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답이 없어서, 혹은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 영화가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오래전에 이루어졌고, 이 질문 또한 정성일 평론가의 비평집에 실려있는 질문과 대답이다. 그렇다면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 또한 마찬가지로 그 이야기가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코엔 형제의 <밀러스 크로싱>이 좋은 영화인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밀러스 크로싱>이 훌륭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한 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로 설명해야 하는지는 개별 영화마다 다르지만 분명한 건 영화 그 자체로서 빛을 발휘하고 있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밀러스 크로싱>이 훌륭한 영화인 이유는 엄청난 시나리오 바탕 위에 설계되었기 때문인데, 그 설계도가 A라는 완성물로 향할 수도 있고, B라는 완성물로 향할 수도 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밀러스 크로싱>은 한 편의 영화가 어디에 도착하든 그 길을 밟아 온 것에 대해 스스로 성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1990년 <밀러스 크로싱>이 개봉한 해에는 마틴 스콜세이지의 <좋은 친구들>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3>가 개봉한 해이다. 3편의 갱스터 영화. 아마 코엔 형제가 마틴 스콜세이지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보다 훨씬 젊은 세대여서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코엔 형제는 고전 갱스터 영화를 답습할 생각이 없었다. <밀러스 크로싱>의 첫 장면은 대놓고 <대부>의 오마주와 패러디를 동시에 선보인다. 이건 단순하게 <대부>를 연상시키는 작용을 하면서 <대부>를 아는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한 애정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첫 장면에서 고전 갱스터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미장센을 <대부>의 첫 장면 미장센과 비교해보면 갱스터 영화의 클리셰는 전부 희미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조명 콘스타스트는 이미 사라졌고, 캐스퍼가 리오에게 하는 행위는 대부에게 하는 행위가 아니며, 리오는 돈 비토 콜레오네의 무게감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밀러스 크로싱>을 보면서 주인공 탐이 기존의 갱스터 영화에서 보여줬던 강인한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는 버나의 주먹에 바닥에 나뒹굴며, 캐스퍼 일행에게 잡혀가서 흠씬 두들겨 맞고, 데인에게 죽음을 당할 뻔하면서 구토를 하고, 멋있게 창문으로 뛰어내려 버니를 협박하려고 했지만 버니의 함정에 빠져 오히려 망신을 당한다. 코엔 형제는 이미 고전 장르는 고전에 머무르고 자신들은 고전 장르를 비트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니 이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말에서 <제3의 사나이>에 경의를 표하고, 영화 중간중간 오손 웰스의 데쿠파주를 시현하면서 위대한 선배 감독에게 존경을 표현한다. 이 레퍼런스와 변형을 그 시절에 보았다면 분명 어떤 새로운 느낌이 전달되었을 텐데 지금에서야 그 느낌을 전달받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밀러스 크로싱>이 갱스터 영화를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첫 번째로 <밀러스 크로싱>을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고전 갱스터 영화를 오이디푸스로 해석하는 것처럼 이 영화 또한 그렇게 읽는 것이다. 탐의 아버지의 위치에 리오를 두고 탐의 어머니의 위치에 버나를 두었을 때 이 해석은 순탄하게 흘러간다. 이렇게 해석했을 때 당연히 뒤따라 오는 것은 동성애로 읽는 법도 가능하다. 탐과 리오를 동성애적 관계로 읽는 시도 또한 가능한데 이는 단순히 클래식 영화의 리터러시를 답습하는 것이다. 고전 갱스터 영화가 그렇게 읽히는 것으로 시도되는 것은 당시 동성애 영화들은 검열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기호들 안으로 들어가 비평가들이 그것을 해부했던 것인데, 1990년의 미국은 검열의 시대가 아니다. 구태여 코엔 형제가 그 시기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관객들을 20세기 중반으로 데려갈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코엔 형제의 영화들을 지금까지 봤을 때도 그들은 그런 향수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이런 유의 영화들을 보고 흔히 했던 분석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해석을 버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이 해석을 보류로 하고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탐이 버나를 사랑했다는 것으로 읽는 방법이 가능하다. 만약 이렇게 읽는다면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된다. 갱스터 영화에 멜로드라마의 성질이 담겨있는 경우는 많다. 아니 심지어 멜로드라마를 찍고 싶어서 갱스터 영화라는 장르를 차용했다는 느낌까지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을 봤다. <달콤한 인생>은 멜로드라마를 찍고 싶었던 것 같은데 영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영화다. 