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리는 이 영화를 정치적인 영화로 만들었지만 프로파간다적으로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 한다). 아주 오래전 그의 영화 몇 편을 봤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흑인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 흑인 영화를 계속해서 찍은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뿐이다. 물론 어느 지점에서 흑인 영화만 찍겠다는 의지(?)를 버리고 백인 영화를 찍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말이다. 물론 난 그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적이지 않다고 느낀 점은 간단하다. 영화의 시작은 러브 대디의 방송으로 시작한다. 두 번째 장면은 잠에서 깨는 메요. 세 번째는 스마일 리가 말콤 엑스와 마틴 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무키와 제이드를 소개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에서 이태리 백인이자 영화의 주 무대인 흑인 동네의 피자가게 주인 살과 두 아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물 소개 시퀀스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왔지만 스파이크 리 영화이기 때문이면서도, 영화가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흑과 백이다. 앞의 네 장면은 모두가 흑인이고, 다섯 번째 장면에서 백인이 등장했을 때 당연하게도 백인은 안티고니스트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맞는 말(?)이지만 내가 기대한 전개와는 완전하게 다르게 흘러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켄 로치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난 고다르의 영화들도 좋아한다. 그런데 이게 양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 로치 감독은 정치적인 소재로 비정치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이고, 고다르는 비정치적인 소재로 정치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물론 이 말은 변형이자 인용이다. 그 유명한 고다르의 말.
정치적 영화를 만들지 말고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어라
하지만 켄 로치는 항상 말해왔다. 자신은 끝까지 프롤레타리아를 찍을 것이고, 자신의 영화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봐도 이해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나는 이 신념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히 느낄 수 밖에 없는 욕망이 있다. 걸작으로 인정받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망. 켄 로치는 분명하게 안다. 자신의 방식으로는 그런 영화에 다갈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이는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이다.
스파이크 리의 영화 중 기억나는 것은 이 작품밖에 없기 때문에 단정하긴 힘들지만 그는 계속해서 흑인 영화를 찍을 것이다. 이는 인터뷰에서 밝힌 생각인데, 그렇다는 것은 정치적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건 스파이크 리 감독의 선택이다. 그런데 스파이크 리의 영화는 켄 로치의 영화와는 다르다. 스파이크 리는 흑인 영화를 찍으면서 전형성을 탈피했다. 서사와 영화 모두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감독 자신의 인장을 새기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처음 보고는 놀랐다. 단순하게 흑인과 백인과의 갈등을 그릴 줄 알았는데 영화는 전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다.
2019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한국에서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여성인권이다. 정치적인 분쟁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크나큰 관심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중립은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당신은 여성 인권 운동에 대해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물었을 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혹은 두 쪽 다 공감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투표권을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런데 정치적 입장에 서야 하는 자리에 섰을 때 그 문제에 대해 입장을 정하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다. 즉, 스파이크 리가 이 영화에서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다.
답은 물론 흑인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사건이 발생해야 하는 지점에 우리는 흑인 동네를 지나가던 골동품 차를 몰던 백인에게 물을 끼얹는 장면이 놓여 있다. 처음엔 이제 영화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가 궁금했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인물 소개를 주구장창 해놓고선 사건이 발생해야 하는 지점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니. 정확하게는 이 장면에서 감독이 방점을 찍어놨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전에 일어났다는 것인데 그 어떤 것도 사건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줌을 사용해서 사건이 벌어난 지점을 드러나게는 했지만 그 이후 영화는 버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그 사건을 따라갈 수가 없다. 즉, 영화를 이끌고 가는 사건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왜 가려놨냐는지가 질문이다. 스파이크 리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쓰지 않았다. 버긴이 살의 피자가게에 유명인 사진 전시 게시판에 유명한 흑인 인물의 사진도 걸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발단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게 종결된다. 그런데 이 참혹한 결말은 살이 흑인의 사진을 걸어주지 않아서인가?
