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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Oct 03. 2019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2015년 9월 2일 알란 쿠르디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9월 2일(현지 시각) 전 세계 언론의 1면을 장식한 건 알란 쿠르디가 해변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국내에서 난민 문제가 화두가 된 건 몇 년 전 시작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족 문제와 다문화가정에 대한 문제 또한 자리 잡을 것이다. 난민 문제가 화두에 올랐을 때 각종 루머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범죄, 살인 등 강력 범죄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를 낳았고, 조선족에 대한 문제는 <신세계>, <범죄 도시> 등 수없이 많은 대중문화에서 이미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옆에는 도움을 청하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36도의 여름인 지금. 그리고 불과 몇 개 월전엔 우리 근처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이렇게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2019년 현재,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하고 200년이 넘은 시간, 우리는 피조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약간 우회하여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31년 제임스 웨일은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했고, 1994년 케네스 브래너 또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했다. 직접적인 각색은 이 두 작품이 가장 유명하고, 그 외에 제임스 웨일의 1935년 <프랑켄슈타인 2 –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와 1974년 멜 브룩스가 패러디한 <영 프랑켄슈타인>을 언급할 만하다. 그 사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모티브가 된 영화까지 합하면 수십 편의 영화가 탄생했을 것이며, 애니메이션과 문학까지 셈하자면 어마어마한 편수가 나올 것이다. 영화를 전공한 나는 아주 오래전 제임스 웨일의 31년 작품인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먼저 접했으며, 그전에 접한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아주 어릴 적 티브이 만화 영화임이 분명하다. 내게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의 이미지는 메리 셸리가 묘사한 기괴한 이미지가 아니었고, 제임스 웨일이 탄생시킨 말 못 하는 거구의 사내도 아니었다. 머리에 못이 박히긴 했지만 다른 캐릭터와 비슷한 몸짓에 초롱초롱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각 턱이지만 여타 캐릭터와 비슷한 귀여움을 지닌 캐릭터였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접했을 때 분명하게 느낀 건 고전 호러 영화의 원천이라는 느낌과 독일 표현주의를 계승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문학을 어떻게 각색하였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또 읽으면서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봤다. 나는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아주 위험한 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현대에서 과학에서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점으로 읽는다는 것은 아마 시시콜콜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몇십 년 동안 윤리에 대해 닳고 닳을 만큼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 탄생한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에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평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에 대한 연민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웨일의 피조물조차도. 그런데 웨일은 이 피조물을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창조해냈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욕망으로 탄생하지만 존재 자체를 반대할만한 이유는 없다. 물론 생명윤리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할 때 그 생명체를 악마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악질의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를 악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악마의 탄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법의 체계가 필요 없고, 악마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한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탄생의 순간 그저 생명체일 뿐이다. 그가 인간과 다른 건 태어난 과정일 뿐이다. 그건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본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피조물은 인간처럼 아주 기본적 본능인 굶주림, 갈증, 추위 등을 느끼고, 인간애를 느끼며, 언어를 배우고, 사랑을 갈구한다. 그리고 사랑의 갈구에 실패하면 슬픔을 느끼고, 좌절하고, 분노하며, 복수를 꿈꾼다. 그런 인간적인 존재의 피조물이지만 제임스 웨일은 31년작 <프랑켄슈타인>에서 이상한 설정을 끼워 넣는다.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해 재료(인간 신체의 장기들과 육체)를 얻을 때 피조물의 뇌를 범죄자의 뇌로 설정한다. 제임스 웨일은 각색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을 돕는 조수를 설정하였는데, 이 조수가 뇌를 공수해오는 과정에서 일반 사람의 뇌 대신 실수로 범죄자의 뇌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은 탄생의 순간부터 범죄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이 얼마나 조악한 각색인가. 그런데 이 조악한 각색의 결과를 비판하기에는 보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미 90년 가까이 된 영화이긴 하지만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첫 범죄는 악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무지함으로 발생 된다. 게다가 이 범죄의 대상은 어린아이인데,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는 다르게 괴상하게 생긴 피조물을 아무런 고정관념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설정을 비극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설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어린아이는 피조물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며, 피조물은 범죄자의 뇌를 가지고도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으로 보인다.      


