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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Apr 07. 2021

구로사와 기요시의 <지구의 끝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각 잡고 봤던 시절이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 당시에도 구할 수 없었던 영화들로 인해 사정상 건너뛴 영화들이 여러 편 있었다. 나름 꾸준히 따라왔지만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보지 못했다. 얼마 전 <스파이의 아내>를 보고 나서야 <지구의 끝까지>의 존재를 알게 됐다. 나는 희한하게도 좋아하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다. 어렸을 때 출시 예정인 비디오 목록을 보고 호들갑 총량을 다 소진해 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가 상영되는지 흥미가 가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 나온 영화들 중 봐야 할 영화들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한 것도 몰랐다. 혹은 잊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몰랐었다고 답하면 누군가가 호들갑 떨며 나에게 이야기했던 영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난 이번에 <지구의 끝까지>를 봤고, 이 이상한 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지만 분명하게도 갸우뚱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물론 그 점은 아마도 우즈베키스탄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충무로에서 활동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스스로도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충무로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희미하지만 알 것도 같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산업적인 타협뿐만 아니라 영화적 자의식 또한 타협해야 한다. 하지만 그 타협은 산업적인 타협처럼 연출자가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에선 어떤 성향의 영화들이 가능해 보인다. 일본 영화인들은 한국을 부러워하지만 난 전혀 공감할 수 없다. 한국엔 포스트 세월호가 없다. 2014년 이후 한국 영화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작년은 코로나의 여파가 큰 문제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한국 영화 리스트였다. 재작년에 <기생충>과 <벌새>가 없었다면 작년이랑 비슷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무수히 많은 포스트 3.11에 관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올해와 내년에 포스트 코로나에 관한 영화가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기대하지는 않는다. 고작해야 저급한 좀비 영화나 찍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지구의 끝까지> 역시 나는 포스트 3.11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 본인이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라고 밝힌 까닭은 아마도 영화를 직업으로 삼아 만든다는 생각이 확고한 듯하다. 난 그 말을 믿는다.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마 환경은 열악했을 것이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타협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자의식만큼은 여전히 분명하다. 영화의 시작은 그의 영화답게 시작한다. 카메라가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어른과 아이를 실루엣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가 패닝하면 아직은 알지 못하는 요코라는 여성이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여기서 우즈베키스탄인과 일본인은 영화로 연결되어 있지만 벽으로 가로막혀 있으며 언어의 장벽은 넘어서지 못한다. 요코는 립스틱을 바르고 난 다음 프레임 왼편으로 빠진다. 왼쪽의 방향성이기 때문에 다음 쇼트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요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니까 가장 기본적인 연결 편집이 어긋나고 있다. 세 번째 쇼트에서는 왼편으로 움직이고, 네 번째 쇼트에선 오른 편으로 움직인다. 역시 이 두 쇼트도 앞의 두 쇼트와 같이 어긋나는 편집을 보여준다. 이건 실수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 방향성은 요코가 향하는 길이 어긋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에 이 동선을 보고 의아했지만 요코가 길을 잃었다는 것이 후반부에 설명되고는 이해가 됐다. 요코는 밖으로 나와서 촬영팀이 자신을 두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즈베키스탄 사람의 도움으로 요코는 촬영 현장에 도착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부분 영화에는 그의 도장이 찍혀있는데 요코가 촬영장에 도착하자 연출자와 조감독(혹은 PD로 보이나 영화와 방송에서 PD의 개념은 다르기 때문에 애매하지만 편의상 조감독이라고 칭하겠다)과 연출부 막내의 모습이 보인다. 기요시는 여기서 요코의 도착을 롱샷, 롱테이크로 찍었다. 요코의 동선에 따라 카메라가 따라가면 우리는 테무르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산책하는 침략자>에서도, <큐어>에서도, 그리고 굉장히 많은 영화에서 우리는 이 성질의 쇼트를 보게 된다. 그들만 있는 줄 알았지만 쇼트가 지속되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새로운 인물이 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 공간은 관객이 인지하던 공간이 확장되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기요시가 이런 연출을 하는 것은 한 편으로 영화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묻어있지만 다른 영화는 다 뒤로하고 이 영화만을 놓고 보자면 여성 요코와 남성 연출팀들 사이에서 테무르는 남성이긴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며 그는 중재의 역할을 짊어지고 있다. 요코의 동선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면 테무르가 프레임 끝에 모습을 드러내고, 연출팀의 부름에 프레임에서 밖으로 나간다. 요코는 영화 시작부터 소외되어 있다.      


