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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Jun 24. 2020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

  청춘 세대의 방황, 기성세대와의 갈등 같은 말로 <졸업>을 설명하는 일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눈먼 어린 시절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 찍은 이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기 바쁘고, 어디서 웃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겠으며, 그 유명한 엔딩 장면에서 낭만을 느끼는 오독의 행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영화를 지금까지 5번은 족히 봤을 텐데, 중학교 때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대충 이야기만 따라가는 정도로 만족했고, 그다음 관람에서 쇼트 내에 물질성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을 땐 마지막 엔딩 장면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방금 이 영화를 다 봤을 때는 다른 감동을 느꼈는데 방황이 아니라 절망 가득한 물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없이 언급된 음악들과 미장센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낡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벤자민의 두 번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다. 알다시피 한 번은 중년 여인을, 그다음은 중년 여인의 딸과 연애를 한다. 여기서 방점은 “두 번”이다. 영화는 이상하게 많은 것들을 반복해서 앞의 장면과 뒤의 장면을 겹쳐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큰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연애가 그렇다. 그다음은 로빈슨 부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난 다음 수영장에서 벤자민이 잠수복을 입고 수영장에 들어가는 시점 숏이 일레인의 결혼식 장면에서 반복된다. 벤자민의 시점 숏의 특징은 물안경과 숨소리다. 이 시점 숏에서는 곁에 있는 기성세대가 무어라 떠들던 들리지 않는다. 벤자민의 귀에는 그 음성들이 소거되어 있다. 일레인의 결혼식 장면에서 일레인의 시점 숏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일레인의 시선으로 보는 기성세대들의 음성이 소거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벤자민이 면도하는 장면 또한 두 번 반복되는데, 한 번은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고, 다른 장면은 일레인이 벤자민의 숙소에 찾아와서 로빈슨의 거짓말을 전달하면 벤자민이 그 거짓말을 교정하는 장면이다. 가장 인상적인 반복은 ‘카섹스’의 반복이다. 로빈슨 부인은 로빈슨과 차에서 섹스를 한 뒤 일레인을 임신했다. 아마도 로빈슨 부인은 이 섹스를 자신의 가장 후회스러운 섹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벤자민과 결혼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이지만 동시에 사랑스러운 딸로 인해 망가진 자신에 인생에 대한 회한이 남아있다. 그렇지 않다면 벤자민을 유혹할 때 왜 일레인의 방으로 데려갔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2층으로 된 그 넓은 주택에서 아들뻘의 사내를 유혹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방은 딸 일레인의 방이다. 많은 교과서에서 지적하는 삼각관계의 복선 이미지라고 설명하는 일레인 초상화에 비친 로빈슨 부인의 모습은 사실상 삼각관계의 복선보다는 로빈슨 부인의 복수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매력적이다. 여하간 그 카섹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할 수밖에 없다. 포드 안에서 일레인이 탄생했다는 우스꽝스러운 대사까지 들려줬으니 말이다. ‘차’라는 공간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일레인과의 데이트 장면에서이다. 벤자민은 일레인을 태우고 스트립바에 갔다가 다시 차를 몰고 햄버거를 먹으러 간다. 집으로 들어가자는 일레인을 설득하여 드라이브를 간다. 우리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연상을 강요당한다. 둘의 섹스 장면을 보여주진 않지만 섹스를 떠올리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드라이브로 도착한 곳은 로빈슨 부인과 허구헌 날 섹스하던 그 호텔이다. 얼마나 많이 갔으면 호텔 직원 전부가 벤자민을 알아볼 정도이다. 벤자민은 일레인을 데리고 다시 차로 향한다. 여기서 이 반복은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이 ‘차’라는 매개체는 일레인이 로빈슨 부인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서사는 정서상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납득하기 힘든 면이 있다. 예를 들면 로빈슨 부인은 왜 벤자민한테 끌렸는지, 벤자민과 일레인은 단 한 번의 데이트로 로빈슨 부인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철저하게 벤자민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알기 힘든 면도 있지만 영화는 납득할만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서사적으로 디테일들을 보충하기에는 불가능하게 찍어놨다. 물론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의 방에 침투하는 순간은 분명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에게서 자신과 동질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방법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벤자민에게 여자 문제인지를 떠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밀어붙이기에는 근거가 역부족하다.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을 집으로 꼬드기기 위해 한 대사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로빈슨 부인과 일레인이 벤자민에게 끌린 이유와 벤자민이 로빈슨 부인과 일레인에게 끌린 이유를 명암으로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느낄지도 모른다. 매 장면마다 탄식이 흘러나올 만큼의 미장센을 보여줬지만 반복해서 보다 보니 의아하게 빛과 어둠에 끌리면서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명암에 담겨있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서사를 명암의 미장센으로 풀어간다면 혹시 해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과 빛. The Sound Of Silence. 침묵은 청각에서의 어둠이다. 영화는 Fade In으로 시작한다. 어둠에서 밝아지는 화면.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The Sound Of Silence가 흐른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 장면이 어둠이라기보다는 끝없이 펼쳐진 길 위에서 어딘가의 방향성으로 향하더라도 그곳은 변화 없는 곳이라는 상징으로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빙워크가 작동하면서 인물은 그 위에서 앞으로 향하는데, 카메라 또한 같은 속도로 앞으로 향하는 데다가 벤자민 뒤의 벽은 그 어떤 변화도 없는 흰색 벽면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공간 자체가 침묵과 상응하는 비유적인 어둠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 영화는 끝없는 어둠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오프닝 타이틀이 끝나면 영화는 어두운 방에서 시작된다. 