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카페에서 논쟁이 붙었다. 케빈이 그렇게 된 것은 에바의 탓이라는 주장과 사이코패스는 타고나는 문제라는 주장이 맞붙었다. 댓글에는 에바의 탓이 아니라 에바가 위험한 날이라고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한 남편의 탓이라는 주장도 있었고, 엄마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주장이라는 주장 또한 있었다. 2011년도에 나온 영화지만 이 논쟁은 2020년도에 일어난 일이다.
이미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를 찍었고,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을 찍었지만 총기 난사의 모티브는 계속해서 변주되고, 해석되고 있다. 그만큼 사건의 파장이 큰 까닭도 있겠지만 가해자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다각도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n번 방 사건 같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파렴치한 범죄들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자는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누가 뭐라 말하든 난 그 의견에 반대한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은 재판할 때나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서사를 부여하여 가해자가 양형이 된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은 타당하나 우리 사회가 가해자의 서사를 전면 차단할 때 우리는 가해자가 벌인 참혹한 사건에서 ‘예방’의 차원으로 사회가 배워야 할 무언가를 놓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악마를 믿어선 안된다. 악마는 태어나지 않는다. 악마는 만들어진다. 만약 악마가 태어난다면, 고레에다의 말처럼, 악마를 구별하는 판독기를 개발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악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파악하고 인간이 악마가 되지 않는 것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케빈에 대하여>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은, 케빈이 어떻게 악마가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영화다. 만약 악마가 태어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영화는 에바의 주관적 심리 상태를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린 램지는 이 부분을 단지 추상적인 감각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이 감각이 어디서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 설명은 단순히 토마토 축제와 집이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처럼 장면의 앞뒤로 바로 붙어 있을 수도 있고, 맨 첫 쇼트에서 커튼이 살랑거릴 때 귀를 때리는 이상한 효과음의 자극이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 에바의 남편과 딸 실리아가 죽고 난 뒤 정원에서 물뿌리개가 작동될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청각의 추상적 감각은 정확한 곳에서 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린 램지는 에바의 현재를 쫓으면서 에바가 받아들이는 감각이 과거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때 과거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진행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정말 치밀하게 잘 짜인 극영화다. 즉, 에바의 감각이 과거를 불러오지만 그 과거가 그곳에 위치하기 위해 린 램지가 정말 세심하게 생각하고 생각해 낸 아이디어로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비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지만 현재도 시간순으로 진행되고 있고, 과거도 시간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몇몇 쇼트가 산재되어 있지만 그 쇼트가 시간을 재정립하기 위해 퍼즐을 맞추려는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워낙 강렬한 이미지와 사운드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마주한 순간부터 매혹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사건, 그러니까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에바가 케빈을 임신한 순간이다. 혹은 에바가 케빈을 낳은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바가 케빈을 임신하고 산부인과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다른 임산부들은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에바는 자신의 몸과 다른 임산부의 몸이 익숙하지 않은 듯 걱정, 혹은 혐오한다는 표정까지로 해석될 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자신들의 배를 내놓고 마치 사랑스러운 아이가 거기 있다는 것처럼 배를 어루만질 때 에바는 그 배를 가리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공간에서 에바가 나갈 때 린 램지는 무수히 많은 아이들에게 복도를 뛰어가라고 지시했다.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과는 다르게 에바의 표정은 낙담한 듯 보인다. 이 디테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쇼트가 바뀌고 장면이 바뀌었을 때 에바가 걷던 복도와 비슷하지만 다른 공간의 복도가 나온다. 우리는 경찰관이 있기 때문에 그곳이 교도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복도와 복도, 비슷한 느낌, 걷고 있는 에바. 에바는 케빈을 원하지 않았다.
린 램지는 에바가 케빈을 출산하는 장면을 굉장히 끔찍하게 찍었다. 에바의 얼굴이 다 일그러져서 에바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에바의 비명 소리와 함께 결합시켰다. 자신이 둘로 나뉘는 장면이라고 정신 분석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바와 케빈은 정말 엄마와 아들처럼 닮았다. 이건 틸다 스윈튼과 에즈라 밀러가 정말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또한 감독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에바는 케빈을 낳고 난 뒤 자신의 출산에 대해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기뻐하는 것은 남편이고, 케빈을 안고 있는 것도 남편이다. 에바는 케빈에 대해 눈곱만큼의 애정도 없을뿐더러 정말 중요한 건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바가 갓난 아기 케빈을 달래는 모습은 흡사 우는 아기를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에바는 억울하겠지만 에바의 남편은 케빈을 달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한다. 남편의 말처럼 케빈은 그냥 살랑살랑 안아주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에바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에바가 케빈을 달래며 한 행동은 케빈을 안아주고 흔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들어 올려서 울음을 멈추라고 ‘말’로 요구할 뿐이다. 다시 한번 반복한다. 에바는 ‘엄마’가 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아니, 더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에바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엄마’라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면 자신의 아이의 울음소리를 공사장 소리에 묻혀두진 않았을 것이다.