이건 영화 내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필연적인 사건이다. 살이 게시판에 흑인의 사진을 걸어줬더라면 사건은 늦게 발단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발생했을 것이다. 우리는 LA 폭동을 알고 있다. 그 사건에 한국인이 연루된 것까지 생각해보면 스파이크 리의 통찰력은 대단하다. 이 영화 세계 안에는 혐오감이 들끓고 있다. 그 혐오감이 발단이 된 것이지 결코 표면적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스파이크 리는 사건의 발단을 보여주고도 영화를 다른 방향으로 진행시켜서 이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영화로 들어가서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 이상한 장면들은 카메라로 이루어지고 배우들이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건 더치 앵글이지만 그것보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것은 배우들이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 속 인물이 카메라를 보면 관객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다. 즉, 안전하게 구경해야 할 스크린 안의 ‘것’들이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찍힌 장면은 무엇인가. 버긴이 살의 피자를 불매운동하자고 사람을 모으는 장면이다. 거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3명의 중년 흑인들에게 걸어가는 버긴을 찍은 장면을 생각해보자. 장면은 버긴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버긴의 옆에서 버긴을 찍으면서 버긴과 비슷한 속도로 3인방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카메라는 3인방 중 한 명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 한 명은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한다. 이건 버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버긴은 카메라 뒤에 있다. 그러니까 버긴의 제안을 관객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이다음 장면은 버긴이 다른 젊은 청년들에게 다시 제안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버긴은 아래를 보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위를 보고 이야기해야 시선이 맞는다. 하지만 청년들도 아래를 보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버긴과 청년들은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스파이크 리는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불매운동이 정당한 것인가? 당신은 불매운동에 참여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마주하기 전에 이상한 장면을 마주했다. 관객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바라봤는데 그 장면은 마치 관객들에게 너희들이 이런 말을 들어보라는 뜻으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혐오. 이 동네의 뿌리 깊은 혐오. 이건 흑인에게 갖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인은 흑인을. 흑인은 백인을. 다른 인종은 또 다른 인종을. 그리고는 러브 대디가 이걸 중재한다. 그런데 러브 대디가 그만하라고 외치는 것도 관객을 보면서 하는데 이때 관객은 단순히 그들의 혐오를 몸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혐오 또한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편집되었다. 즉, 그들의 혐오 발언을 우리가 들으면서 우리 안에 발생되는 혐오를 러브 대디가 그만하라고 하는듯 하다. 이건 영화 세계에서 우리 세계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떠오른 단어는 ‘공생’이다. 과연 공생은 가능한가. 살이 그곳에서 계속 장사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장사는 가능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물벼락 맞은 백인에게 경찰들은 더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이 동네를 빨리 나가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백인 경찰들이 하는 말을 흑인들이 행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흑인들은 더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백인 경찰들에게 인지되었지만 관객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영화 밖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흑인에게 심어진 뿌리 깊은 고정관념. 그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백인 경찰.
그렇다면 살은 왜 백인이면서 흑인 동네에 머무는가? 왜 게으른 무키를 계속해서 직원으로 두는가.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겠지만 그건 당연히 살은 이 동네를 빠져나가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날지 모르는 흑인 동네에서 생명을 담보로 장사를 하는 것이 살의 경쟁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은 살이 피자가게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걸 단순히 자기변명 혹은 아들에게 밉보이지 않을 아버지로서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럴 근거가 충분치 않다. 살이 아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리가 위에 언급한 금기를 깨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보다도 이런 장면을 좋아한다. 영화는 투쇼트로 시작된다. 식당 안과 밖이 같이 보인다. 살은 큰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스마일리는 창밖에서 물건을 사달라고 떼를 쓴다. 