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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소리 Mar 04. 2024

잊고 지낸 친정 엄마

지금. 되돌릴 수 없는 순간 #3

“안녕하세요. 여기 관리사무소인데요. 지금 어머님이 베란다에 갇혀 계시대요. 화재 신고를 받아서 소방관들이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데 도어락(Door Lock) 비밀번호 좀 알려주세요."



오전 10시 53분.

아이의 직사각형 책상은 종이접기 책과 색종이, 50장이 넘는 서류 뭉치로 어지럽다. 집게핀으로 머리를 바짝 올려서 묶은 나의 표정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아이 책상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앉아서 양 쪽 귀에 콩나물 모양의 이어폰을 낀 채 휴대전화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줌(Zoom)에서 하는 온라인 교육을 신청해서 듣는 중이다. 10분 동안 쉬는 시간을 갖는다는 관리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옆에 앉아 있던 아이를 쳐다봤다. '슈팅 파이터 제트기' 종이 접기에 몰두하고 있던 아이가 유별나게 기특하다. 내가 아이의 작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엄마 이제 쉬는 시간이야."

"우와. 드디어 쉬는 시간이네! 언제 다시 시작한대?"

"11시 3분."

"그럼 얼른 호이야 놀이하자."


호이야 놀이는 아이와 내가 지은 공 뺏기 놀이 이름이다. 10분 동안 공을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대결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결과는 무승부였고 아이는 좀 더 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수업이 다시 시작되어 책상에 앉았고 강사님 말씀을 필기하느라 바빠졌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힘이 필요해요."

'위잉 위잉. 위잉 위잉.'


'뭐지? 강사님 목소리가 안 들리네.'

 휴대전화를 쳐다보니 저장되지 않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이다.


'또 여론조사 전화겠지. 도대체 지역별로 여론조사를 왜 하는 거야? 차단을 해도 다른 번호로 전화하고 정말 싫다. 어떻게 듣게 된 교육인데 절대 방해받고 싶지 않아. 진짜로.'


강사님 이야기를 못 듣게 방해하는 전화를 당장 거절하고 싶었다. 휴대전화 화면은 빨간색 거절 버튼과 초록색 통화 버튼이 오묘하게 겹쳐져 있다. 왼쪽 검지를 쭉 펴서 매우 조심스럽게 빨간색 거절 버튼을 꾹 누른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분명히 빨간색 버튼을 눌렀는데 초록색 버튼이 검지를 따라 움직인다.

수신 시간 '00:00' 숫자가 '00:01'로 바뀌기 시작한다.


'윽. 중요한 내용을 말해줄 타이밍인데 망했다. 어? 근데 이상하다. 왜 기계음이 안 들리지?'


“안녕하세요. 여기 관리사무소인데요. 지금 어머님이 베란다에 갇혀 계시대요. 화재 신고를 받아서 소방관들이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데 도어락 비밀번호 좀 알려주세요."

무척이나 황당한 이야기를 들어서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불이 났는데 어머님이 베란다에 갇혀계시다고요.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주셔야 해요."


'이게 무슨 일이지? 보이스피싱인가? 엄마가 혼자 집에 있을 텐데 비밀번호 알려줬다가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하지? 진짜 불이 났으려나? 우리 엄마가 얼마나 꼼꼼한데 그럴 리가 없지.'


"제가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보이스 피싱이 워낙 유행이다 보니 섣불리 엄마 집으로 들어가는 비밀번호를 노출할 수 없었다.

곧장 엄마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딸이라고 외치는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이상한 소리만 들려온다. 통화 연결이 되지 않자 1초 만에 엄마 집으로 가서 진짜 불이 났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자 휴대전화에서 강사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핵심 전략은 바로 이거죠."

이제 더 이상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엄지 손가락으로 핸드폰 오른쪽에 튀어나온 종료 버튼을 눌렀더니 고요하다. 아이를 집에 혼자 놔둘 수 없어서 함께 전력 질주하기로 약속했다. 아이에게 할머니 집에 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때마침 아빠한테 걸려온 전화를 발견했다.

"엄마가 베란다에 갇혔단다. 불이 났단다."

"응. 아빠. 관리사무소에서 전화받았어. 보이스 피싱일 수도 있어서 지금 엄마 집으로 가보려고. 이따 전화할게요."

"내가 그 말하려고 했다. 그래."

아이가 외투까지 걸치고 나자 나에게 화가 났냐고 묻는다. 평소와 다르게 굳어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아니야. 보이스피싱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할머니집에 가는 거야.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면 축구선수처럼 달려야 해. 할 수 있지?"

"응. 엄마. 걱정하지 마."

1층에 도착하여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갑자기 불안과 걱정이 나를 엄습한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나는 강한 엄마라고 되뇌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엄마 집으로 뛰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 이 순간은 멀게만 느껴진다.

“엄마. 너무 빨라. 다리 아파.”

"응응. 조금만 참자. 얼른 할머니집 가야 해서 그래."

“엄마. 넘어질 거 같아.”

조급한 마음에 아이의 속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힘껏 내달렸나 보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조금만 더 달려보자. 거의 다 왔어."

두 걸음정도 아이를 앞서서 달렸고 아이는 나에게 끌려가는 상태이다. 결국 나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도 아프다고 느꼈다.