그렇다면 코엔 형제는 멜로드라마를 찍고 싶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중요한 건 버나와의 멜로인지, 아니면 리오와의 멜로(혹은 우정이나 충성심)인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이야기를 복기해보자. 첫 장면은 캐스퍼가 리오에게 찾아와서 자신들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는 버니를 넘겨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부탁에서 통보로 변하긴 하지만 표면상 캐스퍼는 리오에게 부탁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리오는 캐스퍼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 거절의 쇼트는 바로 탐이 놀라는 쇼트랑 붙어있다. 즉, 탐은 리오의 거절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 탐은 리오와 버나의 관계가 가벼운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든 탐은 캐스퍼의 부탁을 거절한 리오에게 충언한다. 그리고 난 다음 장면은 탐의 꿈으로 이어지고, 그 꿈에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다. 세 번째 장면은 탐이 꿈에서 깬 다음 도박에서 모자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버나에게 찾아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꿈) 사이에 탐은 버나와 밍크랑 도박을 한 것인데, 이 도박은 단순한 도박인가?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 장면에서 탐은 리오가 캐스퍼의 부탁을 거절한 것에 대해 큰 손실이 일어날 것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에 버나와의 만남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버나와의 만남의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에 버나를 품고 있기 때문인가? 혹은 리오의 선택이 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버나와 리오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함인가? 리오가 캐스퍼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 탐의 반응은 두 가지 가설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있는데, 두 번째 장면을 어떻게 읽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대답이다. 이 대답이 가설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난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문이 되는 “모자”. 코엔 형제는 인터뷰에서 아무 의미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건 거짓말이 분명하다. 이건 나중에 잠깐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하고 우선은 이 두 번째 장면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자.
네 번째 장면에서 탐의 집에 리오가 찾아온다. 리오는 없어진 버나를 찾고 있다. 러그에게 버나의 미행을 시켰는데 러그도 연락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리오는 탐을 찾아왔다. 하지만 버나는 그곳에서 탐과 이미 잠자리를 가진 후다. 우리는 영화를 다 봤기 때문에 그 순간 이미 러그가 죽은 것을 알고 있다. 러그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영화 후반부에 밍크가 죽였다는 버니의 대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걸 믿을 수 있는가? 만약 탐이 버니에게 리오에 대한 감정으로 접근한 것이라면 탐이 러그를 죽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 만약 탐이 버니에게 접근한 것이 진심이라면 러그를 죽여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영화 속에서 시간 계산을 해봤을 때 러그가 연락이 되지 않은 시점은 아마 그날 당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탐이 술에서 깨고 버나에게 찾아가 같이 시간을 보냈던 시간이라고 추측되는데, 그렇다면 밍크가 러그를 죽였을 때 탐과 버나가 모를 수 있을까? 러그의 죽음을 우리가 보게 되는 장면 그다음에 바로 붙는 장면은 셰난도아 클럽에서 밍크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만약 밍크가 죽였다면 밍크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이 대답은 영화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다. 혹은 영화에서 찾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떠하든 러그의 죽음도 어떤 길로 향하더라도 그 끝은 길을 잃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우리에게 선택지를 던져주고 그 선택지에서 어떤 답을 내려도 코엔 형제는 충족시킬 수 있게 혹은 블랙홀에 빠져들게 영화를 찍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좀 더 복잡하게 영화에 다가가야 한다. 위의 방법대로 우리의 머릿속에서 인물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그려가면 너무 복잡한 나머지 우리가 길을 잃기 쉽다. 우선 인물 관계도를 삼각관계로 그려보자. 첫 번째 삼각관계는 오이디푸스로 해석할 수 있는 탐, 리오, 버나다. 그리고 또 다른 삼각관계는 데인, 밍크, 버니다. 우리는 밍크와의 만남에서 데인과 밍크가 한 편이지만 밍크는 데인에게 얻은 정보를 버니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캐스퍼와 데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탐의 작전은 데인과 밍크를 동성애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이 삼각관계는 동성애의 삼각관계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삼각형은 탐, 버나, 버니의 삼각관계다. 