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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Feb 26. 2021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

  왕가위의 영화를 스무 살 때 접하고 난 뒤 왕가위를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왕가위를 좋아했던 것은 <화양연화>에서의 이별을 연습하는 장면, <해피 투게더>에서의 녹음기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 혹은 홍콩 느와르지만 무언가 달랐던 <열혈남아>에서의 공중전화 키스 장면과 마지막의 허무함, <동사서독>에서의 애달픈 설정이 당시의 나를 움직였다. 다른 영화들과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그 점을 정확하게 설명하기에는 애매하고, 왕가위를 따라 하는 무수한 많은 영화들에서 왕가위의 영화와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을 풍겨 완전히 다른 감상을 풍기기에 의문스러웠던, 쉽게 이야기하자면 홍상수 영화를 보고 따라 하던 무수히 많은 영화과 학생들의 작품들을 보는 것과 같이,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알 수 없어 왕가위의 영화는 왕가위만 찍을 수 있다는 당연한 소리로 대체한다. 그렇지만 최근 왕가위의 작품들이 재개봉하면서 몇 편은 극장에서, 몇 편은 집에서 다시 관람하면서 내가 느꼈던 오래전의 느낌보다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와서 여전히 당연한 소리를 전제로 내가 생각하기에 왕가위의 최고작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해피 투게더>의 첫 장면은 여권으로 시작한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1997년 작인 홍콩 영화 <해피 투게더>의 첫 장면은 여권으로 시작한다. 왕가위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작품은 홍콩에 관한 것이라고 선언했듯이, <해피 투게더>는 홍콩의 상황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볼 수 있다. 물론 왕가위의 영화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왕가위의 영화를 정치적 배경을 가리고 보는 시도 또한 성공적이지 않다. 홍콩이라는 나라는 기구한 운명을 갖고 있는 나라다. 영국의 식민지로 지내면서 그 장소에는 중국의 공산당을 피해 왔던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을 품고 있던 장소였다. 그 장소를 영국이 중국에 반환한 것이 1997년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의 변화는 변모의 아주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변화를 앞두고 있는 그 기간에 왕가위는 <열혈남아>부터 시작하여 <해피 투게더>까지 찍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피 투게더>의 첫 장면에서 아휘와 보영의 여권은 시작으로 쓰이기에 아주 적합한 장면이다. 왕가위는 인터뷰에서 <해피 투게더>를 찍기로 결심한 것이 1997년 중국 본토로 반환된 이후의 걱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홍콩 사람들이 제일 실망한 순간 중 하나가 여권을 받을 때였습니다. 그건 분명 영국 여권이지만 ‘BON’, 즉 해외 영국 국민 용이란 꼬리표가 있었어요. 이는 곧 자신들이 영국 여권을 가진 영국 국민이지만 본토 반환 후에 영국에서 살 권리는 없다는 뜻이었죠. 말하자면 우린 사생아란 뜻이었습니다.” 왕가위 감독은 이어 왜 동성애에 관한 내용으로 정했는지도 밝혔다.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지만 거절당하는 이야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관계, 즉 이를테면 동성애에 대한 영화를요.” 영화의 첫 장면이 여권이지만 첫 대사는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이다. 1997년, 홍콩은 다시 시작한다.      