  영화가 소설을 각색하는 4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통상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소설에서 모티브만 가져온 경우, 두 번째는 소설의 줄거리를 압축한 경우, 세 번째는 소설을 재해석하여 원작과 대결하는 경우, 네 번째는 원작의 행간을 읽어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경우다. 제임스 웨일의 31년작 <프랑켄슈타인>과 1994년 케네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은 전부 두 번째의 경우다. 이 경우를 영화 비평가들은 최악의 경우라고 이야기한다. 그건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이야기할 때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이 지면에선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과 첫 번째 경우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선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은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게 각색했다. 러닝타임만 봐도 알 수 있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은 70분,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은 123분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해설을 제외하고 303페이지(협성문화재단 홈페이지에 걸려 있는 문학동네 판)이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도 원작을 충실히 옮기기에는 역부족인 시간이다. 몇 가지 설정을 바꾼 뒤 사건 순서를 바꾸고 압축하여 영화를 전개 시켜 나가는데, 몇 부분이 흥미롭다. 우선 가장 흥미로운 건 원작과 다르게 프랑켄슈타인이 엘리자베스가 살해당한 뒤 그녀를 피조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피조물의 분장이다. 여기서 피조물은 로버트 드 니로가 맡았는데, 사실 그의 분장은 셸리가 묘사한 피조물과는 좀 다르다. 우선 꿰매고 상처 있는 분장을 했다는 사실 말고는 일반 사람이랑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문학에서 묘사하는 악마 같은 외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콜레라가 번지고 있다는 설정이 추가되어 피조물을 본 사람들은 콜레라 환자라고 치부하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펠릭스 가족과 만났을 때다. 펠릭스 가족이 있는 공간은 콜레라가 번지는 곳이 아니었고, 피조물의 외형이 추하긴 하지만 경기를 일으킬 만큼이 아니기 때문이다. 펠릭스 가족은 피조물을 받아들이지 못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충분치 않은 것이다. 결국 브레너는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이 부분을 처리했다. 이러한 설정은 엘리자베스를 부활시켰을 때도 이상한 효과를 발생시킨다. 엘리자베스 역에 헬레나 본햄 카터를 캐스팅했는데, 그녀의 미모는 단연 으뜸이다. 그녀가 부활했을 때는 기존 피조물과 같이 꿰매고 상처 있는 분장과 머리가 벗어진 부분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이 외형적인 부분을 보고도 프랑켄슈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그녀를 포옹한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브레너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의 외형은 인간들에게 환대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인간과는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엘리자베스의 피조물과 같은 외형을 보고도 프랑켄슈타인이 그렇게 갈구했을 리가 없다. 피조물은 탄생 후 콜레라 보유 환자로 오해받아 폭행을 당하고, 펠릭스 가족에게도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로 오해받아 폭행당한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외형적인 문제 때문에 환대받지 못한 것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에서의 외형적인 문제(분명하게 다른 이유도 있다)와도 분명하게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비약일까? 94년도의 피조물은 더 이상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피조물이 문제인가. 인간들이 문제인가.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유스틴이 처형당하는 부분을 처리하는 방식은 비약이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상상으로만 알 수 있다. 사실 그 비약이 왜 필요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나는 독자의 상상이 필요해서고, 다른 하나는 그 부분이 극의 흐름상 삭제되어야 할 필요성이다. 브레너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이 부분은 삭제되지 않았고,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에선 이 부분은 설정조차 없다. 하지만 웨일의 작품에선 유스틴이 처형당하는 것과 피조물이 처형당하는 것이 같은 사건으로 발생한다. 100년 넘게 지난 각색. 웨일의 <프랑켄슈타인>과 브레너의 <프랑켄슈타인>이 전부 가지고 있는 건 마녀재판의 성격이다. 분명하게 두 감독은 그 부분을 재현했다. 

  P.110 대중은 오히려 더욱 격하게 분노해, 천인공노할 배은망덕을 저지른 유스틴을 비난했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런 식으로 대중들을 표현할 뿐 그들의 광기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19세기 문학에선 건너뛰었지만 20세기의 모든 각색 본에서 등장한 집단 광기.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직접적으로 가져오지 않았지만 그 영향 아래 놓인 두 작품을 보았을 때 더 이상 외형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1990년도에 제작된 팀 버튼의 <가위손>과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걸작 <에이 아이>를 보자. <가위손>에서 주인공 에드워드는 가위손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인간들에게 타자로 멸시받는다. 하지만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인간들의 환심을 사게 된다. 그것은 잠시, 곧이어 시기와 오해로 자신이 탄생한 성으로 돌아간다. <에이 아이>에선 피조물은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었고, 사랑을 주던 사람의 외형으로 변해버렸다. 완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지만 사랑을 얻지 못한다. 중요한 건 피조물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그걸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다. 

