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 인종차별의 콤보
참 오랫동안 글을 작성하지 않았다. 업무가 바빠지기도 했고 뭔가 삶이 단조우면서도 바빠지며 글을 쓰기 위해 짬을 내기가 어려워졌다. 오며 가며 간간히 수기로 일기처럼 쓰는 글들은 있었으나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게 참 오랜만이라, 무슨 글을 써야할까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여느날과 다를 바 없이 출근을 해서 열두시 반에 쪼르르 내려가 점심식사를 하는데, 여름 휴가 시즌이 거의 다 끝나가서인지 절반은 비어있었던 사무실 인력들이 꽤나 많이 출근을 하기 시작한듯 보였다. 인사를 건네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식사를 위해 점심 도시락을 꺼내려는 순간, 일명 회사의 '고인물' 대표인 S여사와 W직원이 태클을 건다. 그것도 역시, 네덜란드어로!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회사의 창립년도인 20여년전부터 함께한 고이고 고여 썩어버린 직원들인데, 아마 별 탈이 없으면 이곳에서 정년퇴직까지 하지 않을까 싶다. 둘은 내가 입사한 순간부터 내가 네덜란드에 살면서, 네덜란드인 파트너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네덜란드어를 하지 않는다는것에 불만을 품고 은은한 인종차별을 해온 경력이 있기에 내 레이더에 늘 걸리는 인물들이었다.
개인적인 스몰토크는 그렇다 쳐도 업무에 관련된 대화에서도 굳이 굳이 네덜란드어로 내게 말을 거는게 의아했다. 네덜란드 살이 6년차, 네덜란드어를 아주 못하는건 아니지만 현지인들이 빠른 속도로 속사포로 내뱉는 말, 게다가 사투리까지 조금 섞이면 못알아듣는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도 초반에는 예의를 갖추느라 에둘러 말하며 나는 네덜란드어를 잘 못하고, 영어가 더 편하다고 반응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휙 돌려 가버리는 등의 아주, 아주 어른스러운 반응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몇번의 사건 후, 이번년도 초 어느날엔 나도 폭발하여 S여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내게 할말이 있으면 영어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이해하지 못할거고 이제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거라고 했다. 특히 업무시엔 의사소통을 확실히 해 실수를 피해야 하는게 원칙이니,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너는 아직도 네덜란드어를 안하니?" 식의 반응이었지만 그마저도 못알아들은척 하고선 이번엔 내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휙 돌려 자리를 떴다. 그리곤 곧장 인사팀 사무실에 찾아가 언제까지 이러한 대우를 못본척 할거냐고 토로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사무실엔 3명의 다국적자들이 모여있는데, 모두 아시안들이었고,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것이 상당히 열이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네덜란드에서 살기를 결정했으니 네덜란드어를 어느정도 해야한다는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식당이나 상점에서, 그리고 파트너의 가족들과는 서툴지만 네덜란드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내가 부당하다고 느꼈던 점은 첫째, 입사 당시 네덜란드어 실력을 전~혀 요구하지 않은 바. 둘째, 무역업의 특성상 모든 업무가 영어로 이루어지는 바. 셋째, 팀원들이 3개 이상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것을 고려하면 생각하면 업무시엔 영어를 쓰는것이 가장 혼란을 방지하기가 수월한 바. 그리고 마지막, 업무시에는 프로페셔널함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끽해야 5살 수준의 네덜란드어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S여사와 W직원은 말 그대로 내 나이 뻘의 아들, 딸이 있는 연차였기에 인사팀에서도 아무리 경고를 주어도 '네덜란드에 정착하는것에 도움을 주려는것 뿐이었다'라는 반응이었다는것을 나중에 인사팀의 직원에게 전해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적이 있던가? 요청한 바가 없는 도움을 받는것은 꽤 꺼림칙하다. 본인들 기분 좋으려고 하는 일이지, 과연 정말 날 위한 일이었을까?
