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Y Jul 08. 2020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

 2019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지만 2020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은 봉준호의 <기생충>이기 때문에 영화를 공부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에 지지 않을 한국 영화감독을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본이 부러운 것은 일본 영화엔 어른스러움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시공간의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예술은 좋아진다고 했다. 어쩌면 일본의 현 상황은 2011년 대지진 이후 계속되는 불안 속에서 더욱더 좋은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본 영화에는 오래전부터 근심 어린 시선이 담겨있었다. <도쿄 소나타>는 어른만이 찍을 수 있는 근심이 담긴 작품이다.     


  류헤이가 회사에서 해고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의 실업난이 중심이거나 실업으로 인해 가정이 붕괴되는 영화가 아니다. 그랬다면 일본의 실업난이 중심이 되거나 실업자가 되고 먹고 살 길이 없어지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혹은 류헤이의 아내 메구미가 노동을 하거나 아이들이 노동을 하면서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가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실업으로 인한 생계적 어려움이나 가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류헤이의 실직은 오로지 류헤이의 청소부로의 전환으로만 발생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류헤이가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큰 아들 타카시의 군 입대 문제가 진행되고, 켄지의 학교생활 및 피아노 교습 문제가 진행된다. 구로사와는 항상 정체성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그 질문은 <큐어>뿐 아니라 그 뒤의 영화들에서도 계속된 질문인데 <도쿄 소나타>에서도 그 질문은 역시 전면화되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퍼포먼스’이다. 실직이 된 후 류헤이는 계속해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더 이상 타나타 회사의 ‘관리 부장’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메구미와 두 아들에게 타나타 회사의 ‘관리 부장’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류헤이의 고등학교 동창 쿠로스도 마찬가지이다. 쿠로스의 퍼포먼스는 3개월이나 이어지고 있다. 퍼포먼스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배우로 류헤이를 섭외하지만 쿠로스의 아내는 이 섭외 때문에 쿠로스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된다. 아마도 쿠로스 아내가 류헤이에게 한 질문은 일종의 추측의 확신을 위한 떠보기식의 질문이었을 것이다. 쿠로스의 아내는 류헤이에게 야근을 하냐고 물으면서 회사 사정이 좋냐고 묻는다. 류헤이의 대답은 쿠로스와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 대답이지만 류헤이의 통화가 끝난 후 자리에 돌아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것으로 연극을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쿠로스의 딸은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류헤이가 쿠로스의 집에 찾아가서 쿠로스와 그의 아내가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 후 쿠로스의 딸을 마주쳤을 때 쿠로스의 딸이 보낸 시선은 원망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역할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자에 대한 원망. 영화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강제로 동반자살했다는 정보만 알려주지만 강제한 주체가 쿠로스인지 쿠로스의 아내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가 드러나는 것이 죽음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죽기 전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류헤이나 쿠로스에 한정되지 않는다. 무료 배급소에서 볼 수 있는 정장을 입은 사내나 류헤이가 청소부로 취직을 한 뒤 류헤이의 사수인 늙은 남자 역시 일이 끝난 뒤 정장을 입고 퇴근한다. 이 퍼포먼스는 현재 일본의 문제다.      


