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그 해를 설명하는 건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준환의 데뷔작을 극찬하는 것 또한, 그 엄청난 데뷔작이 자본적으로 굶어 죽었다는 사실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시작을 이렇게 하겠다. 이건 저주받은 영화가 맞는가? 2018년 2월쯤으로 기억한다.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친구들의 영화제가 끝나갈 무렵, 당시 주제는 저주받은 영화들이었고, 정성일 평론가님은 히치콕의 <토파즈>를 선택했다. 당시 정성일 평론가님은 ‘저주받은’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자면 세 가지의 예가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당대에는 혹평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서 그 영화의 진가를 다시 알게 되는 경우. 두 번째는 필름이 유실됐거나 소멸됐다고 판단이 되었는데 나중에 그 필름들을 되찾아 관객들에게 상영할 기회를 얻게 되는 작품, 세 번째는 영화 전체는 실패작이지만 몇 시퀀스나 몇 장면이 너무나도 훌륭하여 그 영화가 실패하여도 그 영화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경우. 간단하게는 이렇게 요약되지만 당시에는 사례들을 설명하며 진행해주셨다. <지구를 지켜라>는 분명하게도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대에 혹평 받았나? 흥행이라는 기준으로 호평과 혹평을 구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의 한국 영화 개봉작들은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바람난 가족>, <장화, 홍련>, <질투는 나의 힘> 등 쟁쟁한 한국 영화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한국 영화의 클래식에 선정될만한 영화들이 개봉했었다. 그때 씨네21에서 한국 영화 베스트 5를 뽑았고, 많은 평론가들이 그 명단에 <지구를 지켜라>를 넣었으며, <지구를 지켜라>는 씨네21이 뽑은 베스트 5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였다. 물론 여기서 등수 놀이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영화의 기억이 일반 대중들에게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당대에 평단에선 엄청난 호평을 받은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지금에서 다시 보는 행위는 어쩌면 반성의 행위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모임에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정했기 때문에 다시 본 것이기는 하지만 2019년에 <지구를 지켜라>를 보는 것은 반성을 촉구하는 행위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다. 2019년의 한국 영화들. 지금의 한국 영화들. 작년엔 <극한직업>이 천만을 넘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당장 <엑시트>는 900만을 넘어 천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간신히 천만을 넘었고, 봉준호는 한국 영화의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토마츠 샤츠의 <할리우드 장르>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 시대의 관객은 궁극적으로 스튜디오 시스템의 발전에 대부분 책임이 있다. 그들의 여가와 돈 쓰기가 사회사학자 아놀드 하우저의 말처럼 예술의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바로 그 관객이다.
즉, 지금 생산되는 영화들은 관객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관객이 원하지 않다면 스튜디오는 그 영화를 찍어내지 않는다. 몇 년 전 이 문장을 100% 공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구를 지켜라>에 붙은 가정. 만약. 만약 마케팅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면. 아니, 어떤 마케팅이었어도 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게 내 추측이다. 그런데, 가정법을 다른데 사용해보면? 만약 <지구를 지켜라>를 관객들이 버리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놀랄 만큼의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장준환이 <지구를 지켜라>의 다른 버전들을 찍었다면? 그리고 그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면? <화이>와 <1987>은 정말 다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10년의 공백기 동안 흥미진진한 영화들을 만나지 않았었을까. 어쩌면 장준환 감독은 그 10년의 공백기 동안 병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병구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방점으로 진행한다. 그러니까 강 사장이 외계인이라는데 정말 그런 걸까? 그게 아니라면 병구는 미친놈일까? 그런데 여기서 병구의 말이 망상이 아니라 사실일지라도 병구는 미친 게 아닌 걸까? 유명한 명제. 의처증 환자는 환자의 아내가 실제로 바람을 피우고 있더라도 여전히 의처증 환자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정신분석자가 이야기 한 것이지만 설명을 하자면 의처증 환자는 아내의 모든 행위를 바람을 피우고 있다라는 점에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설사 바람을 피우더라도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가 안되는 행동들까지 바람을 피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 병구는 외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외계인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더라도 그건 미친 거다. 병구는 미쳤다.
