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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Nov 22. 2020

홍의정의 <소리도 없이>

  영화의 제목처럼 소리도 없이 찾아온 이 영화가 반가운 까닭은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영화가 장르의 관습을 뒤엎고 독특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독특하다고 느끼는 것은 공통된 사안인 듯 하나 어떤 부분이 독특한 것인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이유는 제각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시체 처리를 직업으로 삼는 태인과 창복이 기존 장르의 관습처럼 비치지 않고 그들은 단순노동을 하는 노동자처럼 비친다는 사실일 것이다. 게다가 영화의 산뜻한 톤은 그 직업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마치 오래전 열심히 살면 언제가 해 뜰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까지 담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소리도 없이>가 그런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홍의정 감독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이야기 부분의 원형은 <별주부전>이다. 홍의정 감독은 <별주부전>을 보고 자라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을 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토끼는 자신이 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왜 토끼가 약삭빠른 동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오래전 동화나 설화는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상당히 많다. <별주부전>이 이야기적 원형이기는 하나 범죄행위를 노동으로 표현한 것처럼 이 영화가 <별주부전>을 토대로 말하고자 하는 요소의 중심 요소라기보다는 단지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결국 태인의 사회화다. 엔딩 장면을 돌이켜보자. 태인은 초희를 데려다주고 터널로 진입한다. 그 순간 태인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건 죄책감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생뚱맞은 소리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태인은 유괴가 아니라 살해 현장을 수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죄책감엔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살해 현장을 수습하는 것은 태인에게 범죄가 아니라 ‘일’이다. 우리가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처럼 태인에게 그것이 일상이다.     