탐이 분장실로 들어가 버나와 다툼을 벌이는 장면에서 우리는 버나가 왜 리오와 관계를 맺는지 알 수 있다. 버니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버나가 리오와 관계를 맺어 리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적이 있어서다. 그다음 장면에서 버니는 탐의 집에 찾아온다. 여기서 버니는 자신의 입으로 누나가 자신에게 잠자리를 가르쳐주려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마지막 삼각형은 근친상간의 삼각관계다. <밀러스 크로싱>은 이 삼각형의 꼭짓점에 있는 인물들이 다른 삼각형으로 들어가며 휘저은 다음 도형을 무너뜨리고 결국 하나의 삼각형만 남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탐과 데인, 그리고 캐스퍼의 삼각관계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질문할지도 모른다. 내가 설정한 삼각형은 기본적으로 애정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아마 코엔 형제는 그렇기 때문에 캐스퍼의 아내와 아들을 등장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식의 설명도 필요하다. 우리는 이 영화가 절반을 기준으로 서로 포개지는 것을 알고 있다. 리오가 버나에게 청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탐이 버나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리오는 탐을 흠씬 두들겨 팬 다음 탐을 쫓아낸다. 여기까지를 절반으로 보았을 때 영화는 마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반부 후반부로 나뉘었을 때 우리가 전반부에서 보는 것은 캐스퍼의 부탁을 리오가 거절한 뒤에 탐이 리오와 버나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야기다. 후반부에 우리가 보는 것은 명백히 캐스퍼와 데인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우선 이렇게 커다란 이야기 얼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탐과 리오, 그리고 버나의 삼각형에 들어와서 이 삼각관계를 뒤흔드는 것은 버니다. 리오는 버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버니를 보호한다. 버나는 버니를 보호하기 위해 리오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탐은 리오를 위해 버니를 넘기려고 한다. 이때 탐이 사용하는 전략은 리오와 버나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에 대한 이유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리오와의 관계 때문인지, 버나와의 관계 때문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다음 삼각형인 탐과 버나, 그리고 버니의 관계 역시 위와 마찬가지다. 탐은 버나를 좋아한다는 가정 하에 탐은 버나를 좋아하고, 버나는 탐을 좋아하거나 혹은 리오와 관계를 맺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탐과 관계를 맺는다. 리오가 조직의 보스이긴 하지만 버니가 처음 찾아간 사람은 리오가 아니라 탐이다. 이 장면에서 버니는 분명하게 리오와 탐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 주길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즉, 버나가 리오뿐만 아니라 탐과 관계를 맺는 것은 버니를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데 이 삼각관계는 어떤 인물이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깨뜨린다. 혹은 둘로 나누어진 탐으로 바라본다면 다른 쪽의 탐이 이 삼각형에 들어와 이 관계를 깨뜨린다. 나는 어떤 인물이 어떤 인물에게 마음이 있다는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았다. 이건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탐과 버나는 양가감정을 지녔다고 보는 편이다. 탐은 리오와의 관계 때문에 버나를 이용했다는 말을 납득하기엔 무언가 찜찜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나를 사랑했다는 것도 무언가 찜찜하다.
위에서 언급한 절반으로 나눌 수 있는 부분을 잘 살펴보면 탐이 리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 탐은 집에서 캐스퍼에게 접근하기 위해 전화 통화를 한다. 여기서 코엔 형제의 카메라는 탐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명백하게 연출된 카메라 위치다. 지금 이 순간 탐의 의중을 카메라가 들여다보는 위치가 아니라 카메라는 탐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탐의 ‘뒤’에 카메라를 위치시켰다. 즉, 캐스퍼에게 접근하는 것이 버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리오와 버나의 결혼을 막고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라 이 제스처에는 무언가 숨겨져 있는 뉘앙스가 풍기는 것이다. 이런 성질의 쇼트는 또다시 등장한다. 순진하게 영화를 탐이 버나를 사랑했다는 식으로 바라보다 보면 버나에게 버니의 위치를 듣고 그 즉시 캐스퍼에게 그 장소를 알려주는 장면은 설명하기 힘들다. 그런데 캐스퍼에게 버니의 위치를 알려주고 난 뒤 바로 그다음 장면은 버니가 끌려가는 장면을 탐의 옆모습으로 보여준다. 이 또한 카메라 위치는 어디든 상관없었지만 탐이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카메라 위치다. 우리는 탐의 얼굴 절반 밖에 볼 수 없다. 나머지 뒷면의 절반에 감춰진 무언가. 탐은 리오를 위해 버니를 넘겼지만 버나를 위해 리오를 쏠 수 없던 것은 아니었을까.