  P.73  희미한 노란색 달빛이 억지로 창문 셔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눈앞에 그 괴물이 보였다.

  이건 프랑켄슈타인이 회상하며 한 이야기다. 그는 분명하게 피조물을 괴물이라고 명명한다. 

  P.72 나는 생명 없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겠다는 열망으로 거의 2년 가까운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 이 목적을 위해 휴식도 건강도 다 포기했다.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열정으로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하지만 다 끝나고 난 지금, 아름다웠던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만이 내 심장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이 맥락에선 윤리적인 부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만약 그가 정말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탄생시켰다면, 그랬어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가위손>에서 시간이 흐르고 흘러 킴이 할머니가 되어 손녀딸에게 에드워드 이야기를 해준다. 그 이야기 속에는 애틋함과 미안함이 담겨있다. 에드워드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타자를 환대하지 못한 죄책감. <에이아이>에선 끝내 영화가 피조물을 위한 엔딩을 선사한다. 누군가 그랬다. 지금 절실히 필요한 건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이라고.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의 프랑켄슈타인 가문은 자애로운 사람들이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에선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으로 그려지지만 셸리는 결코 그들이 높은 계급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그려 넣지 않았다. 프랑켄슈타인 가문에선 딱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을 거둔다. 펠릭스의 가족은 어떠한가? 그들 또한 자애로운 사람이다. 피조물의 묘사에 따르면 그들만큼 아름다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못된 인간의 술수에 넘어가 재산을 잃은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두 가족은 재산의 유무를 제외하면 비슷한 사람들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시절과 피조물의 눈으로 바라본 펠릭스 가족의 인간 됨. 이중의 이미지는 피조물이 펠릭스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은 프랑켄슈타인 가족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엔 큰 차이가 있다. 창조주의 책임이다.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을 창조한 창조주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의무를 다하라고 요청한다. 펠릭스 가문은 창조주의 의무가 없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있지 않은가. 

  P.187 그러나 동정심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뿐이었기에,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던, 그러나 끝내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물론 원문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번역자는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의. 아마도 여기서 정의란 개인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로서의 정의라는 단어일 것이다. 피조물은 이 요구를 창조주한테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지만 그렇지 못했었기에 창조주를 찾아가는 것이다. 2019년의 지금은 정의는 누구한테나 당연시되는 권리다.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까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바이다.     


  1994년도의 케네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이 비판받아야 할 점은 여기에 있다. 20년 전인 1974년의 멜 브룩스는 <영 프랑켄슈타인>으로 프랑켄슈타인을 패러디한 작품을 내놓았다. 내가 본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작품 중 유일한 해피엔딩이다. 이것이 어불성설일지라도, 멜 브룩스의 패러디 버전이 호색하고 촌스러울지언정 그는 분명하게 알았다. 우리가 피조물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멜 브룩스의 <영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을 위해 프랑켄슈타인이 목숨을 바쳐 그를 구해낸다. 제임스 웨일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피조물은 정상적이지 않은 뇌로 살아난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이를 알고 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이야기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분명하게 의식되고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이 사실을 영화 속 대중 또한 받아들인다. 추측하건대 내가 메리 셸리라면 그 어떤 작품보다 멜 브룩스의 <영 프랑켄슈타인>을 소설<프랑켄슈타인>의 영화 버전으로서 훌륭하다고 말할 것이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걸작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플롯의 구성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구성은 닳고 닳도록 칭찬해도 부족하다. 복잡하다면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를 누가 듣고 있는 건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 소설의 시작은 윌턴이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우리는 그 외에도 수많은 편지들을 만나게 된다. 겹겹으로 된 액자식 구성이다. 이 구성이 놀라운 점은 시점 이동이며 이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독자의 위치에 관계된다. 극의 전반적인 내용은 프랑켄슈타인이 진술하는 내용이지만 그 내용은 윌턴이 듣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며, 극에 빠져들 때쯤 한 번씩 그걸 환기하며 진행한다. 

