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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Oct 15. 2019

마이크 리의 <세상의 모든 계절>

  마이크 리의 작업 방식은 굉장히 독특하다. 시나리오 없이 배우들을 만나 캐릭터를 구축한 뒤 그 캐릭터들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지 묻는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시나리오 작업을 해나가는 방식이다. 자료조사를 많이 했지만 아직까지 더 디테일한 작업 방식은 알 수 없다. 처음에 착각했던 것은 배우들과의 캐릭터 구축 과정에서 배우들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희미한 윤곽을 그려놓고 배우들을 만나는 방식인 것 같다. 물론 개별 영화들에서 이 작업 방식이 디테일한 부분까지 공통적으로 적용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크게 봤을 때 이러한 작업 방식을 매번 활용한다고 한다. 즉, 배우들 스스로의 전사를 가지고 캐릭터를 구축하든 마이크 리가 그려온 희미한 캐릭터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이든 마이크 리의 작업 방식은 전적으로 배우 의존적인 작업 방식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마이크 리 영화의 핵심 요소로 보인다. 물론 마이크 리의 영화를 다 보진 않았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세상의 모든 계절>과 <비밀과 거짓말>에서는 그러하다. 두 영화 모두 배우의 연기가 상당히 훌륭하고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기 때문이며 마이크 리의 카메라는 캐릭터에 봉사하는 것 외에는 거의 그 기능을 하지 않는다. <비밀과 거짓말>에선 편집 자체가 어떤 기능을 했지만 <세상의 모든 계절>에선 편집 또한 가려놨다. 이건 마이크 리가 자신의 영화를 돌아보면서 편집이 드러내는 어떤 효과에 대해 자신의 의도가 가려진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혹, 아직 마이크 리의 전편을 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계절>에서만 편집을 지우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비밀과 거짓말>, <네이키드>,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보면서 <네이키드>는 마이크 리의 야심작이자 번외작같은 느낌이라면 <비밀과 거짓말>과 <세상의 모든 계절>은 마이크 리 영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그를 설명하는 몇 가지 요소와 내가 본 것으로 추측한 내용이기 때문에 마이크 리의 전편을 본다면 달라질 수 있는 내용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보면서 당혹스러웠던 것은 봄의 챕터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환자 자넷을 보게 된다. 영화는 마치 자넷을 따라가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넷을 진찰하는 타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타냐가 의사라고 알려주는 쇼트만 제시되며, 이후에는 타냐의 얼굴보다 타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난 뒤 타냐의 얼굴이 나오고 타냐는 제리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다시 등장한다. 이 사이에 톰과 제리 부부의 주말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과 지질학자 톰을 소개하는 장면이 끼어 있지만 우리는 맨 처음 본 자넷이 다시 등장한 순간,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찾아오길 바란다고 제리가 말한 순간 우리는 자넷이 다시 찾아와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무너진다. 첫 장면을 제외한다면 부부인 톰과 제리를 소개하고 난 뒤(톰과 제리가 아닌 부부 톰과 제리다) 지질학자 톰을 소개하고, 정신 상담사 제리를 소개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장면 때문에 정신 상담사 제리를 소개하는 장면이 자넷의 장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이 영화의 전략이다. 우리는 톰과 제리의 동선을 따라가지만 이 영화가 마치 메리의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메리의 동선은 끊어져 있으며, 우리는 메리를 보는 시간은 거의 대부분 톰과 제리의 집에서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챕터 여름을 다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챕터 여름이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건 톰의 친구 켄이다. 켄이 톰과 제리의 집에 도착하면서 여름 에피소드가 시작되는데 역시 이 에피소드도 메리가 그 중심에 서있다. 봄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자넷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 여름이 끝나자마자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시키는지 알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시간 순으로 늘어뜨리고, 톰과 제리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 동선에 끼어있는 메리의 감정적 운동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서사의 전략이 이 영화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느끼는 어떤 감정은 분명 이 지점에서 나온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이 영화가 대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은 대사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대사들 때문에 영화를 못 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고 느낀 건 대사가 어떤 서사를 진행시키지도 않고 엄청난 정보를 주지도 않는다. 그 대사가 위치한 곳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영화 속 인물들의 정보들이다. 메리는 조가 10살 때부터 알고 지냈으며, 언젠가 유부남한테 속아 넘어갔고, 지금은 작은 월세방에 산다는 것들 같은. 혹, 이런 정보로 기능하지 못하는 대사들조차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챕터 여름에서 메리가 등장하여 횡설수설 대는 것들처럼. 켄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렸을 적 친했다는 사실과 지금 켄은 늙는다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런 대사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영화적 기능을 하는 것들을 전부 흐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톰과 제리의 집에 오는 인물들은 모두 삶에서 무언가 결핍된 인물들이고, 톰과 제리 그리고 조는 이상적인 가족상이다. 하지만 마이크 리는 이들을 비교하면서 무언가를 끌어낼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물들 간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톰은 정신 상담사이고, 조는 인권 변호사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고객과의 관객에서도 우위에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그들의 위치는 동일하다. 상담을 받기 위해 그들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이 앞에 앉아 있고, 톰과 조는 각자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앉아있다. 톰은 어떠한가. 난 영화의 초반부 톰을 소개하는 장면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톰의 장면도 분명 기능을 한다. 톰은 지질학자이지만 공학 지질학자라고 소개된다. 즉, 그 땅이 건물을 짓기 적합한지 평가하는 직업이다. 조금 멀리 있지만 톰도 무엇을 평가하는 직업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차이를 드러내놓긴 하지만 그 차이를 희미하게 만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영화 속으로 들어와 기능하지 못하는 어떤 설정들. 톰과 제리, 그리고 조는 문제가 있는 메리와 계속해서 만난다. 그리고 거기에는 켄과 로니라는 인물들이 끼어들면서 기이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게다가 톰과 제리는 주말마다 농장에서 채소들을 기른다. 이들은 무언가를 돌보는 사람들이다. 조는 이 땅을 상속받을 상속자인 것도 대사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떤 차이만을 드러낼 뿐 그 어떤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요소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지고 머릿속에서 잊혀간다. 마이크 리는 배우들과 캐릭터 구축을 하면서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비교되는 인물들을 그 자리에 놓고 만나게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마이크 리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자신이 67세가 되면서 느끼는 어떤 것들 때문에 이 영화를 찍었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메리의 삶은 불운한 삶의 연속이었다. 메리를 소개하면서 또 희미한 장막을 쳐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메리의 차다. 메리의 차는 메리의 인생을 요약해놓은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차를 적은 돈을 주고 샀다고 기뻐하며 그 차를 끌며 다니다가 조금씩 망가지고 결국은 샴페인 한 병 가격에 팔아넘긴다. 메리의 인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은유 또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선 어떤 요소가 등장한 뒤에 그 요소들로 전개시켜나가지 않고 주위를 휘감아놓기만 한다. 맴도는 요소들이 와류가 생겨 어느샌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그 운동감각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순간은 분명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이다. 그런데 메리가 조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이 영화가 유일하게 전개시키는 어떤 사건이다. 물론 그렇다고 메리와 조의 관계를 두고 관습적으로 진행시키진 않는다. 다만 아주 희미한 설정들에 비해 이 설정은 전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케이티가 등장하고 난 뒤 메리가 실망 가득한 얼굴을 했을 때 메리는 진심으로 조와 남녀의 관계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부담스러운 제스처들이 실망스러운 제스처로 바뀌는 순간. 메리는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본인이 하는 자신의 평가와 현실 속 위치와 평가에서 오는 괴리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은 늙은 독신 여성. 알코올 중독자.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으며, 남에게 민폐만 끼치는 여자니까. 그러나 영화는 메리 스스로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고 보여준다.       


