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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Sep 13. 2019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이와의 슌지의 “이 영화를 내 유작으로 삼고 싶다”라는 말은 와전되어 전파됐다. 잘 찾아보면 그 인터뷰는 최근작이 내 유작이었으면 한다는 심정을 전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영화를 찍다가 죽으면 그 영화의 마무리는 다른 사람이 할 테니까. 그런데 이 말이 와전된 건 그저 소문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영화에 대한 사랑이 그 말을 와전시켰을까. 혹, 누군가 이 영화가 이와이 슌지의 최고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물론 나는 아직까지 이와이 슌지의 최고작은 이 영화라고 확정할 수 없다. 아마 그날 기분에 따라 바뀌지 않을까. <러브레터> 혹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중 한 편으로.      


  나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이 그가 영화에 어떻게 다가가는지가 맹점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이와이 슌지의 그 “감성”보다도. 이와이 슌지의 월드라는 명칭까지 붙여질 만큼 사람들은 그의 “감성”에 대해 관심을 표현했다. 중2병 걸린 그 감성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그런데 나는 그의 “감성”보다 그의 “작법”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시나리오의 문제다. 내가 이와이 슌지의 최고작을 <러브레터>로 뽑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멜로 영화를, 그것도 첫사랑 영화를 찍는데 미스터리 플롯을 차용한다라. 이건 실험이자 도전이며, 명백하게 자신감이다. <러브레터>는 그래서 첫사랑에 대한 영화로 기억될 뿐 아니라 시간과 기억에 관한 걸작으로 기록된다. 최근작인 <립반 윙클의 신부>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와이 슌지가 시작하는 지점은 속임수에 의한 결혼 파탄이다. 신기한 건 이러한 작법으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비가시적인 것들이다.      


  이 영화는 오키나와 시퀀스 기준으로 나뉘어 있다. 즉, 2막구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1시간 9분가량이 지나면 여름방학이 끝나고 1999년 9월 1일이 시작된다. 여기부터가 2막이라고 보고, 그전의 분량을 1막으로 (나는) 본다. 엄청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간단하지도 않기에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우선 전체 이야기로 봤을 때, (영화가 아니라 이야기는) 1999년 그 아이들이 13살일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은 2000년인 14살부터 시작한다. 아마 이 첫 시퀀스 부분은 14살의 봄과 여름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오키나와 시퀀스가 끝나면 13살의 가을(9월 1일)이 시작되고, 이 시퀀스에서 잿빛 시대가 열린다. 호시노가 변한 걸 보여주고 난 다음에 2000년인 14살의 시절이 이어진다. 이 부분은 영화의 맨 앞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순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다음은 시간순서다. 큼지막하게 정리해보자면 2000년으로 시작하여 1999년 3월(입학시즌)으로 돌아간 뒤 쭉 이어지다가 츠다가 등장하면서부터 원래의 시간 순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순으로 구성하지 않았을 때 왜 이런 장치가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이야기의 시작인 중학교 입학 장면으로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면 영화는 어떻게 될까. 이와이 슌지가 유이치를 소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런 구성을 택했다고 생각하면 어떠한가. 이와이 슌지는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감독이다.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고 난 뒤 다음 장면에서 관객의 심리적 운동을 다룰 줄 안다는 이야기다. 반전 효과를 즐겨 쓰며 그 이야기의 동력으로 영화를 풍성하게 해나간다. 결국 영화는 운동이라고 했다. 그게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 운동이든 우리의 머릿속에서 행해지는 심리적 운동이든. 확실한 건 영화가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우리의 심리적 운동은 격해져만 간다.       


  영화가 시작되자 유이치와 그의 일행은 도둑질을 한다. 기차에서 자고 있는 남자의 가방을 훔치고, CD 가게에서 CD들을 쓸어 담아 되판다. 그 과정에서 유이치는 릴리 슈슈의 포스터를 보고 집으로 가져간다. 이 장면은 나중에 호시노의 집에서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회상 시퀀스에서 호시노의 집에 간 유이치는 똑같은 포스터를 본다. 그럼 유이치가 집으로 가져온 포스터는 호시노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같은 것이었나. 영화는 계속해서 어떤 인과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그걸 성립시켜주는 숏은 보여주지 않는다. 유이치가 포스터를 자전거에 매달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인상적인 건 쇼트의 배열이다. 유이치를 보고 유이치의 일행은 이상한 아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한 아이의 클로즈업을 보여주고 그다음 롱 쇼트를 배치했는데, 난 이 롱 쇼트가 클로즈업 된 아이의 시점 쇼트로 생각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영화를 재관람할 때 이 롱 쇼트에서 클로즈업으로 보여준 아이와 그 일행들까지 모두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a라는 인물이 무엇을 보고 난 다음의 쇼트가 a의 시점 쇼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이 시점 쇼트 같은 쇼트는 무엇인가. 이건 관객의 시점 쇼트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들과 그 아이들의 거리.      