  P.69 그러고 보니 이야기의 흥미가 절정에 달한 대목에서 깜빡 설교를 하고 있었군. 당신 표정을 보니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셸리는 이야기를 진행해가며 듣고 있는 존재에 대해 그 존재성을 명확히 한다. 이 효과는 분명하게 독자가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읽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든다. 만약 이 소설이 프랑켄슈타인이 하는 이야기로만 구성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까? 아마 피조물에게 비애감이 서려 있긴 하겠으나 프랑켄슈타인 입장에서 인간 운명에 대한 고통스러운 입장을 더욱더 확고히 다졌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제일 바깥에 존재하는 플롯 자체에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열정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참사와 인간의 열망에 관한 이야기겠지만, 윌턴이 바라보는 시선과 독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한 시선으로 피조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착각한다. 과연 정말 그럴까? 이 복잡한 플롯은 계속해서 누군가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연민에 휩싸이던 윌턴은 프랑켄슈타인의 충고에 따라 마음을 다시 잡고 피조물을 악마로 대한다. 하지만 정말 독자는 윌턴과 같은 마음일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이 이야기가 윌턴이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윌턴의 편지를 읽는 것인데, 독자는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윌턴이 듣는 방식으로 들으면서도 윌턴이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듣는 것이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로 넘어갈 때 정확하게 윌턴이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독자는 읽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것은 윌턴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 경계가 무너져 버린다. 위에 제시한 69페이지가 그 예이다. 그런데 이 경계는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 본인의 이야기가 전부 끝난 후 배로 돌아와서 다시 발생하는데, 이 때문에 윌턴의 시선에서 빠져 나와 독자는 윌턴의 말과 행동을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위치는 윌턴이 아니라 새빌부인이다. 메리 셸리는 독자가 윌턴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피조물을 레비나스가 가르치는 철학의 이념대로 대하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으며, 수단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이다. 고통받는 얼굴은 대상 세계를 소유하려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나는 묻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은 피조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2018년 6월 제주도에 입국한 난민 사태에 대해 어떤 결과를 얻었는가. 500명이 넘는 난민이 제주도에 들어왔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국민 청원이 올라왔었다. 그리고 난민 반대에 70만 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당시 정부 지지율은 하락했고,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에서 난민 수용에 대한 찬성을 표명한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심한 질타를 받았다. 난민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하는 입장은 한결같다. 이슬람 문화권에서의 낮은 여성 인권을 경험했고, 일자리를 찾으러 온 가짜 난민이라는 점과 더 나아가 성범죄 및 강력 범죄의 위험이다. 

  P.132 기억하라, 당신이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력하게 창조했다는 것을. 내 키는 당신보다 크고, 관절은 더 유연하다.


  나 자신에게도 묻고 싶다. 나는 과연 피조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2017년부터 약 2년간 구로동에서 살았다. 집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대림동이 나왔고, 왼쪽으로 가면 가산동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중국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왼쪽으로 가면 헬조선이 느껴졌다. 시간은 그 간극을 좁혔다. 오전 6시가 되자 오른쪽엔 스타렉스들이 줄지어 있었고, 오전 8시가 되면 왼쪽엔 어두운 기색을 축 늘어뜨린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오후 5시가 되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술을 마시기 바빴고, 집에 가기 바빴다. 한쪽은 한국인이었고, 한쪽은 조선족이었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 똑같은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이미지. 새벽 3시 30분쯤. 그 이른 시각 출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두운 시각 그 동네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술에 취한 조선족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때 온몸에 신경이 곤두선다. 품 안에서 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상상. 도로변에 나가 택시를 잡고 있을 때 근처에 스타렉스가 서면 나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물러난다. 장기밀매에 대한 상상. 그 이미지들은 누가 심어준 걸까. 조선족 그들이 심어 놓은 이미지인가.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엄청나게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들의 이미지에 대한 기원은 굉장히 모호하다. 그들의 역사를 따라 찾아가도 그들의 이미지가 왜 그렇게 전락하였는지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대중의 의견은 조선족 이미지를 그들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선 난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생활이 길다 보니 그들은 실제로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는데 공조했다는 의견도 있다. 수원에서 일어난 엽기 살인 사건의 범인이 조선족이었다는 것, 대림동에서의 칼부림 사건, 심지어 대림동에는 칼과 그 비슷한 연장을 소지하고 있으면 신고 대상이 된다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던 적이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조선족 범죄율은 실제로 한국인 범죄율 보다 낮다. 보이스 피싱 하는 조선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장기밀매를 하는 조선족이 사용하는 은어는 인터넷에 퍼져있는 괴담이다. 그들이 홧김에 칼로 찌르고 도망간다는 이야기는 역시나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통계는 이런 행위들을 조선족보다 한국인이 더 많이 한다고 이야기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 중 조선족의 범죄율은 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범죄 도시>와 <청년 경찰>이 개봉했을 당시 시위를 했고, 이미지 개선을 위한 모임 또한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개개인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만들지 않기 위한 인식이 존재한다. 