  하지만 실직자만이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류헤이와 쿠로스의 퍼포먼스를 눈치챌 때 메구미 또한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그녀가 강도를 만나기 전까지 집에서 나오는 순간은 오로지 켄지의 학교에 불려갔을 때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도를 만나서 마트에 갔을 때 메구미는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집에서 마트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류헤이가 출근할만한 거리이기도 하며 우리는 강도의 차가 도시를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메구미의 행동반경에 비한다면 그것은 한없이 먼 거리이다. 류헤이가 관리 부장과 가장 역을 맡았다면 메구미는 아내와 엄마 역을 맡은 셈이다. 이미 이 역할놀이 극은 철학적 논제로 지적된 바 있지만 구로사와는 이 문제가 20-30년 전 일본부터 현 일본까지 아주 큰 문제로 자리 잡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 같다. 그는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 퍼포먼스의 문제는 위치를 잃었을 때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즉, 류헤이가 해고를 당했을 때 류헤이는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메구미가 강도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며 강도에게서 벗어났을 때 다시 돌아온 것은 지긋지긋한 역할극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구미는 차를 살 생각도 아니지만 차를 구경하러 갔다가 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 차가 아니라 개인이 운행하기 적합한 차량에 관심을 둔다. 강도가 훔친 차량은 색만 다르지 정확하게 동일한 차종이다. 즉, 메구미는 계속해서 역할극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반복하는 것이지만 역할극을 그만둔다는 것은 정체성의 죽음을 뜻한다. 그렇게 죽고 나면 남은 영혼은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메구미가 일으켜달라며 손을 내미는 숏은 이상한 슬픔이 묻어나는 쇼트다. 이건 역할극에 지친 자가 내미는 손길이다. 이 쇼트는 구로사와가 J-호러물의 대가인 것을 드러내는 쇼트다. 그녀가 손을 내미는 것은 허공이며 누워있기 때문에 하늘이다. 그리고 쇼트가 나눠지고 프레임 내에 그녀의 팔만 보일 때 그건 마치 유령에게 내미는 손길 같은 섬뜩하면서도 오싹한 슬픔이 느껴진다.      


  이 퍼포먼스는 타카시나 켄지는 부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역할극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역할극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속세의 역할극이다. 하지만 이 역할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숨통은 조여올 것이다. 구로사와는 아직까지 타카시나 켄지는 그런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나누어진다. 류헤이는 집 안에서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타카시와 켄지는 가장의 권위에 반기를 들며 나아가 가장을 피하고 싶은 모양새다. 그렇기 때문에 타카시는 입대 신청서를 메구미에게 먼저 보여준 것이고 켄지는 피아노 교습을 다닌다는 사실을 류헤이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류헤이의 집은 이상하리만치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철로 바로 옆에 있다.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이 위치의 방점은 지하철이 아니라 지하철 소음과 지하철의 불빛이 집 안으로 침입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프닝 씬과 맞닿아있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신문지와 잡지들이 펄럭거린다. 메구미가 뛰어나와 창문을 닫고 들이친 빗물을 닦는다. 그리곤 다시 창문을 열고 밖을 지켜본다. 위에서 언급한 메구미의 상태와 연관이 있겠지만 집 내부로 침투하는 무언가만 놓고 본다면 이는 지하철 소음, 혹은 불빛과도 연결된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롱테이크와 롱숏의 대가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장기들이 발휘되는데 인상적인 것은 계속해서 외부에서 내부로의 침입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비와 바람, 그리고 소음이 집 내부로 들이닥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은 외부의 풍경에 계속해서 침투당한다. 회사 내에서도 물론, 켄지의 학교나 피아노 교습소 등 많은 공간이 외부의 풍경이 우리의 시야에 포착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결국 프레임 내의 물질이 단순히 프레임 내부에 머물러 있는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로 확장한다. 구로사와는 자신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연출을 지향한다.     


  결국 이러한 프레이밍은 가족의 분열과도 맞닿아있다. 홈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식탁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쿠로키 식구의 식사 장면을 포함한다면 이 영화에서 식사 장면은 총 7번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류헤이의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은 크게 세 위치에서 찍혔다. 계단 쪽에서 찍힌 것과 그 반대쪽에서 찍힌 것, 그리고 거실 쪽에서 찍혔다. 카메라의 위치를 언급하기 전에 지적해야 할 사항은 쿠로키의 집과 비교되는 부엌의 크기이다. 류헤이는 관리 부장의 직급을 가졌지만 아주 평범한 일본의 중산층 가정일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가정에 속하기는 하여도 그 피라미드 계급에서 하위 계급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쿠로키의 집에서도 역시 바깥 풍경이 도드라지는데, 그곳에 우리 시야에 닿는 것은 쿠로키의 자동차이다. 이는 메구미가 자동차 매장에 간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엌에서의 카메라에 담기는 프레이밍은 류헤이의 집에서는 무언가가 걸릴 수밖에 없는 좁은 구조의 부엌이다. 가장 중요한 식사 장면은 단연코 일곱 번째 식사겠지만 그 이전에 네 번째 세 식구의 저녁식사와 다섯 번째 네 식구의 저녁 식사가 중요할 것이다. 네 번째 세 식구의 저녁식사에서 유일하게 카메라는 집 안에 있지 않고 집 밖에 있다. 집 밖으로 나간 카메라가 찍는 것은 세 식구의 식사 장면이라기보다는 메구미 혼자서 밥을 먹는 장면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 다음에 메구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장면은 메구미가 일으켜달라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장면이다. 다섯 번째 네 식구 식사 장면에서 우리는 가부장제의 식탁을 볼 수 있다. 가장이 숟가락을 들어야 그제서야 식구들은 밥을 먹을 수 있다. 이 장면에서 프레임이 나눠놓은 것은 명백히 가장과 장남을 오른편에, 아내와 막내아들을 왼편에 둔 것이다. 이는 다분히 가부장제의 영향이다. 마지막 식사 장면은 뒤에서 거론하도록 하겠다.     