버나는 어떠한가. 버나는 정말 탐을 좋아했던 것일까? 난 이 영화에서 맨 마지막 탐의 쇼트와 빗속에서 탐과 버나가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버나와 버니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둘은 근친관계로 바라볼 수 있고, 그 관계는 버나의 일방적 관계라고 느껴진다. 버나는 버니를 위해 리오에게 접근했고, 그리고 탐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탐과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버나는 탐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탐이 리오와 버나에게 양가감정을 지녔던 것처럼 버나도 버니 뿐만 아니라 탐에게 마음을 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버나는 탐에게 총을 겨누고도 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버나는 버니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탐에게 버니가 죽인 이유를 묻는다. 탐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고 오로지 리오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버나는 탐이 리오와의 관계가 청산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탐의 대답에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탐은 관계가 끝난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보충 설명한다. 이건 버나의 입장이지 않은가. 버나는 버니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하지만 버니를 계속해서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버리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 순간 탐은 버나에게 아직 버니가 살아있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버나가 묻는다. “나보고 당신 말을 믿으라고?” 탐이 대답한다. “아니”. 아마도 탐은 이 순간 사실과는 다른 대답을 한 것이지만 유일하게 진실을 전달한 것이다. 버니가 아직 살아있지만 곧이어 죽일 것이기 때문에 버니가 살아있다는 사실보다 내 말을 믿지 말라는 그 말이 버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달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버나는 탐에게 욕을 내뱉지만 탐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탐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나는 탐을 두고 떠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비 오는 장면이다. 이 비는 이 둘의 이별을 대신해서 우는 것이다. 버나의 뒷모습은 비 속에서 너무나도 슬피 보인다.
다음 삼각형은 데인, 밍크, 버니의 삼각관계다. 이 삼각형을 깨부수는 것은 캐스퍼의 존재다. 밍크가 데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버니에게 주었는데, 버니가 이 정보로 캐스퍼의 수익에 손을 댄 것이다. 하지만 캐스퍼와 데인은 버니의 정보가 밍크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즉 데인은 밍크에게 마음이 있고, 밍크는 버니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비추어지는데 버니는 밍크나 데인에게 어떤 사사로운 감정도 없어 보인다. 오로지 돈을 위해 행동한 것처럼 보인다. 이 삼각형은 다른 두 개의 삼각형보다 관객이 정보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플롯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 하지만 세 개의 삼각형이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면서 운동감각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이 삼각형은 반드시 필요한 도형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탐은 캐스퍼와 데인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시도하는데 이 시도는 데인과 밍크의 관계를 폭로하면서 이루어진다. 밍크가 버니에게 정보를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데인의 입장에서 밍크에게 느끼는 배신감을 탐이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탐이 리오와 버나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과 똑같다.