병구에겐 외계인이 필요하다. 이건 미쳤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약 외계인이 없다면 병구의 삶은 무의미한 삶이 되어버린다. 병구는 지구를 정복하려는 외계인들을 색출하여 지구를 지키는 영웅의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다. 병구는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영웅에겐 악당이 필요하다. 허나 오버 더 레인보우가 흘러나왔을 때 그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지개 너머로 갈 수 없는 파랑새의 이야기.
장준환 감독은 <미져리>를 보고 윌킨스의 광기에 대한 이유가 없다는 것에 대해 아쉬웠다고 한다. 저렇게 미칠 정도면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캐릭터가 병구라는 캐릭터다. 사실 따져보면 이건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병구의 자리에 <추격자>의 지영민을 놓으면 이 영환 <추격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병구가 미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우선 병구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원인과 그 원인의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원인들은 탄광촌에서의 아빠의 사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당한 폭력, 왕따, 노동운동을 하던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 살인행위, 교도관의 폭행, 엄마의 혼수상태가 원인이다. 그 원인의 원인은 인간의 폭력성인데, 영화에선 특정 유전자 때문에 그 폭력성이 발현된다고 한다. 그런데 강 사장은 병구에게 너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뫼비우스의 띠다. 지구를 폭발하는 것.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
이 영화가 신기한 건 관객의 위치인데 관객은 당연하게도 병구에게 이입되어 진행한다. 헌데 장준환은 꽤나 이 부분에 도전적이다. 영화 중반 추형사는 병구에게 죽음을 당한다. 직접적인 살해 행위는 아니었으나 그렇게 볼 수 있는 살해 행위. 추형사의 시체를 보여주고 그다음 쇼트는 그 시체를 개밥으로 만들어 병구가 기르는 개 지구한테 주는 것이다. 병구가 미친 것이라고 해도 이 행위는 관객에게 병구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을 죽여 개밥으로 만드는 주인공. 우리는 그 주인공을 응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병구는 강 사장의 고백으로 인해 엄마에게 해독제를 주러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중간에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병구의 동선만 따라갔을 때 그는 개한테 인육을 주고 난 다음 강 사장의 다리를 자르려고 한다. 그러자 강 사장은 엄마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병구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해독제를 들고 병원으로 향한다. 이 시퀀스를 보면 편집이 이상하다. 이 장면은 세 가지의 장면이 교차되어 진행되고 있고, 그 사이의 장면 속 장면이 들어가 총 4개의 장면이 교차되어 진행된다. 하나는 병구가 엄마에게 향하는 장면, 두 번째는 탈출을 강행하는 강 사장, 세 번째는 사건을 조사하는 김 형사, 네 번째는 탈출하고 난 뒤 병구의 일기를 강 사장이 보게 되는데 일기 속 내용이 장면화된다. 이 네 개의 장면을 마치 구겨 넣은 듯한 이 시퀀스는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가? 이 장면을 유심히 봐야 하는 부분은 병구의 배경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는 가다. 이 영화에선 특이하게도 병구의 기억을 병구의 시점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퀀스는 강 사장이 병구의 일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강 사장의 눈으로 병구의 과거를 보게 되고, 이전 플래시백의 경우는 순이를 통해 들어간다. 일기를 읽고 강 사장이 우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데, 그것과 동일하게도 병구의 엄마가 죽는 순간 병구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강 사장의 분노를 보여준다. 죽자마자 쇼트가 바뀌면 강 사장이 지하실의 물품들을 다 때려 부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주인공과 관객들의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는 편집. 신파적 요소를 한껏 활용할 수 있음에도 이 영화는 거기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김 형사를 붙잡아 놓고 병구는 내가 미쳐갈 때 너희들은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 즉, 병구는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 강 사장은 병구에게 미친 척 그만해 이 미친놈아라고 소리를 치는데 처음엔 이게 모순적이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쳤다는 단어가 이중적 의미로 각각 쓰인 것이라면 모순적인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구는 미친놈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완전하게 미친놈이다. 