 직책으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이 작은 회사에, 팀원은 없지만 팀은 참 많다... ㅋㅋ 이번에도 동료가 이직을 하는데, 누구보다도 내가 잘 할 것 같기에 우선권을 준다고 했다. 약간.. 당하는건가 싶기도 했지만, 현재 직책에서 번아웃이 오고 있던 터라 어쨌든 새로운 기회가 오기는 하는구나 싶었다.
사실은 마침 그런 생각이 들던 터였다. '나의 발전을 위해서 옮겨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왜 발전을 회사에서 하려고 하지? 하는 생각. 일은 나에게 중요하고, 나는 일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살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원래부터 나에게는 이 일로써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은 없었다. 나의 성향은 매일 주어진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사랑했다. 누군가는 반복되는 일을 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늘 똑같은 답을 내면 되는 반복적인 일이 너무나 좋았다. 같은 일을 계속하다보면 실수가 줄어든다. 실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을 누리면서 내가 하는 일에 비해 많은 돈을 받고 칼퇴도 가능한데,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굴었을까? 생각해보면 자기 계발은 칼퇴하고 집에 가서 해도 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회사내 다른 직책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렇다고 이직의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직을 원했던 이유가 발전만은 아니고, 나에게도 일 해보고 싶은 다른 회사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붙잡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커리어로 반드시 발전해야 해! 이 회사를 나가야 해! 하는 조급함은 갖지 않는다.
일은 나에게 삶의 질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매개체일 뿐이다. 주변의 누가 이직을 잘 한다고 해도, 그는 그의 삶을 사는 거고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비교하지 말고, 남의 말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말고, 나는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렇게 내 페이스에 맞게. 현재를 즐기며.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