탐이 모든 것을 계획했는지 혹은 그러하지 않았는지 관객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탐이 계획을 했더라도 탐의 생각대로 모든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영화 속에서 공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퍼즐을 맞춰보면 코엔 형제의 아이러니가 어떤 식으로 발동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탐의 행동이 그러하다. 리오와 버나의 관계를 깨뜨리려는 시도가 캐스퍼와 데인에게로 옮겨지고, 분장실에서 탐과 버나의 대사를 자세히 들어보면 탐은 버나에게 리오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발에 총을 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발에 총을 쏘는 장면은 단 한 쇼트 등장한다. 캐스퍼의 부하가 리오의 침실로 침입했을 때 리오는 한 명을 죽이고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려가 다른 한 명이 창가로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난사를 퍼붓는 장면에서 총을 맞는 캐스퍼의 부하는 총을 맞으면서 자신의 총을 난사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자신의 발을 쏜다. 이 부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정확하게 발에 총을 쏘는 행위로 찍혔다. 또한 이 장면은 리오가 멋지게 창밖으로 뛰어 내려가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인데 탐이 버니를 살려주고 난 뒤 버니가 캐스퍼를 처리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에서 탐 또한 버니를 협박하기 위해 멋지게 창밖으로 뛰어 내려간다. 하지만 탐은 리오와 같은 클래식한 갱스터 사나이가 아니다. 버니의 함정에 빠져 앞으로 고꾸라진 탐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반복은 탐이 버니를 죽여야 하는 장면에서 밀러스 크로싱의 반복이다. 탐은 버니를 살려준다. 하지만 탐은 곧이어 버니의 위치로 추락한다. 탐이 버니와 걸었던 그 숲길을 데인과 함께 걷는다. 한데 이 장면은 우리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던 2번째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꿈. 탐이 버니를 죽여야 하는 그 장면에서 버니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소리친다.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탐은 그렇게 울부짖지 않는다. 탐은 그냥 하늘을 올려다본다. 우리가 두 번째 장면에서 봤던 그 하늘. 탐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장면은 플래시 포워드가 된다. 예지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 꿈은 어떤 경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꿈의 위치다. 그 꿈의 위치는 버나와 밍크와 도박을 하고 난 다음 위치하는데, 도박 장면은 없으니 버나와의 장면을 대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버나와의 만남이 예지몽으로 이어지고, 그 예지몽이 버니를 살려주는 것으로 이어진 다음 자신의 죽을 고비로 이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의견이든 코엔 형제는 그걸 명확하게 제시해 주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공명이 탐의 계획에서 조금씩 어긋나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그 아이러니가 가볍든 무겁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코엔 형제는 모자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지만 모자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모자를 도박에 걸었고, 모자를 찾아왔고, 리오에게 맞을 때도 모자는 꼭 챙기며, 데인이 탐을 죽이려고 할 때 모자를 벗기고, 결국 마지막 쇼트에서 모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사용한다. 탐의 모호한 욕망, 변형된 갱스터 영화의 총 대용으로 사용되는,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박찬욱 감독이 제시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소품 등이지만 나에게 모자는 탐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담긴 눈을 숨기기 위한 소품이다. 리오에게 맞을 때도 계속해서 떨어지는 모자를 줍는데 그건 위에서 언급한 탐의 뒷모습을 찍는 카메라의 위치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꿈에서 날아가는 모자는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마지막 쇼트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생존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필적할만한 아이러니는 결국 결과다. 탐이 리오와 버나 사이에서 갈등해서 누군가를 선택했던, 버나가 리오와 탐 사이에서 방황을 했던, 그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결과는 그들이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탐은 버니를 쐈다. 버니에겐 데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캐스퍼를 죽일 수 있는 건 버니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단순히 변명 같다. 탐은 버니가 캐스퍼를 죽인 것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버니의 자리에 누군가를 위치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버니를 쏜다. 버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탐의 살해는 리오를 위한 일임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버니를 살려둬도 리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이 스친다. 버니가 문제가 됐던 것은 캐스퍼의 존재 때문이다. 캐스퍼가 죽은 이후에 버니가 살아있던 죽어있던 리오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탐은 왜 버니를 죽여야 했던 것일까? 그건 버니가 떠나지 않아서이지 않았을까. 버니가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곳에 머문다면 버나는 계속해서 근친상간의 금기 속에서 괴로워할 것이고, 리오와 버나의 관계는 미적지근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 말은 탐과 리오 역시 버나를 두고 경쟁 상대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밀러스 크로싱>이 너무나도 쉽게 오이디푸스로 읽히는 점은 아마도 상징적 아버지의 법에 따라 상징적 어머니를 욕망하는 그 마음을 거뒀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런 상징적 해석이야 영화를 뒷받침하는 내용일 뿐이다. 다만 우정이든 사랑이든 충성이든, 버나의 쓸쓸한 뒷모습을 봤던 것처럼, 탐은 떠나가는 리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라도 하듯 모자를 눌러쓴다. 그때 카메라는 기어코 탐의 눈을 보여준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부족한 탐의 눈동자에서 우리의 마음은 움직인다.
2020년 0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