  요코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요코의 출발 위치에서 바라보지만 카메라는 요코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 요코를 찍는다. 처음에 이 쇼트는 단지 요코가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표정으로 읽었다. 하지만 이러한 쇼트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마주하면서 마치 요코가 어떤 상태인지 우리에게 알려줌과 동시에 때때로 도대체 어떤 감정 혹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만날 때는 그 쇼트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시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는 후반부에서 왜 그 쇼트들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요코는 적당한 위치에 서서 우리가 보던 요코와는 다른 리포터 요코로 변신한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가 보는 카메라와 방송용 카메라 사이를 번갈아 보여준다. 이 역시 다분히 의도적이다. 위에 이야기한 요코의 기분을 보여주는 쇼트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역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우리는 요코가 여자이기 때문에 방송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요코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어부의 말을 믿는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조차 알 수 없다. 영화는 그 순간 요코의 뒷모습을 찍었다. 우리는 요코의 감정을 유추할 뿐 결코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음 장소인 도시의 식당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조감독이 흥정하는 장면을 보는 요코의 표정이 어떤 기분인지 알기 힘들지만 카메라는 가만히 서서 요코를 지켜본다. 무엇보다 이 장면에서 장비를 들고 들어가는 정면 쇼트에서 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가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사이 카메라가 패닝하면서 유심히 요코를 지켜보는 쇼트가 삽입됐다. 우리는 그 순간 역시 요코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요코가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는 뒤로 빠져버린다. 즉, 어부의 여성 혐오 발언과 같이 식당 안에서 익지 않은 쌀을 먹는다고 대답할 때도 카메라는 요코의 뒷모습을 찍는다. 하지만 연출자의 카메라는 항상 요코의 앞에 있다. 물론 방송에서는 뒷모습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매체의 성격에 맞지 않을 것이다. 요코의 말대로 운이 안 좋게도 촬영이 끝난 후에야 장작이 도착한다. 요코를 제외한 스태프들은 잘 익힌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맛본다.      


  호수에서의 시퀀스와 식당에서의 시퀀스를 보면서 도대체 구로사와 기요시가 무엇을 찍으려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호텔에 돌아와서 남자친구와 연락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그리고 시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요코는 자신이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촬영팀과 같이 행동하기 싫었을 것이고, 자기 나름대로의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를 펼치고 시장을 찾아 방문했다고 본다. 하지만 시장은 생각과 같은 장소가 아니었고, 결국 구멍가게에서 요깃거리를 살 뿐이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순간은 4분의 1지점에서 염소와 마주친 순간이다. 이 순간 마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봐야 하는 그 엠비언스가 굉장히 스산하고, 신비롭다. 동굴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 요코는 그렇게 염소와 마주한다. 이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게 촬영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보면서는 알아차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이 염소가 얼마나 중요한 매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코는 숙소로 돌아와서 구멍가게에서 사 온 음식(?)을 먹다가 식당 아주머니가 건넨 음식을 먹는다. 우리가 보기에도 식당 아주머니의 음식이 훨씬 맛있어 보인다. 요코는 시장에서 호객행위에 당하고, 시선을 불편하게 여기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우즈베키스탄 사람 덕분에 촬영장에 갈 수 있었고, 그들은 배려를 보여줬다. 요코는 남자친구가 연락이 되지 않자 휴대폰을 베개피에 넣고 끌어안는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요코를 유일하게 대해주는 것은 핸드폰이다.     