  유이치는 임신한 엄마, 그리고 엄마와 재혼한 남자와 남자의 아이와 같이 산다. 티는 내지 않지만 유이치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시퀀스에서도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간극이 나타난다. 유이치가 집에서 나올 때 새아빠는 분명 집에 있었다. 그런데 유이치가 집에서 나와서 거리 장면으로 장면전환이 되고 난 다음 유이치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새아빠가 등장한다. 즉, 집에서 나오는 장면과 자전거 타는 장면이 붙어있지만 이건 시간적으로 완전히 떨어져 있는 장면이다. 집에서 나오는 장면을 a라고 하고 자전거 타는 장면을 b라고 했을 때 a 장면 다음 b 장면의 시작에선 왜 이렇게 늦게 나오냐는 말로 이어진다. a 장면의 끝은 어떠했는가? 엄마 몰래 나오기 위해 유이치는 눈치를 보며 나왔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a와 b의 시간 간격은 크지 않다고 봐야 하는데 여기서 새아빠가 등장하며 관객은 그런 시간 인식을 바꿔서 정립해야 한다. 이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바꾼 것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이렇게 편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인가.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이와이 슌지는 관객에게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요구하는 걸지도 모른다.      


  호시노는 과거에 이지메를 당한 경험이 있는 아이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있지만 호시노의 가정도 보편적인 가정은 아니다. 아빠가 없어 보이고, 엄마가 지나치게 젊다. 할머니와도 같이 사는 듯 보이지만 할머니는 등장하지 않는다. 호시노를 소개하면서 인상적인 것은 이와이 슌지가 배우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검도부 친구들이 호시노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나모리 이즈미라는 배우를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냥 넘겼지만 두 번째 볼 때 혹시나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 호시노의 엄마 역을 맡은 배우는 이나모리 이즈미다. 즉, 그 배역을 맡은 배우와 배우 그 자체의 간극을 좁힌 것이다. 그랬을 때 슌지가 원하는 효과는 분명 하나다. 나이. 지나치게 젊은 엄마. 이나모리 이즈미는 1972년생으로 검색된다. 이 영화는 2001년 작품. 그러니까 영화 속 호시노의 엄마는 우리나라 나이로 30살이다. 그런데 호시노는 13살이다. 그러면 호시노의 엄마가 호시노를 낳았을 때는 몇 살인가.      


  유이치와 호시노의 관계, 호시노 스스로가 변한 건 오키나와 이후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이걸 푸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호시노의 변화. 오키나와에서 호시노는 두 번 죽을 뻔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의 죽음을 목도한다. 분명한 건 이 일련의 죽음들 속에서 호시노가 변한 것이다. 호시노는 영화의 앞 부분에서 유이치를 괴롭힐 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한다. 죽을 지도 몰라서. 그렇게 심하게 괴롭히면서 하는 이 말의 괴리감은 분명 호시노 안에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듣게 되는 아라구스크의 노래는 이후로 호시노를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이노부시에게 심한 이지메를 가할 때도 이 노래가 나온다. 호시노의 악행은 오키나와에서 비롯된 것은 맞는데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후 호시노의 가정에 문제가 생긴 것도 분명 하나의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1막에서의 호시노를 본 관객들이 2막에서의 호시노를 보고 생기는 그 괴리감을 좁힐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관점의 문제라고 본다.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오키나와에서의 죽음들을 목도한 뒤 우리는 잊어서 안되는 장면 또한 언급해야 한다. 그 죽음 뒤에 나오는 인간들. 사람이 죽었는데 잘잘못만 따지는 말들. 그 장면 이후 호시노는 돈을 바다에 버린다. 아마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이 심어진 건 아닐까. 그리고 난 뒤 세상은 멸망했다고 말한다.  

