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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Sep 13. 2019

데이빗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아메리칸 슬립오버>로 데뷔했다. <팔로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팔로우>가 데뷔작인 줄 알았다고 한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데뷔작이 주목받지 못한 건 사실이다. 얼마 전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칸 영화제에 공개되면서 그는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그의 데뷔작을 보지는 못했지만 <팔로우>와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완전하게 다른 영화다. 단, 데이빗은 10대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팔로우>는 기억될만한 공포영화 명단에 기록될 것이다. 공포 영화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쪽은 아니지만 <팔로우>를 보고 새로운 공포 영화가 등장했다는 걸 느꼈다. 이건 데이빗 린치를 따라가려는 것인가. <언더 더 실버레이크> 또한 데이빗 린치의 흔적이 가득하다. <팔로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저주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기 바쁘다. 사실 그 저주가 무엇인지에 대해 풀지 못하면 이 영화는 의문 덩어리인 채 끝나는 영화다. 몇몇 사람들은 성병에 대한 은유라고는 하지만 그 근거들은 그 의견을 충족시키에는 부족하다. 이건 섹스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물론 성병에 대한 경고도 아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애니라는 여자로 시작된다. 첫 쇼트는 360도 패닝. 두 번째 쇼트는 차 안에서의 쇼트. 세 번째 쇼트는 전화하고 있는 애니. 네 번째는 전화하고 있는 애니를 가까이서 찍는다. 다섯 번째는 시점 쇼트. 여섯 번째는 시간이 지난 뒤 죽어 있는 애니를 보여준다. 정확하게 구분하면 다섯 번째 쇼트까지가 첫 장면이고, 이후는 두 번째 장면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애니는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이고, 무언가로부터 도망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섯 번째 쇼트인 시점 쇼트에서 그 무언가가 보여야 정상인데 우리는 그걸 보지 못한다. 전개가 되면서 알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엇. 여기서는 그걸 그것이라고 부르겠다. 이 장면에서 인상적인 건 다섯 번째 쇼트와 여섯 번째 쇼트 사이의 공백이다. 보통의 공포 영화라면 그 쇼트들의 사이를 채우지 않았을까. 공포감을 조성했으면 그걸 양껏 활용해야 하는데 데이빗은 그렇게 찍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것이 하는 살해 행위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그것이 쫓아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영화 제목은 팔로우.      


  영화는 제이의 시점을 따라간다. 우리가 그것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은 제이가 그것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제이에겐 알코올 중독의 엄마가 있고, 여동생이 있다. 하지만 아빠의 자리는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이게 중요하다. 아빠의 자리가 부재라는 점. 제이는 휴와 사귀고 있고, 폴은 제이를 좋아하지만 그걸 감추고 있다. 극장 데이트 장면에서 중요한 건 제이와 휴의 바꾸기 게임이다. 휴는 어린 꼬마 아이와 바꾸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싸고 싶을 때 쌀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이건 이 영화의 중요한 대사 중 하나다. 이후 극장 안에서 휴는 그것을 보게 되지만 제이는 보지 못한다. 이걸 보지 못하는 건 간단한 이유다. 아직 제이는 휴와 섹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패닝이다. 360도 패닝이 영화의 첫 쇼트로 쓰이는데, 이때 애니는 카메라를 피해서 달아다는 것처럼 카메라 주위를 돌며 도망간다.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애니가 쳐다보는 건 카메라가 아니지만 마치 카메라에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이후 비슷한 쇼트들이 등장하는데 마치 누군가가 보고 있는 듯한 쇼트라는 것이다. 이걸 그것의 시점 쇼트라고 말하고 싶은데, 휴와 데이트 장면 이후 여동생 켈리와 걸어가는 장면에서도 이 쇼트가 등장한다. 그렉이 소개되는 쇼트 이후, 그렉의 바스트 쇼트에서 패닝으로 제이와 켈리를 보여준다. 확실히 이건 애니를 보여준 첫 쇼트와 같은 맥락의 쇼트로 읽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제이와 휴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 그들은 섹스를 한다. 섹스를 하고 난 다음 공포는 시작된다. 이게 중요하다. 영화의 설정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일맥상통한다. 난 이미 밝혔다. 이 영화가 섹스에 대한 경고나 성병에 대한 경고로 보지 않는다는걸. 그러나 분명한 건 섹스 후 공포가 찾아오는데, 이건 마치 악몽같다. 차 뒷좌석에서 휴가 제이를 잠들게 한 뒤 다음 장면에서 첫 쇼트는 제이가 휠체어에 묶여 있는 쇼트다. 장소는 폐건물 같아 보이고, 제이는 속옷 차림이며, 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휴는 이건 꿈이 아니라지만 데이빗 로버트 미첼의 꿈같은 터치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분명하게 이게 자신의 악몽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밝혔다. 꿈속에선 누군가 이유 없이 쫒아오고 그것들은 종종 외양이 바뀌기도 한다고 했다. 게다가 아는 사람일 때도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다고 했다. 영화는 그 규칙을 정확하게 가져오는데, 맨 처음 나온 그것은 나체의 여자다. 그리고 휴는 그것들의 특성과 앞으로 일어날 일의 규칙들을 알려준다. 어떻게 보면 이건 게임이다.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그(녀)에게 바통을 넘기는.      