그런데 병구가 미쳤다는 것은 병구가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자신이 지구를 지켜야 하는 영웅이기 때문에 미친 것이다. 그렇다면 병구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사람을 잡아 고문하고 죽인 사실은? 이건 미친 척이다. 그러니까 병구는 그들이 외계인이라고 믿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사실 병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강 사장의 이 말은 모순적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쳤다는 의미의 이중성을 읽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한 부분을 더 논의하고 싶었는데 그 문제를 풀지 못하여 건너뛰었다. 아마도 예민한 관객이라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지만 난 이 영화의 앞 시퀀스 전체를 건너 뛰었다. 다른 건 일반적이더라도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순이의 존재. 그리고 병구의 플래시백을 순이가 진행시킨다는 점. 순이는 영화 속에서 어떤 인물인가. 사실 이 부분은 잘 풀리지 않는다. 단순히 순이는 기능적 캐릭터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상한 건 시나리오를 쓰는 입장에서 본다면 순이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없어도 되는 인물이다. 순이가 없더라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헌데 장준환 감독은 왜 순이를 넣었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순이도 미친 건가? 병구의 말을 유일하게 믿어주는 건 영화 속에서 순이밖에 없다. 아니, 그건 믿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믿어 주고 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강 사장은 순이에게 넌 내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냐고 묻는다. 순이의 내면에선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결정이 보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순이는 병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 있다. 순이는 기능적인 인물이 맞다. 젠더 쟁점이 정점을 달하는 요즘 이슈로 말하자면 남성을 위한 여성 캐릭터의 기능.
강 사장은 김 형사가 순이에 의해 잡혔을 때 모든 걸 고백한다. 지구의 인류 기원. 태초의 폭력성. 그걸 공격 유전자의 원인으로 돌린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류의 폭력성은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인가. 강 사장은 그 유전자를 재배열하기 위해 지구로 온 것이다. 즉, 지구를 지키기 위해 지구로 온 것이다. 하지만 강 사장은 결국 지구를 파괴한다. 병구의 엄마는 죽었더라도 아직 표본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도대체 왜 지구를 파괴한 것일까? 병구와의 사건들 속에서 더 이상 지구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병구도 실험 대상 중 하나로 나오지만 병구는 미친 척하는 미친놈이었다. 아마도 강 사장은 병구의 일기를 읽었을 때 지구를 파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영화를 오래전에 봤을 때는 장준환 감독이 진짜 염세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지구에 희망이 없어서 지구를 폭발하는 장면을 시각화시키다니. 그런데 최근에 다시 보고는 그건 장준환이 병구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구가 파괴되지 않고, 강 사장이 외계인이 아닌 상태에서 영화가 마무리되었다면 그건 지구가 폭발한 것보다 더 염세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장준환 감독은 병구를 위해서 지구를 파괴한 것은 아닐까. 이건 이중성이다. 지구를 위해 지구를 파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10년의 공백기 동안 어쩌면 장준환은 순이를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장준환 감독이 약으로 버티어야만 했을 시절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를 외면했다. 엄청난 데뷔작으로 한국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 감독을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병구를 외면한 것처럼 외면한 것이다. 그 순간 장준환은 지구를 폭발시켜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본다. 자신의 우울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상상과 작품으로 이어지는. 장준환 감독은 그 시절을 견디고 <화이>와 <1987>로 돌아왔다. 아마 장준환 감독은 다시 한 번 시도할지도 모른다. 영화계를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괴작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확률은 아주 적다. 피를 본 사람의 두려움. 하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우린 장준환 감독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영화계가 폭발하기 전에.
2019년 9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