'별일 아닐 거야. 엄마 잘 있을 거야. TV를 크게 틀어놓고 보고 계시는 거겠지?'

뛰어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아직도 받지 않는다. 길 모퉁이를 돌자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했다. 빨간색 구급차가 서너 대 와 있고 열명도 넘는 소방관들이 서 있는 것이다.

'아. 진짜 불이 났나? 어떡하지? 아까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줄걸. 엄마.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내 얼굴이 사색이 된 게 티가 났는지 공동현관 앞에 있던 소방관께서 얼른 올라가서 비밀번호를 알려주라고 일러주셨다.

'별일 없을 거야. 제발. 제발. 제발.'


엄마 집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 비좁은 통로에 소방관과 경찰관이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가 놀란 듯하여 안심시켜 주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딸이에요."

"도어락 비밀번호 알고 계시면 문 좀 열어주세요. 어머님이 베란다에 갇혀 계시다는데 들어갈 수가 없네요."

도어락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데 덜덜 떨렸다. 그리고 머리에 검은 물감을 부은 것처럼 숫자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정신 차려. 빨리 문 열어야지. 기억해 내자.'

다행히 숫자가 기억났고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디디딩~'

그런데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뿔싸. 어떤 남자가 실수로 엄마 집 현관문을 몇 차례 열려고 했던 적이 있어서 열쇠를 하나 더 달았다. 그 열쇠가 잠겨져 있어서 소방관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열쇠 수리공 불러서 열고 들어가야 할 것 같네요."

"네네."

현관문 쪽 열쇠꽂이에 붙여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다행히 소방관이 알고 있는 열쇠 수리공이 있다고 불러주셨다.

"15분 뒤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베란다에 갇히신 거 같고요. 가스랑 전기 다 차단해 놔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어머님 지병이 있거나 드시고 계신 약이 있나요?“

"아니요."

"추울 수도 있어서 담요를 내려다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앞서 지나치면 안 될 전화가 생각나서 받았다.

"딸!! 엄마 집 베란다에 갇혔다.!!!"

"응응. 엄마. 나 지금 엄마 집 앞이야. 걱정 마. 소방관님께서 열쇠 수리공 불러주셔서 이제 곧 오신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고. 알겠다."


열쇠 수리공이 오셔서 현관문 열쇠를 따주었고 도어락 번호를 누르자 문을 열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신발을 벗고 들어가 엄마 집 안쪽에 있는 베란다를 갔다. 엄마가 담요를 덮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뻔했다.

"엄마. 나 왔어."

베란다 안쪽에서는 문을 열 수 없고 베란다 바깥쪽 거실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안방 창문도 잠겨있고 아파트 외벽 쪽은 시스템창이어서 소방관도 진입이 불가한 상태였다. 다행히 미리 가스를 끊어서 끓고 있던 냄비도 타지 않고 뜨거운 채로 있었다.

"아이고~~ 너무 감사합니다. 뭐 좀 드시고 가세요."

"괜찮습니다. 추우신데 고생하셨어요. 편찮으신 데는 없으세요?"

엄마는 실제로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함께 자리를 지켜준 소방관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소방관들이 다 철수하고 나서 엄마, 나, 아이 우리 셋은 긴장이 풀려 각자 편한 상태로 쉬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려서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악!!.“

“아. 아빠잖아."

일을 하고 있던 아빠는 점심시간이 되어서 짬을 내어 집에 와본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엄마가 코로나에 걸렸었고 설날이 오기 전에 대청소를 했다. 그릇도 삶고 스위치와 문고리도 닦았다. 가스레인지에 끓는 물을 올려놓은 상태에서 어떤 물건을 소독하려고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그런데 베란다 문고리를 닦으면서 잠금장치가 반쯤 열려있었고 문이 닫히면서 잠금장치가 잠금으로 고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급 상황이어서 아파트 베란다 문을 열고 119에 연락해 달라는 엄마의 외침을 들은 행인이 화재신고로 접수해 주셨다. 그리고 소방관의 핸드폰을 윗집 베란다를 통해서 엄마에게 내려주셨고 나와 통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자 아이가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아. 너무 놀랬네. 할머니는 나한테 항상 조심하라고 하면서 할머니가 안 조심하면 어떡해요~”

엄마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야 활짝 웃는다. 사랑하는 엄마의 환한 웃음을 더 이상 못 볼 뻔했다고 상상하니 끔찍하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사랑을 준 엄마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엄마의 차가운 손을 살포시 잡으며 엄마와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친정엄마. 이름만 들어도 울컥하지 않나요? 엄마의 사랑은 말로 설명할 수 없죠. 결혼을 하고 육아관이 달라서 다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영원히 나의 편인 존재. 아이를 돌보느라 그동안 소중한 나의 엄마를 잊고 지냈지만 다가오는 봄에는 엄마와도 많은 추억을 만들어야겠어요.

 우리 아이의 성장 과정만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사랑해 준 엄마의 시간도 빠르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과거보다 미래를 살아가는 부모님들을 응원하며. 백세 시대 파이팅!


p.s 소방관님들께는 소방재난본부의 ‘칭찬합시다 ‘게시판을 통해서 감사의 글을 남겼습니다. 늘 수고가 많으시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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