  유원지의 시퀀스가 시작되면 우리는 기이한 장면과 마주친다. 360도를 도는 놀이기구.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극심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첫 번째 시퀀스인 호숫가에서 촬영이 실패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연출자가 분명하게 사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간신히 호숫가 소개 장면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거짓말을 통해서 촬영 분량을 확보한다. 요코의 연기와 위장약이 없었다면 아마 이 역시 촬영 분량 확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원시 시퀀스에서는 요코의 위험이 촬영 분량 확보에 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TV 방송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패 -> 거짓말 -> 위험 감수 등. 샛길로 빠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영화 몇 편과 드라마 몇 편을 하면서 실제로 위험 감수의 사례는 수도 없이 봤다. 아무튼 혈압이 올라가 혈관이 터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데도 조감독은 무시한다. 이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문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 영화에서 일본인 혹은 우즈베키스탄인들 둘 중 어느 편에 서고 있지는 않다. 다만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해 그저 제시할 뿐이다. 이 시퀀스의 불편함은 어쩌면 우리가 보고 웃는 방송 시스템의 이면을 목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요코의 비명 소리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가 도망칠 방법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요코는 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에서, 거기에는 해야 한다가 깔려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면 우리는 촬영할 분량을 확보하지 못해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요코는 그 순간 염소를 풀어주는 장면을 찍자고 제안한다. 이상하게도 스태프들은 모두 동의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아니, 여기서는 시간을 죽치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 동의의 순간 요코의 시선과 조감독의 시선을 엇갈려 붙여놨다. 이건 의도적이다. 왜냐하면 요코의 제안에 조감독이 답변한다. 그러니까 둘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야 한다. 하지만 요코는 왼쪽을 보고 제안하는데(우리는 그곳에 조감독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다음 쇼트의 조감독은 왼쪽을 보고 답한다(오른쪽을 보고 답해야 한다). 그리고 명백히 그다음 쇼트인 요코는 여전히 왼쪽을 보고 이야기한다. 시선을 어긋나게 편집한 것이다. 여기서의 어긋남은 요코의 제안이 갖고 있는 의도와 조감독이 갖고 있는 의도가 분명하게 다름을 표현한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요코가 설명하면서 미디엄 쇼트(허리 정도)에서 바스트 쇼트(가슴 정도)의 쇼트로 이어진다. 대학교 1학년 때 배우는 편집 원리. 앵글이 변하지 않으면 두 사이즈 이상 사이즈 변화를 해야 한다. 이 순간 우리는 계속해서 요코를 관찰하던 카메라가, 무언가 알 수 없는 요코를, 요코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그 순간 우리의 착각은 요코가 자신의 답답함을 염소에게 투영하여 염소를 풀어주면 자신의 답답함이 풀어질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요코와 함께 염소를 풀어주러 향한다. 여기서 굉장히 이상한 쇼트와 마주친다. 염소를 발견하는 쇼트에서 우리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스태프들이 염소 울타리에 모여들면서 카메라는 하늘에 위치한다. 어떤 에러가 있어서 이 쇼트가 삽입된 것일까? 다만 그다음 쇼트는 요코가 염소를 발견한 충분히 멀리 떨어진 쇼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다음 쇼트는 하늘에서 틸 다운하면 요코가 보이는 쇼트다. 그러니까 이 시선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편집으로 만들진 않았지만 분명 이상함을 느끼고 난 다음 다다음 쇼트가 하늘인 점이 여기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요코와 스태프들은 수컷 염소 오쿠를 데리고 평야로 향한다. 처음에는 도식을 피하려고 오쿠를 남자로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난 요코가 오쿠를 풀어줌으로써 답답함에서 해방됨을 느끼는 그런 상징적 해석을 피하기 위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왜냐하면 우리는 요코가 답답하다고 느낀 것을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우리가 봤던 것은 동료들이 요코를 소외시키는 것과 알 수 없는 요코의 표정 쇼트들뿐이다. 오쿠를 풀어주자마자 우리는 오쿠의 주인이었던 여자가 오쿠를 다시 잡아가는 장면을 목도한다. 이 순간 이 방송 분량도 우리는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쿠의 주인이었던 여자가 촬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연출자는 요코를 찍지도 않는다. 오쿠의 전 주인은 자신들의 풍습을 마치 야만적으로 대하는 것에 지적한다. 기요시는 이 순간마저도 애매하게 만들었다. 조감독은 돈으로 해결하고, 그녀는 돈을 받고 떠난다. 난 이 순간의 쇼트가 감동적이었다. 모두가 사라지고 요코와 오쿠가 남은 익스트림 롱 쇼트. 세상의 둘만 남은 이 쇼트. 여기에는 얼마 사용되지 않은 음악이 더해진다. 요코의 마음은 외롭게 묶여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오쿠를 풀어주고 싶었을 뿐이지만 조감독은 방송 분량을 채웠으니 상관없고, 전 주인은 풍습대로 행동했을 뿐이며 돈에 매수됐다. 이 주변 존재들이 사라진 그 순간을 와이드 쇼트로 찍었을 때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탓일까. 이 영화를 절반으로 나눈다면 여기서 1부가 끝난다.      