에바는 케빈을 데리고 단 한 번 병원에 간다. 케빈이 말을 하지 않아 걱정이 된 것이다. 에바는 케빈이 어렸을 때 너무 악을 써서 청력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아이가 우는 것은 자신의 욕구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표명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에바는 아이의 욕구를 충족해 주지 못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지 못한 부분은 생략이 되어 있으니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면 에바는 아이의 욕구에 공사장 소리로 응답하거나 아이가 울다가 지쳐서 자면 그제서야 안심하고 아이가 깰까 봐 노심초사한 것이 전부이다. 즉, 케빈은 자신의 욕구를 아무리 애를 써서 표명해봤자 에바는 그걸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이다. 엄마와 아이의 애착관계가 이미 탄생부터 틀어졌다는 것이다. 케빈이 반사회 인격장애를 갖고 태어났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린 램지의 관심사는 케빈이 그렇게 태어났거나 태어났지 않았거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에바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완전히 실패했고, 케빈은 그 실패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 린 램지의 관심사다. 케빈은 마치 에바에게 복수라도 하듯 서서히 에바를 관찰한다. 공굴리기를 하며 에바의 만족과 실패를 눈여겨보고 에바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케빈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린 램지는 프로이트의 심리 성적 발달 단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실로폰의 막대를 입에 넣거나 소변과 배변을 조절할 줄 알면서도 케빈은 조절하지 못하는 척한다. 프랭클린은 케빈이 혼자서 소변을 보는 것을 보고는 에바를 칭찬한다. 에바와 프랭클린은 이미 부모의 자격을 상실했다. 아마 케빈은 소변을 보는 것과 대변을 보는 것 전부 혼자서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난 뒤 계속해서 배변활동에 익숙지 않은 아이처럼 행동했던 것이 드러난다. 에바와 프랭클린이 오럴 섹스를 할 때 케빈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린 램지는 이 장면을 애매하게 찍었다. 케빈이 그들의 섹스를 인지하고 들어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케빈이 배변활동에 능숙하다고 보았을 때 케빈이 이불에 배변을 본 것은 당연히 일부러인 것이고, 부모의 섹스를 방해하려는 행위이다. 다른 한 가지는 케빈은 그때는 배변 활동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실수를 한 것이고, 우연찮게 그 순간 에바와 프랭클린은 오럴 섹스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추측으로 설명하던 간에 이후 케빈이 기저귀에 일부러 배변을 보는 장면에서 우리는 케빈이 프랭클린으로부터 학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케빈의 자세는 마치 에바가 자신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행위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자세이다. 그리고 자신의 구강기와 배변기에 제대로 된 발달 단계를 거치지 못한 케빈은 당연히 에바에게 점점 도착적이 되지 않았을까. 이 장면에서 케빈은 완전히 에바보다 우위에 선다. 에바는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자신이 엄마라고 인지했을 때는 케빈에게 이미 상처를 준 뒤다. 에바는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그리고 엄마로서의 역할을 조금씩 배워갈 때 케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케빈의 상처는 단순히 팔의 흉터가 아니라, 그가 반사회 인격장애든 그렇지 않든, 마음에 상처임이 누가 봐도 분명하다.
케빈은 항상 에바와 프랭클린보다 앞선다. 에바가 임신을 했을 때도 프랭클린은 에바의 배가 나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빈은 계속해서 에바를 관찰했다. 에바가 케빈에게 임신에 대해 설명하는 순간에도 케빈은 이미 아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고 있다. 케빈이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케빈이 에바의 배를 인지하고 난 다음 케빈이 그것이 ‘FUCK’을 통해 임신이 되었다고 말한 장면의 배치가 중요하다. 이 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케빈은 에바의 배가 불러온 사실을 보고선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그것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에바가 케빈에게 숫자를 알려주려고 할 때에 케빈은 이미 숫자를 전부 다 외우고 있었고, 대소변 훈련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혼자서 대소변을 가릴 줄 알게 되었다. 프랭클린은 그 사실에 놀라 에바에게 어떻게 가르친 것인지 묻지만 에바는 대답할 수가 없다. 에바는 어긋나고, 프랭클린은 관심이 없다. 케빈은 모든 것을 혼자서 배웠다. 케빈에게 에바와 프랭클린이 없어도 케빈은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 배워야 할 모든 것을 혼자서 학습하고 있는 중인데 부모가 무슨 소용일까.
