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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Aug 16. 2020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침묵의 시선>

  2014년이다. <침묵의 시선>이 나온 것은 <액트 오브 킬링>이 나오고 1년 뒤다. 이건 굉장히 중요하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두 편 모두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100만 명의 넘는 공산주의자들 혹은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씌워 학살한 역사를 다룬다. <액트 오브 킬링>은 가해자를 다루고, <침묵의 시선>은 피해자를 다룬다. 그러니까 <액트 오브 킬링>을 찍은 다음 무언가 부족했기 때문에 <침묵의 시선>이 등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침묵의 시선>은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기획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인공인 아디와 인도네시아 인권위원회가 조슈아 오펜하이머에게 기획을 부탁한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뜻이든 <침묵의 시선>이 태어난 것은 <액트 오브 킬링>이 못다 한 무언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물론 다큐멘터리도 현실은 아니다. 다만 현실과의 접점에 다큐멘터리가 영화보다 더 가까이 붙어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실제 하는 것을 찍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에서 구현하는 세계가 감독이 직조한 세계이기 때문에 크게는 미장센에서, 작게는 소품 하나까지 그 의미들을 넣거나 혹은 일부러 피하거나 한다면 다큐멘터리의 세계에선 그것들이 반강제적으로 들어와있다. 여기서 반강제적이라는 것은 <액트 오브 킬링>에서의 안와르 콩고나 <침묵의 시선>에서 아디를 고른 것은 조슈아 오펜하이머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그들 각자의 모든 것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보는 미장센이 현실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현실이 너무나도 직조한 영화 같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인물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적합하며, 학살 이후 이들의 삶을 유추하기에 너무나도 분명하다. 영화는 넓은 의미에서 3곳에서 진행된다. 아디의 공간, 아디가 티브이를 보는 공간, 가해자들의 공간. 아디의 집은 아디의 부모의 집처럼 가난하지 않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공간에 비하면 아디의 집은 소박하다. 가해자들의 공간은 한없이 넓고 쾌적하지만 아디의 부모님의 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 가난의 대물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의 양극화. 그것이 정치적인 맥락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인가? 단순한 사실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얼마만큼 나누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아디가 티브이를 보는 공간은 어떤 공간인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영화에서 아디의 얼굴과 티브이를 번갈아 보여주다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아디와 티브이의 투 쇼트를 보여준다. 그 공간은 어디였을까? 마치 초현실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는 곳. 아직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자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현재의 인간들이 만나는 곳. 가해자는 없고 그들의 영웅담을 기록해놓은 티브이만이 놓여있다. 그 티브이를 경유해서만 가해자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아디는 몇 번이고 티브이를 본 끝에 그들을 찾아간다. 아디가 티브이를 볼 때마다 귀뚜라미 소리가 반복해서 들린다.       


  영화가 시작하면 귀뚜라미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이 소리는 어느 밤에 들어본 소리 같다. 역사를 알려주는 자막이 보일 때 이 소리가 화면에 보이는 시간대에 어울릴만한 소리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소리는 그다음 아디의 부모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건 어느 한 공간의 소리가 아니다. 이후에 이 귀뚜라미 소리는 아디가 티브이를 보는 장면이나 아디의 부모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만 다시 등장한다. 어쩌면 이 귀뚜라미 소리는 학살 당시 들렸던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소리는 계속해서 피해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거라면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상한 건 단 한 번 이 소리가 등장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아주 초반부에 아디의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는,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 아디의 어머니가 아디를 낳은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아디의 어머니가 아디를 낳는 순간 학살의 고통에서 벗어난 순간이기 때문에 그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너무 막연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엔 들리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분명한 건 이 소리는 촬영 그 순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조슈아가 입힌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이 충격적인 것은 가해자들의 행위, 아니 단순히 ‘가해자들의 행위’라는 말로는 축약시킬 수 없는, 그 잔인한 살생의 행위들을, 인간이라면 단연코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그 행위들을, 역사가 끝끝내 잊어선 안되는 그 행위들을 마치 애국인 것처럼, 혹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응당 한 것처럼, 자신들의 행위에 떳떳함이 묻어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모르는 입장에서 우리의 상식에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조슈아가 찍었기 때문인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마주했을 때 과연 이것이 진짜인지에 대한 의문이 품어졌을 때, 가해자들의 아이들 그러니까 자식 혹은 손주에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그 사실과 그 방법까지 자세하게 서술하는 장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을 때, 그건 그들이 정말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아니 죄책감이 없다는 것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위에 죄책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임이 느껴졌을 때 그들의 잔인함과 뻔뻔함(이런 단어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으로 역겨움이 몰려왔다. <침묵의 시선>에서는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영화에서 피해자의 사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히 아디의 아들에게 아디가 학교에서 배운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교육하는 내용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액트 오브 킬링>에서 안와르가 그들의 손주로 보이는 아이들과 자신의 영화를 보는 장면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정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무력한 피해자들은 고작 자신의 자식들에게 말로 설명해 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믿는 그 순진함, 그러니까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 순진함이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 순진함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앞에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액트 오브 킬링>은 두 가지 성과를 이루었는데, 인도네시아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불씨를 피웠고, 또 하나는 안와르의 사과를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이 글 앞에서 밝혔듯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시선>이 태어난 까닭은 분명 부족함이 있어서다.     