  태인과 창복에 대해서는 영화가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태인이 어렸을 때 창복이 데려왔다고 추정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태인의 동생 문주가 같이 왔는지 혹은 그 이후에 태인이 데려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주는 태인이 친오빠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문주의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미 태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태인은 창복이 데려오기 전에 맞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창복과 태인이 초희를 차에 태워 데리고 올 때 초희가 태인을 깨우는 장면에서 태인은 누군가한테 맞았던 기억으로 몸이 반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태인이 어린 시절 폭행을 당한 것을 추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앞 장면을 떠올려봐야 한다. 태인이 차 안에서 깨는 장면은 이미 앞에서도 나온다. 창복이 태인을 깨울 때 태인은 몸을 방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희가 깨웠을 때는 몸을 방어한다. 아마도 초희의 나이대에 태인은 맞았을 것이다. 그 기억 때문에 초희를 맡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찝찝하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영화가 우리에게 굉장히 민감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도발한다. 그 첫 번째는 영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반찬을 파는 할머니다. 할머니가 처음 등장했을 때 태인은 달걀 5개를 건네준다. 할머니는 태인의 손을 붙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태인이 초희를 데려갈 때 초희가 자전거에서 내려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때 할머니는 태인의 어깨를 때리며 초희에게 오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달랜다. 태인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범죄자이며, 지금은 초희를 납치한 유괴범이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태인은 매번 달걀을 주는 착한 청년일 뿐이다. 관객의 위치를 바꾸면서 데뷔작이라기엔 능수능란하게 연출한 장면은 초희가 태인의 집에서 도망친 장면이다. 초희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술에 취한 경찰이다. 하지만 우리는 초희의 시선에서 술 취한 동네 아저씨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가 경찰인지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이 이상한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범죄들을 떠올려볼 때 유괴범인 태인이 초희를 찾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이내 드러나는 사실은 술 취한 아저씨가 진짜 경찰이었음이 드러나고 태인이 초희를 찾았을 때 우리는 안심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태인은 유괴범이다. 아니, 이 지점에서 태인은 유괴범이자 인신매매를 시도한 범죄자다. 그것도 아동 장기를 빌미로 팔아버린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인이 초희를 찾았을 때 안도하며 경찰이 태인의 집에서 초희를 찾는 순간에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초희에게 나오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과 경찰에게 가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감정적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태인이 경찰을 죽이고(물론 죽지는 않았지만) 시체를 처리할 때 우리는 초희의 행동을 보고 다시 한번 미로에 빠진다. 초희의 박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초희가 태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태인의 삶에 초희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태인과 초희는 서로의 선생님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태인은 아마도 창복에게 모든 일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창복은 누구한테 시체 처리 일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누군가의 영향으로 시체 처리 일을 맡아서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복과 태인은 시체 처리 일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태인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달걀을 파는 일도 만족스럽지 않다. 태인은 실장 용석의 위치에 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석의 차량에 올라타보고 용석의 양복을 탐낸다. 하지만 태인이 용석의 자리를 원하는 까닭은 눈앞에 있는 것이 용석밖에 없어서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힘이 센 사람이 용석이다. 용석이 시체가 되었을 때 태인이 용석의 뺨을 때리는 것은 자신이 용석의 자리에 가보고 싶은 제스처에 불과하다. 태인이 시체를 처리하다가 밧줄로 용석의 발을 쳤을 때 용석은 태인의 뺨을 툭툭 친다. 그 행동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태인은 이 순간 고용주의 위치에서 고용자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껴본 것이다. 영화는 배움이 반복되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초희가 태인의 집에 처음 왔을 때 태인은 문을 잠궈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초희는 단 한 번도 도망칠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위험한 태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내는 방법을 택한다. 관객의 위치로 우리에게 도덕적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홍의정 감독은 인물들이 학습하고 있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초희가 태인의 집에 처음 왔을 때 등장한 문주를 보고 초희는 자신처럼 납치된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내 문주가 태인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초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자신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이만한 어린아이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태인이 어쩔 수 없이 시체를 처리하는 장소에 초희를 데려가는 것 또한 우리에게는 신기할 따름이다. 태인과 창복이 유괴범이기는 살해 현장에 아이를 데려온다는 것은 상식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태인과 창복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이 범죄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만큼 일상화된 일이고 그 일은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경고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초희를 데려온 것이 나중에 도덕적 경고 벨을 울리게 된다. 