항상 아이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에바의 벽에 지도가 붙여졌을 때는 아마도 케빈은 에바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에바를 공격하기 위한, 혹은 에바에게 잘못된 애정을 고백하는 행동은 실리아가 태어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에바는 케빈을 보고 뱃속에 있는 실리아를 걱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리아가 태어나자, 아이가 여자아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바는 실리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실리아를 ‘안아’준다. 린 램지는 이 순간 변화된 에바의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에바를 전경에 흐릿하게 처리하고 케빈을 찍었다. 케빈이 자신의 갓난 아이였을 때를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케빈은 태어난 실리아를 대하는 에바의 태도에서 묘한 질투와 낯섬을 느낀다. 어린아이에게서 항상 보여야 할 어리둥절함이 이 순간 케빈의 표정에 처음으로 서린다. 린 램지는 이 상황에서도 케빈의 태도를 모호하게 처리했다. 우리는 보통 첫째 아이가 둘째 아이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케빈은 실리아가 태어난 뒤 에바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사이에 케빈의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러니까 케빈의 몸 상태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고, 에바가 자신의 토사물을 치우는 것을 본 케빈은 처음으로 에바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케빈의 몸이 낫고선 다시 원래의 태도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케빈의 태도가 실리아의 존재로부터 왔던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케빈은 15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년기에 머물러 있다. 누구라도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커버린 케빈은 항상 딱 달라붙는 바지와 체격에 맞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케빈이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린 램지는 인터뷰에서 케빈은 스스로 크고 싶지 않은 아이라고 말했다. 크지 않은 것과 크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르다. 전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지만 후자는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빈은 왜 크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케빈의 안에서 악마는 깨어나고 있다. 에바는 케빈이 자신의 책이 출간된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케빈에게 다시 한번 다가간다. 케빈에 대해서 에바는 거리감을 좁히려고 시도하지만 번번이 케빈은 그 거리감을 다시 벌려놓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에바는 케빈이 태어나고 단 한 번도 엄마로서 성공한 적이 없다.
에바와 프랭클린의 이혼 사실을 케빈이 알고는 택배를 주문한다. 우리는 그 택배에 들어있는 잠금장치가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지 이미 봤다. 처음에는 장면 배치 순서상으로 이혼 사실을 알게 된 케빈이 무참한 살육을 계획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잠시 린 램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자.
(...) 린 램지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미국의 주요 아동 심리학자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가 나쁘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음, 사회 병리는 이제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상태로 받아들여지지만 매우 어려운 영역입니다.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자녀의 행동이 오랫동안 매우 극단적이어야 합니다. 많은 대답이 없습니다. 소위 정상적인 아이들조차도 한동안 비정상적인 행동 경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질문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완동물을 죽이는 것이 크로스 오버 순간이 될 것입니다.”
케빈이 실리아의 햄스터를 죽였을 때 이미 크로스 오버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에바와 프랭클린이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케빈은 조금 더 성장한 후에 일을 벌였을 것이다. 린 램지는 또 하나를 지적한다. 에바와 프랭클린은 케빈을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 부모로서의 행동이 부재한다는 걸 지적하는데 린 램지는 이것이 지금 미국 가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크로스 오버 순간에 에바나 프랭클린 둘 중 한 명이 케빈을 데리고 병원에 갔으면 어떠했을까.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프랭클린의 무관심은 케빈이 문제의 대상이 아니라 에바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있으며, 에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심지어 린 램지는 케빈이 실리아의 햄스터를 죽이고 난 다음 부모의 행동 자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 실리아의 한 쪽 눈에 의안을 넣어야 할 지경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케빈은 16번째 생일날 살육을 벌인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일 파티라도 되는 마냥.
영화는 에바의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과거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에바의 현재 시간은 그저 케빈의 엄마라는 이유로 케빈이 저지른 죄에 대한 죗값을 육체로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다가 자신에게 주먹을 날려도, 자신이 사려는 계란을 깨뜨려도, 자신의 집에 페인트를 뿌려도, 모욕을 줘도, 어떤 행위라도 그것이 마치 응당 받아야 하는 벌처럼 받는 것, 그리고 현재의 감각 속에서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죗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전부이다. 하지만 에바는 마치 그 육체적 징벌 행위와 스스로의 징벌로 인해 케빈에 대하여 묻고 또 묻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케빈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묻는다. 하지만 케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에바는 그런 케빈을 꽉 끌어안는다. 영화를 통틀어서 엄마 에바로서 케빈을 끌어 안는 건 그 순간이 처음이다. 에바가 교도소를 빠져나오는 숏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면회가 끝난 뒤 교도소를 빠져나갈 때 제압당하고 있는 범죄자를 볼 수 있다. 이건 명백히 마지막 쇼트와 대구가 되기 위한 쇼트이다. 첫 번째 면회가 끝난 뒤 교도소를 빠져나가는 것은 에바가 도망치는 것처럼 찍혔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말 그대로 에바는 교도소를 빠져나간다. 린 램지는 가해자의 엄마가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건 다른 누군가 할 일이다. <케빈의 대하여>에서는 비로소 늦었지만 에바가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나 그럴 예정이라면 묻고싶다. 부모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2020년 07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