  네 식구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물은 장남 타카시이다. 그는 세 식구가 모인 식사 자리에 등장하지 않고 미군에 입대를 원한다. 약간은 도식적이고 구로사와의 정치관을 대변해 주는 기능적 인물로 비치기는 하지만 주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타카시의 미군 입대를 반대하면서 류헤이가 내세운 것은 일본을 위해서 일은 해도 미국을 위해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현 일본 기성세대의 의견일 것이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는 하겠지만 영화인들은 2차 세계 대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피바다만 만들 뿐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검은 비>에서 전쟁이 불러오는 평화보다 전쟁이 없는 긴장 관계가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구로사와가 봤을 때 일본의 청년들은 그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이 문제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갈등으로 비치는 것은 메구미의 꿈이 말해준다. 메구미의 꿈속에서 타카시가 하는 말은 수없이 영화 속에서 반복된 장면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전쟁에 참가한 청년들이 결국 경험한 것은 무수한 살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꿈이 무시무시한 것은 어쩌면 반복된 외침이 아니라 그러한 살인을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아들이 살아돌아오기를 희망하는 메구미의 소망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꿈 해석은 아무나 해선 안되고 아무나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여기서 그치겠다. 타카시는 그런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고 결국 미국에 남는 것을 결정한다. 그것은 도피로 읽어선 안된다. 결국 퍼포먼스는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로사와의 생각을 하나의 시도로 옮긴 것이 타카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어린 켄지는 기요시 월드의 희망이다. 켄지는 학교에서 코바야시가 야한 잡지를 본다는 사실로 코바야시를 공격한다. 코바야시의 행동은 선생으로서 부당한 행동이었지만 켄지의 행동도 부당한 행동은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켄지가 코바야시에게 사과하러 갔다는 사실이다. 코바야시에게 사과를 하면서 켄지가 본 것은 선생님의 역할을 실패한 코바야시다. 초등학생의 사과를 차갑게 내쳐버리는 선생님. 코바야시는 어른의 역할, 선생님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상처를 받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켄지에게 쌀쌀맞게 행동했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면 애초부터 선생의 자격 따위는 없는 인간이다. 켄지는 코바야시의 비겁한 면을 본 뒤 돌아오면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카네코를 본다. 켄지는 여기서 피아노 소리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카네코에게 이끌린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를 치던 아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춰도 계속해서 켄지의 시선은 고정되고, 무엇보다 프레임의 중심에 피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카네코가 있다. 즉, 켄지가 피아노를 치게 된 이유는 코바야시의 비겁한 행동, 그러니까 켄지의 사과를 선생님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카네코라는 다른 선생님에게 향하게 된 것이다. 켄지의 요구는 단지 어른다운 어른이었을 것이다. 켄지의 아버지와 선생님 코바야시는 거친 소리만 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어른이다. 엄마 또한 가장의 아내일 뿐이다. 그래서 켄지는 외로웠을 것이다. 카네코는 외로운 켄지의 재능을 알아본 유일한 어른이다.   