  두 개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야기. 하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또 다른 하나는 정체성 자체가 거부되는 이야기. 하지만 왕가위는 두 번째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야기를 극적으로 끌고 나가지는 않는다. 많은 동성애 영화들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시선이나 그들을 차별하는 시선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의 여파인 감정적 상처로 갈등하는 내용을 다룬다면 <해피 투게더>에 그런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딛고 서 있는 장소가 홍콩에서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라는 점이 또 하나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 이 영화에서 홍콩 남자 셋이 연결되며 서사가 진행되는 것도 홍콩인이 갖고 있는 이방인의 기분, 그리고 그 외로움과 같은 감정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서사는 단순하다. 아휘와 보영이 이별하고, 다시 만났다가 다시 이별한다. 그리고 아휘가 보영을 잊기 위한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서사가 단순하면 할수록 형식은 풍부해진다. 10년 넘게 영화를 기억 속에 묻어두었다가 스크린으로 다시 마주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것은 컬러와 흑백의 병치다. 어떤 기준으로 나눴다고 생각했지만 중간중간 다시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소수의 쇼트들을 마주할 때 그 맥락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다시 시작하자는 대사로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었으며, 아휘가 다시 시작하리라는 마음을 먹은 순간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를 도식적으로 끌고 가는 것 또한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다. 아휘는 보영과의 이별 이후 탱고 바 안내원으로 일을 한다.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역할이지만 보영이 나타나는 순간 그 역할에 감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보영이 탱고 바를 떠나는 차 안에서 스텝 프린팅으로 촬영될 때 그 순간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 왕가위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가 뭐라 해도 스텝 프린팅의 사용이다. 스텝 프린팅이란 저속 촬영을 한 뒤 프레임을 중복 사용하여 시간을 늘린 것을 이야기한다. 왕가위가 <열혈남아>에서 사용한 뒤에 무수히 많은 액션 영화에서 따라 했던, 그리고 뮤직비디오에서 정말 많이 활용되던 그 기법. 하지만 왕가위의 액션 장면이 스텝 프린팅으로 촬영된 까닭은 시간성에 있다.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왕가위는 술자리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시간 감각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스텝 프린팅은 시간 감각을 뒤트는 것이다. 허우 샤오 시엔이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보고 왕가위 영화의 새로운 점은 기교나 스타일이 아니라 자기 영화 안에서 두 개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두 개의 시간의 하나는 영화 속에 흐르고 있는 물리적 시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감정의 시간이다. 왕가위 영화 속에서 스텝 프린팅으로 촬영된 장면은 감정의 시간이다. 즉, 보영이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순간 어쩌면 보영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해피 투게더>는 행간을 읽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존심 싸움이다. 하지만 그 자존심 싸움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일이 좋아질 것 같지만 결국 연애도 권력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악영향만 끼친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강하게 내세우면 역시 무너진다. 줄다리기는 팽팽한 상태여야만 지속된다. 보영과 아휘는 서로 그리워하지만 먼저 자존심을 죽이는 쪽은 보영이다. 보영은 양극단을 달리고, 아휘는 중간에서 머문다. 아휘가 술에 취해 보영에게 찾아가서 홍콩에 갈 돈이 없어서 탱고바에서 일한다고 하자 보영은 시계를 선물한다. 물론, 그 시계는 보영이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애인에게서 훔쳐 왔을 것이다. 시계가 발단이 되어 둘은 다시 결합한다. <해피 투게더>에서 명장면이 너무 많아 몇 장면만 꼽을 수도 없지만 시계와 관련된 시퀀스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과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둘은 결국 다시 시작한다. 

     

  둘이 다시 시작한다고 둘의 관계가 급격하게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보영이 자신을 떠날까 봐 아휘는 여권을 숨겨놓는다. 우리는 이 행위를 단순히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으로 읽어선 안된다. 지금 이곳은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다. 한 명이 떠나면 이 세계에 혼자 남는 것이다. 아휘는 보영과의 결합 이후 활력을 되찾는다. 일전에 사진 찍기를 거부했던 것을 즐겁게 행하고, 보영을 먹여주고 씻겨준다. 보영을 보살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보살피는 일이다. 보영으로 인해 집은 깨끗해진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청소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이다. <타락 천사>에서도 그랬고, <중경삼림>에서도 그랬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은 다시 서서히 가까워진다. 보영의 치근덕거림이 둘이 가까워지는데 조금은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아휘가 걸린 감기는 어쩌면 보영으로 인한 상실감을 씻겨 내려가게 하는 열병인지도 모른다. 둘은 탱고를 춘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의 명장면이다. 하지만 이 춤 장면에서 둘의 모습이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중간에 인서트가 들어간다. 흐린 날의 부두. 무언가 만신창이의 모습. 그들의 결합이 결코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아휘는 탱고 바를 관둔다. 아휘의 직업 변화를 보면 아귀가 맞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그의 역할은 입장을 도와주는 탱고 바 직원이었다. 하지만 보영이 돌아오자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역할로 일자리를 바꾼다. 물론 서사에서는 사장과의 불화로 표현되지만 보영이 떠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유일한 친구였던 장마저도 떠나자 아휘는 냉동 창고에서 일한다. 홍콩의 시간과 같은 리듬감을 갖고 있는 그곳. 4계절 내내 여름이던 곳에서 모두가 떠난 썰렁함을 느끼기라도 하듯. 우리는 아휘의 직장이 식당으로 바뀌자마자 장을 소개받는다. 장은 아휘의 유일한 친구이지만 보영과의 이별에 직접적인 원인 역할을 한다. 물론 장이 아니었어도 둘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휘와 보영의 통화를 엿듣다가 장은 아휘의 전화를 대신 받는다. 물론 그 목소리가 남자임을 알고 장은 놀랐겠지만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왕가위는 마치 동성애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넘어간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에서 밝힌다. 자신과 일하는 수많은 게이 동료 중에서 그들이 게이여서 문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런 태도가 장의 캐릭터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오히려 관객들이 놀란다. 그 반응에서 관객 스스로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영화는 아휘와 보영에게로 옮겨간다.      