    

  1999년 9월 1일. 세상은 멸망했다. 어쩌면 호시노는 세상이 멸망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악행들을 저지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로 호시노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츠다와 쿠노의 세계는 산산조각 났다. 츠다는 등장 때부터 호시노의 협박으로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 유이치는 츠다를 따라다니면서 그녀가 원조교제를 하고 난 뒤 돈을 받기도 하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상한 쇼트가 나온다. 츠다를 데려다주라고 요구받을 때 일행 한 명의 클로즈업이 나온다. 마치 자신이 데려다주고 싶은 듯한. 유이치가 부러워 보이는 듯한. 이 이상한 쇼트가 나로 인해 이 영화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한 쇼트다. 이건 어떻게 봐야 하는 쇼트인가.      


  이후 유이치와 츠다는 점점 친해진다. 그들이 친해지는 건 그들 사이에 놓인 호시노가 이유겠지만 츠다는 유이치를 좋아한다. 과연 츠다는 이전부터 유이치를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유이치와 붙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좋아하게 된 것일까. 이 시점에 따라서 츠다가 유이치를 때리는 장면이 달라진다. 츠다가 건넨 돈을 받은 유이치. 이때 츠다가 유이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가. 그건 인간에 대한 경멸인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인가. 하지만 유이치는 츠다보다는 쿠노에게 마음이 간다. 그건 왜였을까. 쿠노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호시노도 쿠노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릴리 슈슈로 이어져 있다. 릴리 슈슈로 이어져 있는 3명. 그리고 유이치는 츠다에게 릴리 슈슈를 전파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장면을 뽑으라면 망설이며 가장 잔혹한 장면을 이야기할 것이다. 사사키의 말을 츠다에게 전한 유이치는 기대감을 갖는다. 사사키가 츠다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다. 유이치가 볼 때 사사키는 호시노의 폭력에서 츠다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한 기대감은 금방 깨져버린다. 호시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쿠노를 불러오라는 협박. 유이치는 쿠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면서도 쿠노를 호시노의 공장으로 데려간다. 이때 장면의 시작은 롱 쇼트로 유이치와 쿠노가 거리를 두고 호시노의 공장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굉장히 예쁘게 찍혔다. 이런 장면은 찍기 어려운 장면이다. 해가 구름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그 타이밍에 맞춰서 찍은 장면이다. 그들이 호시노의 공장으로 걸어가는 그 거리는 구름이 점점 사라지면서 해가 그들을 비춘다. 하지만 이 예쁜 쇼트 다음에는 잔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장면이 왜 좋은지는 편집에 있다. 이와이는 이 잔혹한 장면을 사사키가 츠다에게 고백하는 장면과 교차시켜놨다. 쿠노가 집단 강간을 당하는 장면과 츠다가 고백을 받는 장면의 교차. 물론 쿠노가 강간당하는 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고, 츠다가 고백을 받는 것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모두 그 직전의 과정을 찍은 것이다. 그런데 이 교차편집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의견이 완전히 갈릴 것이다. 보통 교차편집은 공명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니까 a 장면과 b 장면이 교차됨으로써 c라는 결과가 발생한다. 그러면 쿠노가 강간당하는 것과 츠다가 고백받는 것이 교차되면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 우선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건 두 장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장면이 결과라면 어떠한가? 그다음 장면은 츠다가 원조교제를 하면서 자고 있는 남자의 지갑을 훔쳐 나오는 장면이다. 그리고 식당에서 유이치와 밥을 먹으며 사사키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말한다. 즉, 쿠노의 강간이 츠다의 대답이 된 것이다. 유이치가 왜 거절했냐고 묻자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통의 10대와 협박으로 인해 원조교제를 하는 10대. 10대도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을 안다. 그러니까 츠다가 사사키를 거절한 이유는 츠다가 쿠노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츠다는 쿠노가 경험한 걸 이미 경험했다. 그리고 츠다는 유이치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유이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쿠노도 지키지 못했다. 아니, 그건 지키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녀를 지옥으로 데려다 놓은 셈이다. 이 장면에서 유이치의 클로즈업은 잔인하다. 무능력한 자리의 관객은 그저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쿠노는 그다음 학교에 머리를 밀고 등교한다. 이건 츠다가 하지 못한 행동이다. 츠다는 식당에서 살이 찌면 이 일을 안 해도 되는지, 머리를 밀어버리면 이 일을 안 해도 되는지 유이치에게 물었다. 하지만 츠다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쿠노는 그렇게 했다. 그다음 츠다의 장면에서 츠다는 운다. 이건 무슨 눈물일까. 쿠노의 행동을 보고 자신이 부끄러웠을까. 그다음 츠다는 연 날리는 사람들에게 연을 잠시 빌려 날린 뒤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장면도 이상하게 편집이 되었다. 츠다의 자살 시퀀스는 시간이 뒤바뀌어서 편집되었다. 츠다가 죽은 다음에 나와야 할 장면을 츠다의 죽음을 보여주기 전에 보여준다. 츠다가 죽기 전에 호시노를 버릴 생각을 하는 호시노 일행들. 그들은 자신들의 아지트에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대책 회의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츠다의 죽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즉각 누굴지 생각한다. 쿠노와 츠다. 둘 중 한 명. 츠다의 죽음은 장례행렬의 쇼트가 포함된다. 하지만 호시노의 죽음 포함되지 않는다. 이건 이와이 슌지의 선택이다.     