  만약 이 영화가 메리를 주인공으로 정해놓고 메리의 동선을 따라 감정을 따라갔다면 어떤 영화가 되었을지 생각해봐라. 마이크 리는 톰과 제리의 동선을 따라가며 메리의 감정을 엿보는 방식을 취했다. 이 차이는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운동성에 대한 차이다. 즉, 메리와 동일시되며 그 감정을 느껴보는 것과 톰과 제리의 동선을 따라가며 불청객 메리를 보면서 메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착각을 했을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건 이 영화의 성취다. 관찰자 시점의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메리의 클로즈업을 수없이 봤다. 메리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카메라는 메리를 버려두고 톰과 제리를 쫓는다. 우리는 불청객 메리와 불행한 메리를 계속해서 쳐다보게 된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메리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런 행동들을 하게 되는 원인들을 추측할 수 있는 정보를 갖고 있는 데다 그 불쌍한 여인의 감정을 엿보는 우리는 양가적 감정을 지니게 된다. 우리 곁에 한 명쯤은 있지 않은가. 불편하면서도 불쌍한 누군가. 강조하고 싶은 건, 그래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건, 그들 스스로도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챕터 겨울에 가서 제리는 메리에게 상담을 받아볼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메리는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자넷처럼. 자넷과 메리를 겹쳐놓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에 메리와 자넷 같은 인물이 많아서일 것다. 분명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자넷도, 켄도, 로니도, 메리도. 자넷이 이혼한 것과 딸들이 자넷을 떠난 건 자넷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켄이 늙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로니의 아내가 떠난 것도 자연의 순리다. 메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늙는 건 순리이며, 거기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은 메리 스스로가 원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유부남한테 속아 넘어간 건 그녀의 탓이 아니다. 삶은 항상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삶에 다가가지 못하고 추락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건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거스를 수 없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그다음은 겨울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건 영화가 그렇게 하고 있어서다. 영화는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봄이 끝나고 여름이 위치한다. 부부 톰과 제리가 그 순리에 따라 농장을 가꾸는 것처럼, 현세는 그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 이 순리가 무서운 건 매번 반복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연은 기계가 아니다. a를 넣어서 b가 나오는 기계는 a를 넣으면 무조건 b가 나온다. 작년에 토마토를 100바구니를 거둬들였어도 올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메리는 제리가 될 수도 있었다. 혹, 제리는 메리가 될 수도 있었다. 켄은 톰이 될 수 있었고, 그 역도 가능하다.      