  보영은 장의 목소리를 듣고 난 뒤 아휘에게 장난스럽게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보영은 아휘의 짐을 뒤져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는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실패하자 아휘와 다툰다. 그다음 장면은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옥상에서의 장면이다. 시멘트 칠을 하는 아휘의 옆에서 보영은 아휘에게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끝나냐고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보영이 내려다보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라본다. 그곳엔 홍콩 사람은 없다. 이곳에서 보영은 아휘가 옆에 있지만, 아휘는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의심되고, 자신은 외로우며, 하늘은 맑다. 이방인의 외로움. 끼어들 수 없는 사람들. 이 장면이 넘어가면 우리는 아휘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걸어 보영이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아휘는 그것 말고 통화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집주인은 보영이 없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장면이 바뀌면 우리는 보영이 지루하게 TV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보영은 사라진다. 아휘는 집으로 돌아오고 보영이 없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이어 보영이 들어오고, 담배를 사러 나갔다 왔다고 설명한다. 아휘는 담배를 사러 나가는데 차려입고 나간 것을 빌미로 보영을 의심한다. 그다음 장면은 아휘가 담배를 보루로 사다 놓은 장면이다. 보영은 그 담배들을 죄다 던져버린다. 보영이 차려입은 뒤 담배를 사 온 것은 맥락을 읽어야 한다. 결국 앞의 장면들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외로워서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곳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려 입고 돌아다니다가 담배를 사 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아휘는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보영을 의심하여 담배를 보루로 사 온다. 어쩌면 보영에게 그 의상은 아휘에게 보내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외롭다는 신호. 외롭다는 말을 하면 자존심이 무너지니까. 하지만 아휘는 그걸 방어적으로 받아들인다. 혹은 의심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난 다음 아휘가 방을 나가자 카메라는 걸쇠를 보여준다. 자물쇠. 걸어 잠그는 것.      


  보영은 이제 차려입고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휘의 불안은 식지 않는다. 보영이 나갔다 오기만 하더라도 아휘는 보영이 돌아올지 안 올지를 따져본다.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갑자기 축구하는 장면이 나와서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휘는 보영과의 스트레스를 축구로 풀기 시작한다. 식당 직원들끼리 모여서 축구를 한다. 거기에는 장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아휘의 스트레스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보영은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아휘는 같이 축구도 하고, 마작도 할 사람이 있지만 보영은 곁에 아무도 없다. 결국 그는 다시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간다. 그다음 장면에서 아휘는 혼자 방에서 빈둥거린다. 우리는 아휘가 혼자서 보영을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만 카메라가 패닝하면 보영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정말 외로운 순간은 혼자 있는 순간이 아니라 같이 있는데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땐 정말 혼자인 느낌이 든다고 한다. 아휘와 보영은 끝으로 향한다. 여권을 찾는 보영. 아휘는 넘겨 줄 생각이 없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난잡한 편집을 본다. 마치 둘 사이가 찢어지든 마구잡이로 찢어놨다. 보영이 아휘의 방에서 나가고, 둘은 끝난다. 보영이 여권을 찾으러 돌아오지만 사실상 이 편집에서 둘이 끝났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보영이 떠나고 아휘는 배에 타고 정처 없이 떠돈다. 피로를 가득 머물고 느릿하게 떠돈다.      