태인은 실장 용석의 뒤처리를 하면서 양복을 갖는다. 그 행위의 순간에 태인은 초희의 신발을 밟는다. 초희가 도망치지 못하게 신발을 벗겨놓은 것인데 초희의 신발이 용석의 양복, 즉 태인의 욕망과 계속해서 겹쳐진다. 그 경고 벨이 이 순간 태인에게 작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태인에게 그 경고 벨이 스멀스멀 들리기 시작한다. 태인은 초희의 앞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로 지워버린다. 하지만 태인에게 경고 벨이 울리기 시작한 시점에 우리는 또 다른 불길한 예감을 맞이한다. 시체를 처리하면서 창복이 “한 번 식구가 되었으면 힘을 합쳐 잘 살았어야지”라는 대사를 내뱉자 초희는 시체 위에 흙을 덮는 일에 힘을 합친다. 초희는 땅속에 묻히는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초희는 이들의 행위가 범죄행위라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는다. 핏방울에 꽃을 그리는 장면은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잔인한 살인 행위에 다른 시선을 부여한다. 초희에게 핏방울은 꽃일 뿐이고, 태인과 창복에겐 지루한 일상일 뿐이다. 초희는 자신이 살기 위해 태인의 눈치를 본다. 그 결과 문주에게 옷을 개는 법을 알려주고, 상다리를 고쳐놓는다. 태인은 초희의 행동이 낯설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우리는 이 행동이 초희가 태인과 같이 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태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초희의 행동이 태인에게 끌려오고 난 다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초희는 삼대독자인 남동생과 살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이미 가정에서 학습한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주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식사예절, 존댓말, 청소, 식사 준비 등 초희가 가정에서 배운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아이가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다. 한데 초희의 위치가 굉장히 모호한 것은 분명 태인과 문주, 초희 3명이 방 안에 함께 있을 때 태인이 권력을 움켜쥐고 있지만 초희는 이 공간에서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빨래와 문주의 목욕이 이루어지면 짐승 우리 같던 공간이 인간이 사는 공간으로 변하고, 짐승같이 살던 태인과 문주가 사람처럼 변한다. 초희는 그 과정에서 태인과 문주에게 동화되어 간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보이지만 홍의정 감독의 시선이 독창적인 것은 초희와 태인은 결코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다.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태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태인과 창복, 문주는 사진기를 작동하지 못한다. 태인과 창복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과 달걀을 파는 일에만 능숙할 뿐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물이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작동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 또한 초희다. 우리는 초희의 집안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초희의 행동은 11살짜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아이를 다루고 집안일을 해낸다. 어쩌면 초희가 사진기 앞에서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은 집에서 느껴보지 못한 인간다움을 태인의 공간에서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희는 결코 태인의 공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홍의정 감독은 일부러 그런 지점으로 달려가놓고 관객이 초희가 그런 마음을 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즈음 관객을 일깨워준다. 태인과 창복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유괴범이다. 창복은 지시받은 대로 돈을 받으러 갔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창복이 죽음이 갑작스럽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창복은 유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시체를 보고 피를 닦고 시체를 묻는 사람이 돈 가방을 가져오는 일에 벌벌 떤다.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하필 그 순간 쩔뚝거리는 발은 발을 헛디디는데 원인을 제공한다. 창복의 죽음. 그로 인해 태인은 창복이 시키는 대로 초희를 팔아넘긴다. 초희는 그 순간 태인에게 느꼈던 인간적인 감정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초희를 넘기고 온 태인은 자신의 머리를 건드리는 양복을 보고 초희를 구하러 간다. 이 모순적인 장면은 자신에게 도덕적 경고 벨을 울림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의 실현이 같이 작동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초희의 신발을 밟는 장면을 제외하고 태인이 양복을 빨래할 때 양복에서 떨어지는 물이 초희의 신발을 적신다. 그리고 태인은 초희를 넘기고 난 다음 이 양복으로부터 초희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이건 용석의 양복에 대한 욕망이 드러날 때마다 초희의 신발이 경고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양복이 초희를 구해야 한다고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이 사명감은 태인의 첫 선택이다. 하지만 여기에 모순이 개입한다. 태인이 입고 있는 양복은 용석의 위치로 간다는 것이다. 그가 용석의 위치로 갈 때 태인은 진짜 유괴범이 된다. 지금까지 태인은 유괴범에게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맡아 주는 유괴범이었다. 실제 아이를 납치한 것과 아이를 맡으라고 협박 받아 맡은 경우는 정확하게 다르다. 행동의 성격은 똑같지만 행동의 이유가 다르다. 하지만 태인이 용석의 양복을 입고 초희를 데려올 때 그건 초희를 넘겼다는 죄책감에 도덕의 경고 벨이 울린 것이기도 하지만 초희를 다시 한번 유괴하는 행위다. 즉, 태인이 초희를 데려왔을 때 유괴는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이 장면에서 태인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만약 태인의 유괴 행위가 실패한다면 초희의 몸 안에서 장기는 적출된다. 최악 대신 차악. 우리는 이 논리를 이미 앞에서 보았다. 용석이 죽고 난 다음 유괴범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보았다. 첫째 초희를 유괴범들에게 넘기고 처리 비용을 준다. 이 경우는 초희는 장기밀매범들에게 넘어간다. 두 번째는 유괴범들의 도움을 받아 초희를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같이 돈을 더 받는다. 어떤 경우라도 유괴범들은 돈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결국 창복과 태인은 최악 대신 차악을 택한다. 차악은 언제나 변함없이 악이다. 차악이 선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태인이 초희를 다시 유괴했을 때 차악의 연결고리가 지속되고 있다.      


