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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Oct 09. 2019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

  영화 속 세계라는 것은 현실과 같은 세계는 없다(고 생각 한다). 영화는 감독이 카메라로 찍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니까 현실과 가까이 있는 영화가 있고, 먼 영화가 있지만 현실과 같은 영화는 없다.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면 현실과 교집합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있지만 일치하는 영화는 없다. 하지만 현실과의 경계를 교묘하게 부수어 버리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계보는 최근의 경향은 아니다. <버드맨>은 그 계보에 속한다기보다는 그런 계보에 속한 영화들과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 편이 적당하겠다. 그렇다고 오해해선 안된다. 현실과 경계를 지워버렸다고 해서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구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하게도 스크린 속은 영화 속 세계이고 우리가 앉아 있는 좌석은 현실 세계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지적했듯 <버드맨>의 원제는 <Birdman Or>이다. 그러니까 Or은 부제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버드맨에 붙어 있는 것이다. 즉, <버드맨 또는>이 직역하면 우리나라 제목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붙어 있어야 할 명사는 무엇인가. 이 역시 이동진 평론가가 추론했듯 리건, 에디와 닉(카버의 연극에서 리건이 맡은 역할), 리건을 연기한 본인 마이클 키튼이다. <버드맨>은 분명하게 한때 잘 나가던 리건 톰슨이 잊힌 버드맨으로 전락하면서 다시 한 번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리건을 연기한 마이클 키튼의 현실 세계에서의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다. 즉, 마이클 키튼은 어쩌면 리건을 연기하면서 연기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건 상대적인 이야기다. 영화는 영화다. 마이클 키튼은 리건을 연기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세 가지의 층위를 인지해야 한다. 하나는 영화 속 연극, 그리고 영화, 그리고 현실. 이 세 개의 층위를 교묘하게 중첩시키면서 리건이 버드맨을 화장실에 처박아두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까지 보게 된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하는 건 과연 리건은 카버의 연극으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다. 리건이 다시 버드맨 시절로 회귀하고 싶었다면 카버의 연극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건은 분명하게 버드맨 시절을 그리워한다. 즉,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리건은 예술 작품 안에서의 배우가 되고 싶어 하며 버드맨을 그리워한다. 화려한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리건은 카버의 연극에서의 에디와 닉을 성공적으로 연기해야 한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롱테이크를 선택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영화가 하나의 쇼트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는 16쇼트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처음 세 쇼트 이후 네 번째 쇼트부터 영화는 1시간 43분까지 하나의 쇼트로 이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건 알레한드로 감독이 시작한 건 아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히치콕이 <로프>에서 먼저 선보였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필름이고, 지금은 디지털이다. 이 말인즉슨 당시엔 필름이라는 기술적 한계로 필름 한 롤을 다 소비하면 커팅이 이루어져야 했고, 지금은 그 시간적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물론 이 차이가 영화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분명하게 롱테이크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의 삶은 쇼트로 조각나있지 않다고 답했다.      


  롱테이크는 굉장히 많은 역사가 있다. 가장 단순하게는 시간과 공간을 분절시키지 않으므로 감정을 절단 내지 않고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설명이 있겠지만 그 외에도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죽은 시간을 찍어야 한다는 신념도 있고, 소마이 신지 감독의 롱테이크 자체가 영화 내외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기이한 테크닉이라는 영화적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감독은 우리의 삶은 조각나있지 않다고 답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리건을 쫓아가는 카메라가 리건의 삶이 조각나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보다 영화의 세계를 투사하는 스크린이 무대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까 이 카메라는 영화를 연극으로 위장하는 것에 공헌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느낌. 말할 것도 없이 리건이 카버의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는 분명 세트장일 것이고, 무대 뒤편에 있는 수많은 대기실들도 세트일 것이다. 리건이 팬티만 입고 뛰는 건 로케이션이라고는 하지만 실내 장면들은 세트장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세트장을 누비는 카메라는 세트장 자체를 무대로 만들어버리고, 인물들의 동선을 무대 위 인물들의 퍼포먼스로 보이게 한다. 심지어는 카메라가 영화와 연극을 교묘하게 건너다닌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게다가 편집 포인트를 보게 되면 몇몇 부분은 블랙으로 처리되어 있다. 분명 옥상으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디킨슨과 만나는 맥줏집으로의 입장과 퇴장은 연극에서 무대가 변경될 때 암전 되는 것과 같다.   