  이 영화는 자넷으로 시작해서 메리로 끝나는 영화지만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해서 생명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또는 봄에서 시작하며 겨울에서 끝나는 영화라고. 그렇다면 자넷에서 시작하여 메리로 끝나는 건 거스를 수 없음인 건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톰과 제리가, 혹은 메리가 어떤 변화를 겪는 걸 보지 못한다. 영화가 시작했을 때와 끝났을 때 주요 인물들의 상태는 제자리걸음이다. 물론 변화는 겪었지만 결과는 시작과 똑같다. 톰과 제리의 가족 사이에 끼어 있는 메리. 차가 없던 메리. 남편이 없던 메리. 외로운 메리.      


  진부한 답변이긴 하지만 마이크 리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관객이 느끼는 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식탁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주위 인물들을 훑다가 메리에서 멈춰서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그 마지막 쇼트의 마지막 프레임에서 묵직한 무언가로 맞은 느낌이 든다. 그 감정은 도대체 어떤 감정일까. 아마도 그건 톰과 제리의 시선에서 메리의 감정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닿는 무언가가 아닐까. <비밀과 거짓말>의 마이크 리보다 <세상의 모든 계절>의 마이크 리가 더 대단한 건 이 지점이다. <비밀과 거짓말>은 분명하게 우리 세상에 대한 마이크 리의 시선이 담겨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계절>은 우리 세상에 대한 마이크 리의 시선이 흐릿한 채로 보인다. 그건 그의 작업 방식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직조해내거나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그 자리에 세워둠으로써 성립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랬을 때 그 희미함 들을 거치면서 우리 인생에서 느낀 감정들을 영화를 바라보며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분명 이 영화는 흐릿한 이미지들로 미세한 바람이 불 듯 진행되지만 인생이란 것이 분명한 게 어디 존재하기나 했는가. 지나가면 흐릿해지는 것이 인생이고 영화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마이크 리의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다.      


  2019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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