  보영이 떠나자 아휘와 장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술에 잔뜩 취해 보고, 즐겁게 축구를 한다. 장과 친해지지만 아휘의 상실감은 쉽게 걷히지 않는다. 우리는 축구를 하고 난 뒤 담배를 피우는 아휘의 모습이 스텝 프린팅으로 찍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장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우수아이아로 간다고 선언한다. 장은 아휘를 떠난다. 이제 아휘는 진짜 혼자가 된다. 둘의 이별 장면도 스텝 프린팅으로 찍혔다. 왠지 모르게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장과의 이별 장면 다음 축구 경기장으로 화면이 바뀐다. 아휘는 축구를 보면서 존다. 장이 떠나고 축구할 사람이 없어지니 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리고 다시 도심의 시계 장면이 나온다. 시간은 흐른다. 보영도 떠나고, 장도 떠났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내 시간은 멈춘 것 같지만 세상의 시간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아마도 보영이 그랬던 것처럼 아휘는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돈다. 우리는 보영이 옷을 차려 입고 어디를 갖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지금 아휘가 방황하는 것처럼 거리를 겉돌았을 것이다. 아휘는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고, 거리를 구경한다. 그들에게 속한 것 같지만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관심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방황 끝에 공중 화장실에서 보영을 우연히 마주친다. 결국 외로움의 종착지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아휘는 고독 끝에 보영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아휘와 보영의 차이다. 아휘는 결국 보영을 느껴보지만 보영은 아휘를 느껴보기 위해 늙은 남자와 탱고를 춘다. 언제나 줄을 당기는 것도 보영이었고, 줄을 놓치는 것도 보영이었다. 아휘는 그저 보영의 손에 끌려다녔다.   

    

  결국 아휘는 홍콩으로 가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한다. 냉동 창고에서 일하면서 그는 크리스마스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아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보영이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지만 보영은 아휘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아휘의 방 문을 두드려본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서지는 못한다. 그다음 장면은 아휘가 홍콩을 거꾸로 보는 것을 우리가 느껴보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아휘에게 이제 보영을 다시 만나는 것보다 홍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아휘가 핏물을 제거하려고 물을 아무리 뿌려대도 그 흔적이 남았던 것처럼 쉽게 시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보영과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간다. 마치 마지막 과제인 것처럼.      


  보영은 아휘의 방에 들어와 산다. 아휘가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채워 놓고, 청소를 한다. 보영은 계속해서 아휘를 느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휘가 그랬던 것처럼 보영은 문 옆에 앉는다. 그리고 젖은 바닥을 만져본다.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물기 있는 바닥만이 느껴볼 수 있는 감촉이다. 아무도 오지 않겠지만 보영은 방 문을 열어둔다. 보영은 이과수 폭포로 꾸며진 램프를 작동시켜 본다. 램프에 그려진 한 커플. 쇼트가 바뀌면 보영이 있는 아휘의 방으로 카메라가 다가간다. 문이 닫혀 있는 방. 그곳엔 보영 혼자 남아있다. 이불을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아휘는 이과수 폭포에 도착했다. 매섭게 들이치는 폭포수. 아휘는 그곳에서 폭포를 바라본다. 위에서 그 장관을 바라볼 땐 엄청난 위압감과 경외감이 든다. 이제 아휘와 보영은 끝났다.    

 

  그와 동시에 홍콩도 끝났다. 장면이 바뀌면 1997년 1월 세상의 끝에 도착한 장의 모습이 보인다. 아휘의 슬픈 소리를 세상의 끝에 묻어두고 싶었지만 장은 녹음기가 고장 난 것인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휘가 흐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녹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홍콩의 입장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날 과거를 묻어 둘 수 있을 것인가? 장은 대만으로 가기 전 아휘를 만나려고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아휘는 대만에서 눈을 뜨자 등소평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또 하나의 소식. 아휘는 장과는 달리 우연찮게 장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국수를 먹는다. 아휘는 장을 보고 싶을 때면 어디로 와야 할지 알게 되었다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영화는 노래 해피 투게더가 흐르면서 도심의 모습을 몽타주로 장식한다.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영화는 홍콩에 도착한 모습을 찍지 않았다. 아휘는 장을 찾으러 식당에 들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자신이 돌아갈 홍콩이 어딘지 모른다. 기억 속의 홍콩은 사라졌다. 새로운 홍콩만이 존재한다. 1997년 갈 곳을 잃은 홍콩 사람들은 영화의 제목처럼 같이 행복할 수 있을까?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이다. 햇살이 뚫고 들어오다. 작금의 홍콩은 24년 전 그때의 걱정을 해소하고 햇살이 들어오고 있을까? 무심코 지나치더라도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021년 0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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