보다 못한 큰아들은 나가서 스마일리를 위협한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전경의 피자 가게 안과 중경의 큰아들과 스마일리, 그리고 후경의 한국인들이 스마일리를 위협하는 살의 큰아들을 보는 것이다. 이건 마지막 장면과 비슷하지 않나? 이런 배치는 당연하게도 스파이크 리가 이 관계는 깊숙하게 파고든 이 동네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층위가 더 생기는데 프레임 밖에서 흑인들이 스마일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프레임 밖의 세계. 물론 이 세계는 마지막에 프레임 안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살이 무키를 직원으로 두는 첫 번째 이유는 무키의 동생인 제이드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무키와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오해일지도 모른다. 살은 무키를 정말 아들로 생각하는가? 만약 무키를 아들로 생각했더라면 가게 앞을 청소하라는 지시를 무키에게도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제이드가 피자가게로 들어오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살은 무키에게 행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거리로 내쫓는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큰 아들은 살에게 이 기회에 내쫓자고 제안한다. 그러자마자 다음 쇼트가 제이드가 피자가게로 들어오는 것이다. 즉, 내쫓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제이드가 와버린다. 살은 계속 장사를 했어도 무키를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
버긴은 라힘과 같이 살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 당장에라도 흑인 사진을 걸지 않으면 가게를 부술 기세다. 물론 먼저 폭력을 휘두르는 건 살이다. 라디오 라힘의 라디오를 산산조각 낸다. 라힘은 화를 참지 못하고 살의 멱살을 잡고 던져버린다. 여기서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사건이 여기서 끝맺음을 했다면 그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찰들의 과잉진압으로 라힘은 죽었다.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들은 게시판에 흑인 사진을 걸어달라고 살을 위협했다. 살은 그 위협에 라힘의 라디오를 부수었고, 라힘은 살을 폭행했다. 그리고 경찰은 라힘을 진압하면서 죽여버렸다. 이 문제를 누군가의 잘못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가? 이건 뼛속 깊은 혐오에서 일어난 일이다. 게시판에 흑인 사진을 걸어달라는 건 정당한 요구가 아니다. 그 요구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건 정당한 대응이 아니다. 피해 의식과 인종 간의 권력관계에서 나온 제스처들.
여기서 중요한 건 무키의 선택이다. 처음엔 무키가 죽을지도 모를 살을 위해 쓰레기통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하나의 선택이다. 영화 속 동네의 상황은 계속되는 실업난과 찌는 듯한 더위가 배경이다. 무키가 쓰레기통을 던진 순간 무키는 살의 해고를 각오한 것이다. 버긴을 내쫓을 때 버긴이 무키에게 흑인인 걸 잊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고용주 살은 백인이고 직원 무키는 흑인이다. 무키는 흑인 버긴을 내쫓은 것이다. 그동안 무키는 계속해서 백인 살의 직원으로 행동했다면 이제 무키는 흑인 무키로 행동한 것이다. 불매운동하자던 버긴의 제안을 거절한 모두가 라힘이 죽자 살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그 상황 속에서 살이 경찰을 말렸다면 라힘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물론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라힘의 죽음을 막을 수 있던 건 백인뿐이었다. 흑인이 백인 경찰을 말리는 순간 총이 나왔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기에 라힘이 죽고 무키가 선택한 것처럼 살의 피자를 25년간 먹었던 이들도, 어려서부터 그 피자를 먹던 청년들도 살의 피자가게를 불지른 것이다.
죽은 라힘은 경찰차에 실려 동네를 떠나게 된다. 그때 카메라는 경찰차 안에 있다. 만약 라힘과 이어진 무빙 쇼트가 아니었다면 문제가 될 법한 쇼트지만 이 쇼트의 시작은 라힘으로 시작한다. 떠나는 라힘.
이 영화에서 무키의 역을 맡은 배우는 감독인 스파이크 리다. 그렇기 때문에 무키의 대사는 감독의 말처럼 들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다음 날 아침 무키는 살에게 말한다. 당신은 보험금을 타잖아요. 살은 자신의 25년이 날아간 것이라며 무키에게 고함을 지르지만 무키는 이제 실직자이고, 사회가 무키에게 그 어떤 것도 해주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라힘은 죽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공생은 가능한가. 혹 중립은 가능한가. 스파이크 리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불가능에서 시작해서 가능함으로 이어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말콤x와 마틴의 말.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영화 밖으로 나와 개인적 의견을 하나 더 남기자면 외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2017년 겨울에 비폭력으로 국가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자를 교체했다. 그 감동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것보다는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 어떤 폭력적인 일도 불법적인 일도 없이 그걸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그전에 근현대사 책을 펼치면 항상 보던 글들과는 다른 사건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모든 혁명엔 희생이 따른다는. 그런 것들을 모두 무너뜨린 역사다. <똑바로 살아라>는 2019년의 대한민국에선 이미 지나가버린 질문(이길 바란다)일지도 모른다.
2019년 09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