   

  만약 이 논지를 밀고 나가는 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영화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게 된다. 리건의 연극과 우리가 보는 리건이라는 영화 속 인물의 중첩, 카메라라는 연극과 영화. 그런데 리건은 마이클 키튼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층위가 더 존재한다. 그렇다면 형식 또한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할까? 너무 도식적이긴 해도 여기까지 밀고 왔다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착각해선 안되는 건 마이클 키튼의 층위는 현실이 아니다. 그건 현실에서 가져온 영화 세계의 일부분이다. 즉, 관객의 심리적 운동에 마이클 키튼이라는 배우의 이야기가 스크린 속에서 중첩되는 것이다.      


  영화 시작 후 3개의 쇼트를 제외하면 영화는 리건의 공중부양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건 주관적 쇼트다. 물론 이 영화가 통째로 한 쇼트로 보이기 때문에 쇼트를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지만 주관적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뉜다. 영화를 봤다면 누구라도 알다시피 리건이 초능력(?)을 부리거나 버드맨의 목소리와 형상은 분명 리건의 주관적 시점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리허설 무대에서 무대 위에 달아놓았던 장비가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난 일이다. 분명 떨어지기 직전에 리건은 천장을 본다. 분명 장비가 떨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한 것이다. 그런데 리건은 랄프에게 피하라고 경고하지 않는다. 혹, 그 장비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그 장비가 랄프에게 떨어지고 난 뒤 리건은 제이크에게 그건 자신이 한 것이라고 한다. 이건 망상이다. 처음엔 리건이 떨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리건이라는 인물에게 비호감을 느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리건이 알았다기보다는 리건은 천장에서 그 장비가 떨어지길 속으로 외쳤는데, 그 장비가 진짜로 떨어진 것이거나 혹은 떨어질 것 같은 장비를 보고 계속 떨어지라고 속으로 외쳤거나. 그러니까 리건은 장비가 스스로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리건이 자신의 초능력을 믿게 되는 계기(중의 하나). 어찌 되었든 그건 망상.    

  

  영화가 마이크를 등장시키는 건 인상적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알레한드로 감독은 삶은 조각나있지 않기 때문에 롱테이크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버드맨>의 롱테이크 기술은 분명하게도 시간을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 경과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그런 거엔 관심이 없다는 듯. 마이크가 섭외된 뒤 제이크는 스태프들에게 저녁에 마이크가 올 것이라고 전달한다. 그리고 쇼트는 끊기지 않고 마이크는 무대에 서 있고, 카메라는 마이크에게 다가간다. 시간이 지난 것이다. 시간을 감출 생각이 없는 롱테이크. 이건 이 자체로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게 만든다. 거기 있으면 안 되는 것이 거기 있다는 느낌이랄까. 마이크가 샘과 옥상에서 내려와 어느 공간에서 몰래 키스를 할 때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다가 아래 무대에서 프리뷰 하는 걸 보여준다. 그때 마이크는 여기(샘과 키스하고 있는 곳)에도 있고 저기(프리뷰 하는 곳)에도 있다. 그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그리고 연극에서도 불가능하다(물론 흉내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로 넘어온 카메라.      


  마이크는 첫 번째 프리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마이크의 술을 물로 바꿔놓은 것이 마이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프리뷰가 진행 중인데도 마이크는 배역에서 벗어나 리건에게 자신의 소품을 건드리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결국 리건은 무대에서 도망친다. 마이크는 무대의 모든 것이 가짜라고 소리 지르며 진실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실. 그것은 가능한가. 진실은 무엇인가. 다른 길로 빠져선 안된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이 영화가 연기에 대한 영화로 오해될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진실로 연기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크는 현실에선 발기부전증을 지니고 있지만 무대에선 발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즉, 현실에서 불가능한 걸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크는 발기부전 환자인가. 이 질문을 그대로 리건에게 적용해보자. 리건은 버드맨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리건인가 버드맨인가. 그러니까 영화 속 인물들은 영화 속 세계가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리건은 리건인데, 과연 그는 리건인가 버드맨인가. 어쩌면 이 질문이 리건을 지배하였고, 버드맨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프리뷰가 끝난 다음 리건과 마이크가 뉴욕을 걷는 장면은 잊을 수 없다. 그동안 비디제시스 사운드라고 생각했던, 영화 시작부터 귀를 때리던 드럼 소리가 디제시스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걸 목격한다. 리건은 지나가면서 드럼 치는 사내에게 동전을 던져준다. 그렇다면 위에서 한 질문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것일 수도 있다. 비디제시스의 디제시스화. 리건에게서 불러들이는 마이클 키튼. 이것은 또 한 번 존재한다. 리건이 디킨슨과의 썰전 이후 잠에서 깨어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는 드럼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 흐른다. 하늘을 날면서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 하지만 리건은 극장 앞에 도착하면서 문지기에게 음악을 끄라고 지시하자 영화 속 흐르는 음악이 꺼진다. 이건 비디제시스 사운드의 디제시스화라기 보다는 알레한드로의 리건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우리가 계속 지켜보고 있던 것이 알레한드로 감독의 창작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건이 순간 그 지휘권을 빼앗은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알레한드로의 장치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눈여겨봐야한다. 이후 같은 것이 반복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건은 버드맨을 화장실에 처박아두고 병실에서 날고 있는 새들을 본다. 그때 똑같은 선율이 흐르고 리건은 창밖으로 날아갈 준비를 한다. 그때 카메라는 시선을 옮기고 샘이 병실로 들어온다. 이미 리건은 창밖으로 날아올랐던지, 떨어졌던지, 둘 중 하나다. 한데 이때 음악이 멈춘다. 그리고 드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음악의 종료는 리건이 한 것인가. 알레한드로 감독이 한 것인가.      