인사과의 방문은 생각보다 일이 커져 CEO와 MT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결국에 인사팀에서 S여사와 W직원을 각각 따로 불러내어 교육 및 경고를 주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해고되거나 하진 않았고 (나도 그걸 딱히 바란건 아니다) 경고만으로 그친 탓에 고인물에 정치질에 도가 튼 이 둘은 이 해프닝마저 자기들의 농담 따먹기 주제로 바꿔버렸다. 웃어넘길수 있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며 낄낄거리던 거리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래, 결국 이민자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상은 언제나 나 vs 다수의 삶이라는것을 잘 인지하고 있기에 좋은게 좋은거다, 싶어서 그 둘을 그냥 무시한채로 몇개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던 어느 오전, S여사와 딱 단둘이 맞닥드리게 되었다. 괜히 기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아 조선의 기량으로 씽긋 웃으며 영어로 아침인사를 건넸다. 나를 쳐다보더니 영어로 답하는 S여사, 나도 적잖이 놀랐다. 좋은 하루 보내, 하고 떠나려던 내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른다.
S: 내가 너에게 늘 네덜란드어로 말을 거는건 그래야 네가 네덜란드어를 연습할수 있기 때문이지, 전혀 인종차별과 관련이 없어. 나는 한국사람들을 좋아해 (?)
H(본인): 도움을 주고싶은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내게 직장은 내가 일을 하고 그 보수를 받는 곳이지 언어를 연습하러 오는곳이 아니야. 이해해줘서 고마워.
S: 너도 내가 사실은 폴란드 출신인것, 알고 있지?
H: 응, 그리고 이곳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지?
S: 맞아, 그런데 나때는 말이야... (Right, but back in my days...)
내가 네덜란드에서 라떼는 말이야, 를 듣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국 미디어에서 '꼰대'라는 말이 등장하고 '라떼는 말이야'를 희화화 하던 영상을 보고 낄낄거린적은 있었는데, 네덜란드에도 꼰대는 존재했던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폴란드이려나)
S: 나때는 말이야,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하면 일자리를 구할수도 없었어. (Back in my days, I couldn't find a job at all if I didn't speak Dutch.)
그리고 지금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유용하게 배울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And we didn't have many resources like these days.)
그래서 너와 C같은 동료들을 보면 나때에 비해서 훨씬 쉽게 배울수 있는 환경에서도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안타까워. (I feel bad for you and C, who are not learning Dutch even if it is so much easier to learn for you these days.)
내 생각으로는 S여사도 그녀 나름대로 내게 마음을 터놓으려고 한 말인것 같긴 한데, 안타깝다니? 조금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냥 아무말 없이 그녀를 쳐다봤던것 같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살포시 쥐곤 지나간다. 응?? 뭐지?? 마치 내맘, 알지? 라는 의미였으려나?
그 뒤로 S여사를 포함하여 W직원도 나나 다른 국적의 네덜란드어가 서툰 직원들에게 굳이 네덜란드어를 고집하며 말을 거는 일은 없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탕비실이나 휴게실에서 단둘이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나도 모르게 긴장이 곤두서 쌈닭모드가 될 태세를 갖추는것은 어쩔 수가 없다.
'꼰대' 를 검색해보면 그 정의가 노인, 기성세대, 선생을 뜻하는 은어이자 멸칭. 점차 원래의 의미에서 의미가 확장, 변형되어 연령대와는 상관없이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비하하는 멸칭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영어로는 'boomer'라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위에서 적었듯이 만약 그녀와 그가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네덜란드연습을 고무하기 위했다면, 내 상식으로는 먼저 물어봤을것 같다. 무턱대고 빠른 속도로 네덜란드어를 쏟아내고 알아듣지못하면 비웃는다던가,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뭐라뭐라 하는것은 사람을 면전에 대고 무시하는게 분명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음은 확실했다.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어도 내 스스로를 위해 맞섰다는것에 위안을 받는다.
이 글을 초안으로 작성하고 저장한것이 2024년 1월이고, 발행하는 오늘은 2025년 12월이다. 2021년 9월 인턴십을 시작하여 참 오래도 한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브런치에 연재해온 글들을 보니, 어쩌다보니 네덜란드에서 ~하기 라는 시리즈처럼 형성이 되어있다는걸 깨달았다. 글을 읽고 계신 불특정 다수의 독자분들에게도 네덜란드라는 멀고도 낯선 나라에 대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것에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