   

  많은 사람들이 류헤이가 차에 치이고 난 뒤 깨어났을 때부터 이 영화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이 영화의 초현실주의적인 터치는 그곳부터라기보다는 정확하게는 ‘3시간 전’이라는 타이틀이 영화 스크린에 쓰이고 난 전후의 시점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영화가 갑자기 진행하던 시간을 정지시키고 되돌아가서 앞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다만 이 영화가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방식과는 너무나도 상의한 방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이 타이틀이 뜨는 시점의 전후를 파악해보면 류헤이는 화장실에서 거액의 돈이 담긴 돈 봉투를 ‘우연찮게’ 줍는다. 그리고 메구미는 강도에게 협박을 당하며 포박까지 당하지만 메구미의 지속적인 욕망인 집을 벗어나는 행위를 촉발시킨다. 켄지에게는 친구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꿈 장면 때문에 정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혹은 류헤이가 메구미와 마주치고 난 뒤에 시간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겠지만, 켄지의 머리가 다치고 난 다음 모든 사건이 촉발된다. 이건 사건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려는 듯 부단히 애쓰는 영화적 노력이라고 해야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3시간 전’이 필요한 까닭은 아마도 가부장제 아래에서 메구미가 류헤이가 일하는 마트에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구미가 마트에 오려면 강도에게 이끌려 와야 하지만 영화는 그걸 허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타카시와 켄지는 계속해서 가부장의 권위에 도전했지만 메구미는 가부장 아래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구미가 그곳에 가려면 강도에게 이끌려야 하지만 영화는 가부장 아래에서 그걸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부장이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이후에 메구미가 강도를 당하는 장면을 넣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은 정확히 류헤이가 자신의 양복 대신 청소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인 후다. 그때 류헤이는 이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 순간 가부장제는 깨졌다. 4식구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되지만 중심적인 이야기가 류헤이의 이야기라는 것은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시간 전’이라는 타이틀이 뜨기 전 우리가 본 가장 큰 사건은 류헤이의 실직이며 류헤이의 실직 이후 구직까지의 변화가 영화의 주된 사건이다. 물론 가부장의 권위에 도전하며 타카시가 군대에 입대하거나 켄지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우리가 주로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은 류헤이 쪽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 후부터는 가부장이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가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하는 것 말고는 우리는 류헤이에게 일어난 사건을 볼 수 없다. 이제 중심이 되는 것은 메구미와 켄지다. 메구미는 결국 육지의 끝까지 다다르고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별을 보며 바다에 몸을 담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강도는 메구미가 꿈꾸던 차를 몰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켄지는 폭력적인 가부장제에 잡혀들어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무임승차를 하다가 적발되어 유치장 신세를 진다. 사실상 메구미도 켄지도 실패한 것이다. 이들은 류헤이가 죽음을 맞이했듯이 메구미는 메구미의 방식대로, 켄지는 켄지의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는 신세. 하지만 구로사와는 이들을 다시 식탁으로 불러들인다.      


  이미 언급했듯 이미 가부장제는 부서졌다. 류헤이가 도착하자 메구미와 켄지는 밥을 먹고 있고, 류헤이를 보고서도 계속해서 밥을 먹는다. 류헤이는 청소부 유니폼을 입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스스로 권위를 버린 것이다. 이제 연극은 끝났다. 이 연극이 끝났다고 해서 구로사와는 일본의 평화나 어떤 문제의 해결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속 편한 소리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의 연극이 끝났을 때 이들은 4개월 후, 그러니까 미래를 희망해볼 수 있는 것이다. 4인 가족이 모이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비극이거나 혹은 가족의 해체를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만약 그렇다면 그 시각 자체가 이미 지나가버린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시대착오적인 생각과 다르지 않다. 타카시의 편지는 의미심장하다. 일본을 떠나 미국에서 행복을 찾겠다는 청년. 행복이 일본, 혹은 자국에만 있다는 건 무슨 자만인가. 물론 외국에 간다고 해서 행복하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만 행복을 찾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지지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런 뒤 우리는 켄지의 연주를 듣는다. 드뷔시의 달빛. 이 연주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아마도 켄지가 스스로를 포함한 실패한 자들에게 보내는 연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로, 그리고 희망. 구로사와는 켄지의 연주가 끝난 뒤 자신의 연주를 선보인다. 뻔한 음악 대신, 이들이 앞으로 향하는 발소리를 들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만큼은 엔딩 크레딧의 발걸음을 꼭 들어야 한다. 희망이 담겨 있는 구로사와의 연주이니까.      

  2020년 07월 08일.

작가의 이전글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