  리건은 프리뷰를 계속해서 망친다. 망치는 과정에서 리건의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 사건들은 꼬여가고 망상증은 심해진다. 마지막 프리뷰를 망치고 난 뒤 디킨슨을 다시 만난 리건은 디킨슨에게서 심한 모욕을 받는다. 버드맨 슈트를 입은 연예인에게 일절 동정이 없는 디킨슨. 그에 응수하지만 리건은 인신공격만 할 뿐 그 말을 부정하진 못한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노골적으로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해 비판한다. 마이크의 캐릭터도 그러하거니와 디킨슨의 캐릭터도 그러하다. 게다가 리건이 연극을 올리면서 캐스팅을 하려고 할 때도 그러하다. 자본에 잡아먹힌 예술. 리건과 디킨슨의 썰전 그다음 날 목소리로만 들렸던 버드맨은 형상화된다. 그리고 버드맨이 원하는 일들을 이미지화 시키면서 리건의 망상증은 심해져만 가고 심지어 하늘을 난다는 망상까지 간다.      


  첫 공연까지 오면서 리건의 심리 상태는 점점 예민해졌음이 분명하다. 다시 버드맨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배우로서의 성공을 하지도 못할 것 같은 리건은 무대 위에서 쓸 소품용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다. 카버의 극은 추측하건대 에디와 테리의 사이에서 테리가 에디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선택하여 에디가 자살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랑받지 못하는 에디. 배우로서 재기할 수 없는 리건. 아마 자살을 결심한 순간 무대에서 리건과 에디를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경지를 맞이했을 것이다. 대본과 다른 제스처와 대사. 그건 리건의 몸짓인지, 에디의 몸짓인지. 그리고 무대 위에서 흐르는 실제의 피. 마이크의 진실은 어쩌면 리건이 보인 이 순간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절대 오해해선 안되는 건 훌륭한 연기는 결코 실제적인 게 아니다. 진실로 다가가는 그 과정이 연기(라고 생각한다)이다. 에디의 감정에 다가가는 리건. 그때 흐르는 실제의 피. 그렇기 때문에 디킨슨은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이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버드맨>의 부제.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예기치 않다는 것은 버드맨을 연기한 리건이 무대 위에서 이런 연기를 보여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고백일 것이고, 무지라는 것은 리건의 무지일 것이다. 배우가 지녀야 할 것을 지니지 못한 채 배우가 된 리건. 아마 리건이 무지하지 않았더라면 실제의 피는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미덕. 그건 분명 리건의 예술적 연기.      


  <버드맨>이 개봉했을 때 많은 해석들이 돌아다녔고, 지금 나무 위키에 검색해봐도 5가지로 나뉜 해석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장면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리건의 주관적 시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그 음악은 리건의 주관적 사운드가 되는 것이고, 드럼 소리가 들리고 샘이 들어오는 것 또한 그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추론이다. 어쩌면 리건은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분명 리건의 상태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랬다면 샘이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건이 무대에서 자살시도를 한 뒤 괴물 같은 롱테이크는 끝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서트 쇼트들 중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추락하는 이미지와 해파리들 근처에서 잠시 쉬어가는 새들이다. 해파리라는 죽음의 이미지. 리건은 해파리에 물려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는 시간을 인서트 쇼트가 채운다. 그리고 리건은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병실에서 리건은 날아가는 새를 본다. 다시 도약한다는 것. 그건 어쩌면 상징적 결말일지도 모른다. 모호한 추론만 가능하게 하는 결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즐기면 될 것이다. 나는 리건이 샘의 그 표정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음악이 꺼졌기 때문에.     


   2019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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