  태인이 초희를 데리고 버스에서 빠져나올 때 초희는 태인을 때린다. 초희는 태인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유괴범인 태인뿐이다. 하지만 초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 그리고 다시 그걸 깨닫게 한 태인을 보고 분노한다. 초희는 태인이 문을 열어놓고 갔다는 사실을 알고 태인의 집에서 도망간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초희는 다시 태인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경찰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초희는 경찰이 구해줄 것이라는 일말의 생각도 품지 않는다. 초희는 이 세계에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배웠던 대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을 돕는다. 초희가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을 때 모순적이게도 태인은 긍정적으로 변한다. 창복이 돈 가방을 움켜쥐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처럼 태인은 경찰을 죽이고 난 다음 당황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 순간 초희가 하는 행동을 보고 태인은 초희의 행동을 중단시키고 시체를 처리하는 곳에서 내보낸다. 초희는 태인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태인이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박수로 신호를 보낸다. 태인은 그제서야 초희가 자신의 행동을 보고 배우고 있음을 깨닫는다.      


  다음 날 아침 태인은 초희가 자신처럼 씻고 있는 모습을 본다. 태인은 초희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태인의 손에 잡힌 것은 초희의 공책이다. 공책에는 초희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적혀있다. 태인은 얼마든지 초희를 부모에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태인은 초희에게 부모의 연락처를 물어 부모에게 보내거나 초희가 아는 장소에 두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초등학교로 향한다. 왜 초등학교였을까? 학교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할. 영화는 그 질문을 던진다. 초희와 태인은 서로에게 교육을 주었다. 하지만 태인이 초희에게 교육한 것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과 시체를 처리하는 일,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일이었다. 태인은 그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깨닫고 있다. 그리고 태인이 초희의 학교에 도착해서 초희의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비로소 자신이 한 일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초희의 손을 놓는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한 죄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초희는 결국 태인의 손을 뿌리친다. 초희가 선생님에게 태인에 대해서 정의하는 말이 희미하게 들린다. “저 데려간 사람이요..” 그러자 선생님은 태인을 유괴범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그 소리에 맞춰 초희의 얼굴 표정은 모순적이다. 초희는 유괴범이라는 단어를 모르지 않다. 분명 영화 중간에도 초희의 입에서 유괴범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초희는 그 단어를 택하지 않았다. 태인은 우리 사회의 상식선에서 악질의 범죄자다. 그가 비록 배우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기는 하나 유괴범인 것도 사실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초희는 장기를 적출당할뻔했다. 하지만 초희의 표정에서 태인을 유괴범이라는 세 글자로 정의한다면 그 또한 부조리한 일이 될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초희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부모님을 향해 인사한다. 태인의 세계는 불법적이고, 무능력하고, 무질서하다. 가부장제의 합법적이고, 질서정연한 우리의 세계는 과연 정상적인가?    


  태인이 달리고 달려 집으로 돌아가는 터널 안에서 양복을 벗어던질 때 태인은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유괴범이라는 것을 선생님의 손가락질로 확실하게 깨달았을 때 태인은 양복을 벗어던진다. 용석의 자리를 던져버린 것이다. 우두머리. 가부장제의 가장. 도덕의 경고 벨에 대한 반응이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태인은 이제 우리 상식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태인은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초희가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되돌아갔으니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홍의정 감독은 어쩌면 태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땅에 묻힌 경찰을 부활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부활로 인해 문주가 납치되지 않았다. 우리는 문주가 납치될 뻔한 장면에서 태인의 벌이라고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주는 태인과는 별개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되지만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허다한 일이다. 홍의정 감독은 무능력한 공권력을 부활시켜 그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는데 성공한다. 태인이 터널을 통과한 다음 우리는 태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다. 태인은 체포될 것이고 징역을 살 것이다. 하지만 이 엔딩은 해피엔딩이다. 우리의 사법체계는 죄인을 반성시키고 사회에 나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을 기대한다. 변화된 사람을 기대하는 것이 우리 사법체계 정의의 바탕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변화된 사람을 기대하는가? 태인은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인은 터널을 지나오면서 초희와 창복과 문주와 보냈던 추억의 순간을 떠올린다. 이제 태인의 욕망은 양복에서 폴라로이드 사진 속 그 순간으로 변했다. 찍었을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지만 기다리면 그 모습이 선명해지는 폴라로이드 사진. 우리는 태인의 추억의 순간처럼 기다리면 선명해진 세계를 볼 수 있을까?    


  2020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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