  요코와 촬영팀은 도심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심에서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는다. 요코는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그래도 터지지 않는 와이파이로 인해 다시 방으로 내려와 편지를 쓴다. 하지만 그다음 장면이 이상하다. 요코는 로비에서 남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테무르에게 이야기한다. 물론 메시지를 보내진 못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메시지를 보내는 내내 요코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 순간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한 건 이 장면이 왜 들어갔는지다. 아마도 구로사와 기요시는 요코가 가족과 거리가 있으며, 남자친구가 도쿄 만에 있는 소방수라는 사실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굉장히 이상한 것은 결혼이라는 문제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 등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테무르는 바다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건 육지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본은 섬나라다. 매번 그들을 욕할 때 섬이 가라앉으라는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공포에 젖어있고, 쓰나미의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 게다가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은 3.11 대지진. 요코는 일본인이기에 바다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난 다음 요코는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음악 소리를 듣고 나보이 극장에서 노래를 듣고, 자신이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이 신비로운 장면은 마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나보이 극장을 찍는 것처럼 보인다. 요코의 귀가 들을 수 있는 것도 말이 안 되거니와 그 안으로 들어갈 때 마치 분리된 세계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찍었다.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점점 음악 소리는 커진다. 가끔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상하리만치 불균질한 장면들을 설계하고 이어붙인다. <도쿄 소나타>에서 강도 시퀀스가 그 예라면 이 영화에서는 갑작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요코의 장면이 그러하다. 요코는 숙소로 돌아와 쓰러지듯 눕는다. 연출부 막내는 요코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는 불 보듯 뻔하지만 이 환상이 위치한 순간이 왜 이곳인지가 중요하다. 외로운 요코. 분명 요코는 오쿠를 보고 외로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건 자신이 외롭기 때문에 외롭게 보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 베개에 핸드폰을 넣고 끌어안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그 핸드폰이 작동되지 않는다. 와이파이의 연결 상태로 인해 핸드폰은 남자친구의 말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울릴 수 없는 촬영 스태프들, 아무도 없는 우즈베키스탄이란 공간. 우리는 그 순간 요코가 위로받을 무언가가 필요했으며 그 순간 그 장면이 들어갔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 장면 아침 식사는 영화의 키를 쥐고 있는 장면이다. 요코는 이 장면에서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뮤지컬 배우라고 고백한다. 이 순간 모든 것이 풀린다. 연출자는 리포터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지만 요코는 리포터는 반사 신경이 필요하지만 노래는 감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요코의 감정이 어떤지 지켜보는 쇼트들을 마주했었다. 그건 요코가 하고자 하는 일과 다른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었을 것이다. 요코는 그 괴리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일본에는 단 한 사람인 남자친구 료타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요코가 우즈베키스탄에서 그 어떤 일본인 친구와 연락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요코는 우즈베키스탄의 경험으로 오디션을 보기로 결심한다. 무슨 노래를 부를지도 결심한다. 연출자는 노래를 들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요코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답한다. 그 순간 우리는 앞서 봤던 쇼트와 비슷한 쇼트를 본다. 미디엄 쇼트에서 바스트 쇼트를 바로 붙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디엄 쇼트에 연출자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요코는 염소에게 느꼈던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우리가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요코가 그럴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연출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거짓말을 한다. 요코를 찍는 일이 재미있다고,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게 거짓말인 이유는 두 가지다. 이다음 장면 수족관으로 넘어가면 첫 쇼트가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다. 그다음 쇼트는 요코다. 그 순간 우리는 도대체 방송용 카메라로 누가 물고기를 찍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촬영하는 사람은 연출자로 유추되는데 세 번째 쇼트에서 후경에 아주 작게 드러난다. 연출자가 찍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요코를 찍는 게 재밌다던 연출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출자는 다른 것을 찍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연출자가 찍고 있는 요코가 리포터 요코일 뿐이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요코를 찍었던 것은 기요시의 카메라다. 연출자는 단 한 번도 연기하지 않는 요코를 찍은 적이 없다. 다큐멘터리란 연출자가 찍는 리포터 요코를 찍는 매체가 아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모든 의문점이 순식간에 풀린다.      