  휴는 제이에게 이 룰에 대해 이해를 시키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설명 방식에 대해 익숙해 보인다. 아마도 그는 몇 번이고 이걸 반복했을 것이다. 어쩌면 애니도 휴의 애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 제이를 집 앞에 떨어뜨리고 휴는 도망간다. 난리가 난 제이의 집. 하지만 여기서도 제이의 엄마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이상한 건 제이의 엄마가 드러나야 할 순간에 그렉의 엄마가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제이의 엄마의 자리를 그렉의 엄마가 차지했다는 게 아니다. 그렉의 엄마가 왜 나와야 하는가. 여기서 왜 소개되어야 하는가. 혹,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왜 그렉의 아빠는 부재의 상태인가. 이건 중요하다. 제이의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제이의 아빠는 부재의 상태다. 그렉의 엄마는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주고, 그렉의 아빠는 부재의 상태다. 여기서 그렉의 엄마를 보여준 건 아마도 이후에 나타나는 장면 때문에 미리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이는 휴의 말 자체가 공포로 다가온다. 사실 학교에서 할머니가 제이에게 다가왔을 때 이건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순간 잊은 것이다. 그것이 모습을 바꾼다는 사실을. 그것은 할머니의 형태로 제이에게 다가오고 제이는 휴의 말을 믿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이를 둘러싸고 있는 제이의 일행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데, 폴은 이걸 기회 삼아 제이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다. 제이에게 지켜준다고 말하는 폴. 그 말은 사실이며 그걸 행할 수 있는 사람은 폴 밖엔 없다. 폴은 제이의 첫사랑이다. 이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이 영화를 좌지우지하는 설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첫사랑이다. 첫 경험 상대가 아니다.       


  이후 집 안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것들이 집 안으로 침입한 것인데 제이의 친구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오줌을 흘리면서 젖가슴을 내놓고 다가오는 그것. 2미터가 넘어 보이는 신장의 남자로 변하여 덮쳐오는 그것. 그때 그렉은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다가 제이를 보게 된다. 여기서 그렉은 제이의 일행으로 함께하게 되는데 그렉이 들어오면서 폴과 제이의 관계를 틀어버린다. 마치 폴과 제이가 이어질 것처럼 보였는데 그렉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완전하게 틀어져 버린 것이다. 이 영화는 그것에게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해치우는 것이 가장 표면적인 플롯이지만 그 안에는 로맨스가 흐르고 있다. 이 로맨스는 이상하리만치 그것에 대한 공포와 같이 흘러간다. 제이는 도망친 휴를 찾아냈고, 휴의 말대로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데, 그 상대는 폴이 아니라 그렉이다. 여기서 왜 폴이 선택받지 못했던 것인가. 물론 영화의 후반부 폴은 제이에게 묻는다. 왜 자신이 아니라 그렉이었는지. 거기서 제이는 그렉과는 이미 섹스를 했던 사이였으며, 그렉은 그것에 존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걸 그대로 믿는 것이 맞는지는 관객의 선택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와보자. 섹스란 무엇인가. 섹스란 남녀의 육체적 관계이다. 여기서 방점은 육체적에 있다. 어떤 섹스는 사랑에 바탕이 되는 섹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섹스도 있다. 제이는 3번의 섹스를 한다. 휴, 그렉, 폴. 두 종류의 섹스 중 그 어떤 섹스도 그것은 섹스를 한 사람에게 넘어간다. 3번의 섹스에서 그렉과의 섹스는 그것을 넘기기 위한 섹스로 보는 것이 맞다. 제이는 그렉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렉과 섹스를 한다. 제이는 폴과 그런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섹스는 어떤가. 휴와의 섹스에서 휴는 제이에게 그것을 넘기기 위해 섹스를 한다. 즉,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섹스 중 감정의 교류가 있던 섹스는 제이와 폴의 섹스다. 여기서 섹스 장면들의 데쿠파주를 한 번 보자. 그렉과의 섹스 장면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위에서 언급한 그것의 시점 쇼트처럼 찍혔다. 그럼 제이와 휴의 섹스는 어떻게 찍혔나. 카메라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들의 카섹스를 차 밖에서 찍었다. 그다음은 반대로 넘어가서 그들에게 서서히 다가가고, 그다음엔 롱 쇼트다. 카메라는 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렉과의 섹스, 휴와의 섹스, 둘 다 밖에서 안을 찍은 쇼트들이다. 하지만 폴과의 섹스는 안에서 찍었으며 카메라가 창문을 통해 밖을 보여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없다. 이 쇼트는 휴와의 데이트 중 식당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때도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는 제이와 휴의 섹스 전이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문에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에 성공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그것에서 멀리 도망치기 위해 제이는 친구들과 해변으로 간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데이빗 린치에 대한 존경보다도 히치콕에 대한 존경을 더 드러낸다. 사실 <팔로우>에서도 히치콕의 법칙을 여럿 발견하게 되는데 이 해변 장면에선 그의 말을 그대로 찍은 것과 같다. 물론 현대 영화에서 공포 영화, 혹은 스릴러 영화에서 히치콕의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히치콕의 말을 그대로 찍었다. 우선 히치콕은 살인사건이 밤에 일어나는 것보다 낮에 일어나는 게 더 섬뜩하다고 했다. 그리고 히치콕이 이야기한 식탁 밑 폭탄 장치는 너무나도 유명한 서스펜스의 원리다. 해변 장면은 낮에 일어나고. 서스펜스의 원리대로 찍었다.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 위협이 인물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간극에서 긴장이 발생한다. 해변에서 그것이 다가올 때 제이는 그것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보지 못하고, 친구들은 그것이 안 보이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관객은 제이와 그것을 같이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외치게 된다. 돌아보라고! 하지만 그것이 제이의 머리를 들어 올릴 때까지 그들은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뒤늦게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제이와 친구들. 히치콕이라는 이름이 단번에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끝나면 제이는 그렉을 선택하여 그렉과 섹스를 한다. 그렉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국 그렉은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렉을 죽이는 그것의 모습이다. 엄마. 더 중요한 건 그것과 그렉이 섹스를 하는 것처럼 묘사된다는 것이다. 금기. 근친상간의 이미지. 그렉이 죽자 그것은 다시 제이에게로 왔다. 그리고 제이는 차를 타고 멀리 떠난 뒤 해변에서 놀고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더니 옷을 벗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장면은 여기서 끝난다. 남자들과 관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러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온몸이 젖은 채로 돌아온 제이. 그 다음날 폴은 제이에게 돕고 싶다며 섹스를 하자는 제스처를 취한다. 하지만 제이는 거절한 후 그렉의 집을 바라본다. 즉, 그렉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폴은 어떤 방식으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렉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제이가 해변에 있던 남자들과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도덕적 선택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성장에 가장 가까운 순간은 이 선택이지 않았을까. 혹, 폴이 창녀들을 지나친 장면이 아니었을까. 폴은 첫키스를 한 장소가 기억나냐고 묻는다.     