  여기서 또 하나 쿠노의 강간 시퀀스와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쿠노의 강간 이후 츠다는 쿠노가 괜찮을 거라고. 그녀는 강하니까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고 나서 쿠노가 머리를 밀고 오는데, 이건 츠다의 자살 이유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츠다가 자살을 결심한 건 언제인가? 그건 아마도 자신이 쿠노와 같이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난 츠다가 우는 이유가 쿠노의 행동 때문에 발생한 거라고 보는 쪽이다. 그리고 그때 츠다는 견디지 못할 거면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츠다가 죽고 난 뒤 처음으로 절규를 하는 호시노. 여기서 편집은 마치 호시노의 절규를 유이치가 듣는 것처럼 편집되었다. 호시노의 절규 위로 아라베스크의 노래와 릴리 슈슈의 호흡이 같이 믹스돼서 흐른다. 그러다가 릴리 슈슈의 호흡은 사라지고, 절규도 멈추지만 아라베스크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그 상태로 이미지만 유이치로 전환되는데 음악으로 이미지를 붙여놓은 것이다. 여기서 유이치는 호시노를 죽이기로 결심한 건 아닐까. 이건 츠다와 쿠노의 복수인가. 아니면 호시노를 구원하기 위한 행위인가. 혹, 이 모든 걸 끝내고 싶은 것인가. 유이치는 릴리 슈슈의 콘서트에서 호시노를 마주친다. 그리고 그가 푸른 고양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유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필리어(유이치)와 통했던 푸른 고양이(호시노). 그 사실이 유이치의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유이치는 호시노의 절규에 대한 대답으로 절규한다. 릴리 슈슈가 있다는 외침으로. 하지만 거기에 릴리 슈슈는 없었다.      


  이 콘서트 장면에서 릴리 슈슈의 팬들의 다툼을 이상하리만치 길게 찍었다. 그런데 필리어는 릴리 슈슈가 그룹이었을 때 그룹명이다. 필리어가 진짜라느니. 릴리 슈슈가 진짜라느니. 처음 볼 땐 이상했지만 두 번째 볼 땐 어쩌면 유이치가 필리어라는 아이디를 사용한 건 릴리 슈슈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호시노의 절규가 릴리 슈슈의 노래에 의해 가려지지 않아도 되는 시절.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하기 전, 릴리 슈슈의 음악이 없어도 되던 그런 시절. 장밋빛 세상의 시절을.      


  호시노를 죽였지만 유이치는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15살이 된다.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유이치. 하지만 그 소년은 안간힘을 쓰며 산다. 이런 소년에게 선생은 성적 따위나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쩌면 유이치는 쿠노가 살아있기에 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어쩌면 나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잔인함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영화는 쿠노가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며 유이치와의 투 쇼트로 끝난다. 내가 본 영화에서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투 쇼트.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이와이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 말하고 싶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걱정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어떤 걸 들고 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냥 자신이 본 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혹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관객에게 그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난 이 아이들이 걱정된다. 내가 살아본 세상에선 그들이 당한 고통을 이겨내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린 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19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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