  P.194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피조물처럼 내쳐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난민과 조선족뿐이 아니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자들이 아니라 여행객들만 봐도 우리의 태도는 상당 부분 달라진다.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국인은 인종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를 갉아먹고 있는 무언가는 분명하게 그들을 구분한다. 서울역, 명동, 홍대에 가면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외국인들 중 동남아인들과 서양인을 구별한다는 건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의견도 피조물의 의견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200년 전 이야기에서 현재의 사고방식을 기대하는 건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인간들은 어떠했길래 피조물이 인간과 같이 살 방법을 마련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을까. 피조물이 요구를 하지 못한 것은 이해한다. 그는 깊은 상처를 받은 존재다. 그렇지만 그가 나와 같은 피조물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을 때 프랑켄슈타인은 처음에는 승낙했고, 그다음 윤리적인 문제로 인해 거절했다. 거절하고 난 다음 프랑켄슈타인은 무책임했다. 이건 과학자로서 자신이 탄생시킨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된 도리로서 타자를 대하는 마음을 탓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피조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줬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피조물이 어떤 우연한 사고로 죽기를 바랐고,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은 한때 공격받았었다. 이타 주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에 대한 그 어떤 해결책도 줄 수 없다고. 그런데 다시 한번 레비나스를 불러들였다. 이 각박한 시대에 시작은 환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이야기한다면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건 타자 윤리다. 1818년 프랑켄슈타인은 죽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도 죽었고, 윌리엄이 죽었으며, 그로 인해 유스턴이 억울한 처형을 당했고, 앙리 클레르발이 살해당했으며, 엘리자베스와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마저 그 뒤를 따랐다. 이 모든 문제를 프랑켄슈타인의 잘못된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시작은 잘못된 욕망이었을지언정, 불행의 시작은 환대를 배우지 못한 인간들로부터 시작이다. 2015년 9월 2일 알란 쿠르디가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두 달 후 터키 해변에서 네 살 소녀 세나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폭격이 쏟아진 집에서 구조된 옴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그들은 피조물처럼 우리보다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의 어린 시절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인간과 같이 살 수 있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94년 작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에선 마지막 윌턴이 피조물에게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한다. 난 거기서 이 이야기의 희망을 봤다. 물론 피조물은 자살을 택했다. 어쩌면 우리가 손 한 번 내밀었을 때 그 한 번이 끔찍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우리 옆엔 항상 우리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길 바란다. 무더운 여름 누군가는 쪽방에서 선풍기 한 대 없이 지내고 있으며, 누군가는 굶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있다. 갑자기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구로동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해가 자신을 드러내기 전 하늘이 시원한 색을 품은 시간이었다. 60대는 되어 보이는 늙은 노부부가 컨테이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갈 준비를 했고, 할머니는 그걸 도왔다. 그 곁을 지나가는데 6살 정도 되는 꼬마 아이가 막걸리를 꼭 안고 뛰어와 할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그 집은 늦은 밤이 되면 문을 활짝 열어둔다. 더위에 잠을 잘 수 없어서 일 것이다. 그 길을 지나가면 그 집 안의 어둠이 보인다. 그리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면 고급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그 풍경에 역겨움이 몰려왔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들과 같은 처지의 어려운 분들을 돕는 방법은 많이 있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행하고자 한다. 아마 셸리는 피조물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 달라고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에선 피조물이 죽는 걸 시각화시켰지만 셸리는 암시만 하고 끝냈다. 그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피조물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할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독자들이 피조물에 대한 연민을 갖고 무언가 해야 할 때다.  


2019년 7월 어느 날.


협성문화재단 독후감 공모전에서 탈락으로 인한 수록.

글이 너무 영화관련적인 건지. 해석이 부족한건지. 문장력이 부족한건지. 아니면 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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