  사실 이 부분은 좀 도식적으로 설정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첫키스라는 건 무엇인가. 그들이 남자와 여성으로서 관계를 맺는 첫 번째 증거가 아닌가. 그 장소에서 그것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 그것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이 영화는 퍼즐 맞추기다. 단 한 쇼트를 놓치면 전체를 놓치게 된다. 제이와 폴이 첫키스한 장소에서 그것을 초대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감전시킬 작전이었지만 그것은 그걸 꿰뚫어보고 있다. 그것과의 사투 속에서 폴은 그것의 머리를 총으로 명중시킨다. 물속으로 빠져드는 그것. 우리는 앞서서 작은 간이 수영장을 봤다. 그곳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는 제이. 그리고 그곳에서 물이 다 빠져나갔을 때 수영장 속에서 그것을 없애버린다. 피로 물든 수영장의 물. 그다음 폴과의 섹스 장면이 이어지고, 그다음 장면에서 제이의 엄마가 제이의 등을 만져주고 있다. 마치 5살 소녀가 된 것처럼.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가족사진을 보게 되는데 이 사진 속 인물을 보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영원히 미궁 속으로 들어간다. 어린 제이와 켈리, 그리고 엄마와 아빠. 수영장에서 죽인 남자는 제이의 아빠다. 자세히 보면 그전에도 사진으로 아빠는 등장한다. 제이의 아빠를 죽인 폴. 그러고 나서 제이와 섹스하는 폴. 여기서 중요한 건 주인공 제이가 그것을 죽인 게 아니라 폴이 그것을 죽인 것이다.      


  이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아빠를 죽이고 엄마를 아내로 삼은 뒤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우리는 그 신화를 정신 분석학적 용어로 교체하면 이 영화의 의문이 풀린다. 섹스에 대한 금기. 자, 떠올려보자. 앞서서 이야기했던 휴와의 바꾸기 게임에서 휴가 되고 싶어 했던 아이는 오이디푸스 단계가 발달하던 시기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쫓던 아이들 중 양부모가 다 있던 아이는 없다. 그들은 오이디푸스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렉이 죽을 때를 떠올려 보면 더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게다가 제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극복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질문이 남는다. 맨 마지막 그들 뒤에 있던 인물은 그것인가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어떠한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아마 그건 영원히 잠복기 상태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그들 뒤에 있던 그것은 그들을 위협해오진 않겠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팔로우>는 공포영화이면서 성장영화다. 정신분석학 용어를 빌려와야 영화를 파헤칠 수 있으면서 악몽 같은 이 영화는 우리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꿈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정말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짜인 영화다. 그것. 깊은 곳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것. 그것을 극복해야만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한다.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문득 10대에는 꿈을 많이 꿨던 기억이 있다. 그것도 악몽을 많이 꿨다. 누군가 쫓아오는 꿈들이 많았다. 나에겐 만화 캐릭터가 칼을 들고 쫓아오기도 하고 사자가 쫓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꿈들을 꾸지 않는다. 아마 나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팔로우>는 그것과 또 다른 그것에 관한 영화다.      


  2019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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