 

  그 부족함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이 영화는 앞에서 내가 바라본 방식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본 <침묵의 시선>은 단순하게 잘 직조된 세계가 아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무수히 많은 촬영 소스에서 선택한 그 클립들이 결합되면서 발생하는 무언가보다, 혹은 조슈아가 선택한 쇼트 내에서 발광하는 기호들보다, 아디의 직업이 안경사이기 때문에 나오는 은유적인 표현 같은 것들보다, 더 중요한 건 영화의 지속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반응이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해자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에 따라 그들의 태도가 변화하는 것을 보았을 때, 혹은 안와르의 변화를 지켜봤을 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낡은 질문이 따라온다. 그건 하나도 새롭지 않다. 다만 안와르를 따라가면서 안와르의 변화를 끝내 포착한 그 사실이 조슈아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견지했을 때 프레임 내에서 안와르의 변화보다 그 믿음에 대한 조슈아의 순진함이 감동스러운 것이다. <침묵의 시선>에서 제일 감동스러운 장면은 가해자의 딸이 사과하는 장면이다. 가해자의 사과를 끝내 받을 수 없었던 <침묵의 시선>은 가해자의 딸에게 그 사과를 받아낸다. 이건 단순히 사과를 받는 문제가 아니라 조슈아는 이 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이미 노안이 왔고, 육체는 늙어가고 있다. 그들이 죽는다 해도 역사는 남는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것은 그다음 세대의 사람들이다. 인간이라면 이 책무를 모른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카메라로 찍은 것은 단순히 사과를 받은 행위가 아니라 가난의 대물림과 같은 책임의 대물림이다. 그때 그녀가 사과를 해줘서 정말 다행인 것도 사실이다. 거기부터 희망이 깃들기 시작한다. 안와르는 반성(혹은 반성하는 체) 했지만 아디의 삼촌은 끝내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 그의 집을 나오면서도 조슈아의 카메라는 아디의 삼촌을 찍었다. 그건 분명 희미한 희망을 담고 그에게 렌즈를 향하게 한 것인데, 내가 본 것은 삼촌의 표정이지만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회한은 가시화할 수 없는 것을 찍을 때 발생되는 단순한 환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희망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액트 오브 킬링>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피골이 상접한 아디의 아버지의 육체를 찍을 때 나는 그 쇼트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죽어가는 육체를 마치 전시하는 듯 찍을 때 즉각적으로 동정이라는 감정이 유발되는 그 관객의 위치가 과연 윤리적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맞다. 그것은 이미 오래된 담론이다. 게다가 난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방 안을 누비는 아디의 아버지를 찍은 장면은 지금까지 봐왔던 톤과 다른 느낌이었기에 이질적이었다. 영화를 다 본 뒤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이 장면은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찍은 것이 아니라 아디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었다고 한다. 미쳐버린 사람. 35년이 지났지만 공포는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집인데도 불구하고 집으로 보내달라는 절규. 이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나 다름없다. 작년의 나였다면 이 쇼트는 찍지 말아야 했어라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두 다리로 서있지도 못하는 늙은 육신이 공포에 질려 방 안을 누비는 그 모습을 찍었을 때 그는 이 장면이 극장에서 상영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질문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작년 416재단에서 사업 보고회를 열었을 때 참석했었다. 그때 희생자의 부모들은 어떻게든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고, 수면 위로 끌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거리 전시, 미술관 전시, 연극, 재난안전교육, 시나리오 공모전 등으로 계속 언급하고, 다시는 세월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들은 기억하고, 희망을 품어, 안전한 미래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유명한 고다르의 말.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영화는 그곳에 가서 찍어야 한다. 그들의 일상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찍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는 왜 존재하는가?      


  침묵의 시선은 침묵하고 있는 아디의 시선일 것이다. 물론 침묵하고 있는 가해자들의 눈먼 시선이라는 중의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이겠지만 그들의 침묵은 예상된 것이며 그들의 눈먼 시선보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그들을 바라보는 아디의 시선이 가슴에 남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마치 아디가 그 학살 속에서 살아온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디는 람디가 죽고 2년 뒤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학살이 진행 중인 과정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인물과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아디의 표정에서 그가 람디의 가족이기 때문에 겪은 무수한 고초들을 겪으며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니, 이건 거짓이다. 그의 표정에선 그런 인생의 고초가 아니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걸 알 수 있다면 우린 적어도 아디의 입장에 가야 한다. 아디의 위치에 선다 해도 우리는 아디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디의 표정에서 우리의 가슴이 먹먹해지는 까닭은 그 표정을 바라봄으로써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성공한 서사다. 하지만 <침묵의 시선>은 실패한 서사다. 하지만 내겐 안와르의 구토의 몸짓보다 아디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이 더 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디가 티브이를 바라볼 때 그 표정은 무엇일까? 아디는 가해자들의 인터뷰를 보고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조슈아의 카메라가 순진함을 갖고 있는 것만큼 아디는 인간에 대한 순진함이 있다. 모두가 악마라고 지칭할 때 아디는 그들은 악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반성하고 사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막연한 느낌이지만 아디의 표정에서 그 인간들에 대한 간절한 부탁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부탁이 거절되거나 보류되거나 혹은 무참히 밟혀질 때 아디의 표정은 슬픔이 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리고 난 다음 아디는 다음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까.     


  2020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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