  수족관에서 찍고자 하는 장면을 찍지 못하자 촬영팀은 곤경에 처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포지션과 인물 동선을 보고 역시 베테랑 연출자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첫 비트에서의 인물 포지션을 보면 결정권을 갖고 있는 연출자와 조연출은 가운데 배치되고, 양 사이드에 요코와 연출부 막내가 배치된다. 테무르는 전경에서 이동하는 동선을 갖는다. 테무르가 나보이 극장을 가보는 게 어떤지 제안을 하자 결정권자들 위치에 서게 되고, 테무르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는 테무르가 나보이 극장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설명하면서 요코를 비추는데 이는 요코가 간 극장과 동일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설정 쇼트로 카메라가 빠지면 연출부 막내가 소외되고, 4인이 중심이 되는 쇼트로 바뀐다. 이 역시 현재 진행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도다. 테무르가 자리에 앉으므로 이야기가 2차 세계대전 때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고 나서 테무르 중심 쇼트와 일본인 4명의 상대 쇼트로 진행된다. 이 카메라 위치를 잡는 것만으로도 촬영을 해 본 사람이라면 힘들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테무르가 일본인을 존경한다고 하는 순간 정확하게 일본인 남자 3명의 쇼트로 바뀐다. 이건 테무르가 존경하는 이유와는 반대되는 인물들이다. 이 쇼트는 정확하게 부끄러운 쇼트다. 나보이 극장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대사와 정확히 요코의 쇼트와 맞물린다. 요코도 그 극장을 갔다 와서 자신이 뮤지컬 배우가 하고 싶다는 것을 고백한다. 조감독이 방송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면서 자리를 뜬다. 연출자와 막내, 요코는 가고 싶은 눈치다. 그래서 4:1 구도가 된다. 요코가 이야기를 이끌면서 요코의 중심으로 장면이 진행된다. 다시 설졍 쇼트가 되면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며 조감독과 감독의 대결 구도로 바뀐다. 그리고 나보이 극장에 가는 것으로 장면이 종료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은 나보이 극장에 가는 것으로 분명히 종료되었는데 왜 다음 장면이 나보이 극장이 아니라 시장 장면으로 이어지는가이다. 이동하는 장면인 차 안에서 조감독의 허락으로 요코에게 카메라를 넘기는 것 말고는 아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나보이 극장에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촬영 분량을 확보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분명히 수족관 앞에서 더 이상 촬영할 분량이 없어서 막막한 이들을 보지 않았는가.      


  아무튼 요코와 촬영팀은 시장을 배회한다. 그리고 모두가 보았듯이 요코는 촬영 금지 시설을 촬영하고, 경찰의 질문에 압박감을 느끼고 도망친다. 경찰은 단순히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하지만 경찰에 잡히고 난 다음에서야 요코는 그 사실을 느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미 소통은 불가능하다. 이 조사 장면에서 조명은 점점 어두워진다. 마치 어두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듯. 그리고 소통의 불가능이 요코 개인에게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형광등을 켠다. 요코는 거듭 사과를 한다. 요코 개인의 문제이지만 그 개인의 문제를 파고들면 과연 개인의 탓인 것일까. 결국 인간은 세계의 산물이다. 요코는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도쿄 만에 화재가 났다는 사실을 뉴스에서 접한다. 그리고 많은 소방수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접한다. 요코는 남자친구 료타에게 연락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 새벽이 되어서야 우리는 요코의 전화가 울리는 것을 보게 된다.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 호텔 방이었는데 어떻게 연락이 닿게 된 걸까. 물론 이 논리적 허점을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풀 생각은 없다. 어쨌든 요코는 남자친구 료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다행. 살아남은 자는 다행스러운 것이 분명하다. 그건 다행이다. 하지만 그 다행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겐 뼈아픈 말일 수도 있다. 이따금 조명이 요코의 얼굴에 비치기에 표정을 볼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시간은 어둠으로 인해 요코의 표정을 볼 수 없다. 암흑 속의 다행. 뼈아픈 암흑. 일본 사람들은 그 암흑을 겪은지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요코는 우즈베키스탄에 남아 남은 촬영 분량을 찍는다. 여전히 신비로운 존재를 촬영하기를 원하지만 요코가 남아서 보는 것은 저 너머 산에 돌아다니는 오쿠(라고 추정할 수 있는 염소)이다. 신비로운 존재.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쿠는 살아남았다. 그 순간 요코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감정 상태가 된다. 그녀가 그 순간 부르는 노래는 사랑의 찬가. 결국 우리가 찾는 믿음은 사랑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의 엔딩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분명 외계인은 지구 침략이 3개월 걸린다고 했고, 침략 2달 후 외계인의 침략이 잠시 중단된 것이다. 그때 신지는 메구미에게 끝까지 곁에 있는다고 말했다. 그 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사랑이 산산조각 났다. 물론 그건 하마구치 류스케의 각본이다. 난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음 영화가 정말 기다려진다. <스파이의 아내>의 엔딩이 <지구의 끝까지> 이후의 대답이었는지, 혹은 그건 하마구치 류스케의 시선이었는지 궁금하다.      



  2021년 04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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