어두운 방에서 밝은 거실로 이끌고 나가는 것은 벤자민의 부모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어두운 방에 불쑥 침투하는 건 욕망의 대상이 될 로빈슨이다. 로빈슨은 어두운 방 안에 와서 벤자민을 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마치 어둠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마이클 니콜스는 명확하게 대사로 썼다. 로빈슨은 벤자민에게 어두운 것이 싫으니 집에 들어가서 불이 켜질 때까지만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우유부단의 벤자민은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아마 로빈슨 부인은 알콜 중독자가 되기 전, 그리고 알콜 중독자의 삶을 살면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견뎌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어둠이라는 것은 걷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심리적 상태다. 하지만 벤자민은 그 어둠 속에서 밝은 곳으로 나아가도 결코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해 어둠 속에 머무르는 존재다. 이 장소에서 로빈슨 부인의 유혹에 도덕적 책무를 느낀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 앞을 왔다 갔다 한다. 거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로빈슨 부인에겐 조명이 비추는데 벤자민은 암흑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 갇힌 벤자민. 아마도 그건 밝은 파티장에서 다시 어두운 방으로 돌아갔던 벤자민의 행동의 반복일 것이다. 하지만 이다음 쇼트는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도 다 아는 로빈슨 부인의 다리에 갇힌 벤자민이 보이는 쇼트다. 구도의 미장센. 벤자민을 포획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미장센. 그다음 장면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레인의 방 장면이다. 일레인의 방 안은 불을 켜자 환한 방이 된다. 여기서 욕망의 진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벤자민은 이러한 빛이 자신이 밝은 파티장으로 나갔던 것보다 더욱 불쾌한 결과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거실로 내려간다.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장소는 568호다. 우리는 벤자민이 568호에 갔을 때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벤자민은 호텔 방의 불을 켜보더니 다시 끄고는 적절한 어둠을 찾기라도 하듯 화장실 불을 켠 채로 블라인드를 전부 내린다. 하지만 그 행동은 로빈슨 부인에게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로빈슨 부인은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불을 켠다. 568호는 다시 밝은 파티장, 혹은 일레인의 방처럼 어항 밖으로 도망가고 싶은 물고기의 발버둥에 위태로운 어항으로의 이행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벤자민은 저항한다. 로빈슨 부인이 켠 환한 불빛을 다시금 자신이 적당한 어둠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둘의 첫 섹스, 혹은 벤자민의 첫 섹스는 어둠 속에서 진행한다. 즉, 벤자민이 불러들인 욕망은 빛으로 나아가도 실패했고, 결국 다시 어둠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욕망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어둠이 욕망을 불러들이는 방식인데, 이 장면은 블랙으로 끝나고 다시 Fade In으로 시작하면서 The Sound Of Silence가 들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면이 보이기 시작하면 밝은 태양이 내리쬔다. 벤자민은 밝은 빛을 실제로 마주하지 못한다. 그는 마치 이 빛이 자신이 원한 빛이 아닌 것 마냥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벤자민의 선글라스는 듬성듬성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벤자민이 일레인과의 첫 데이트를 할 때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대는 분명하게 밤인데다 스트립바에서도 벤자민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벤자민이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은 일레인이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된 순간이다. 즉, 일레인을 어둠 속에서 보고 있던 벤자민이 일레인의 눈물을 보는 순간 일레인을 밝은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일레인이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도 의미심장하다. 벤자민은 일레인과의 관계가 부숴지고 난 다음 두 번 찾아간다. 하지만 한 번은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고, 다른 한 번은 맨눈으로 바라본다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앞의 행위에서 벤자민은 단지 일레인을 보고 떠난다. 하지만 두 번째 바라봄에서는 일레인이 떠난다. 즉, 앞의 바라봄에서 벤자민 일레인을 포기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뒤의 바라봄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난 다음 벤자민은 부모님에게 일레인과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 뒤로 벤자민은 단 한 번도 선글라스를 끼지 않는다. 즉, 일레인이라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확신이 벤자민으로 하여금 빛에 대한 확실성을 안겨준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어둠은 빛을 불러들인다. 벤자민의 결혼 결심은 일레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결국 어둠 속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에 불과하다.     


  버클리에 도착한 벤자민은 멀리서 일레인을 지켜본 뒤 방을 구하러 간다. 하지만 영화는 집주인과 벤자민이 방으로 향하는 동선을 보여주지만 어두운 방은 보여주지 않는다. 어두운 방이 등장하는 시점은 일레인을 쫓아 동물원까지 따라가서 일레인의 새로운 남자친구 칼을 만나고 난 뒤다. 그리고 다시 일레인은 어둠 속으로 침투한다. 이 장면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번 반복되는 면도 장면이다. 이전의 면도 장면과의 차이는 상대가 엄마에서 일레인으로 변했다는 것과 이번엔 일레인이 거짓을 말한다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은 마치 일레인이 로빈슨 부인의 거짓말을 믿지 않아 그것을 확인받으러 온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벤자민의 변명 한두 마디에 자신의 엄마보다 벤자민의 말을 신뢰할 수 없지 않은가. 일레인이 이 어두운 방을 침투한 것은 로빈슨 부인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을 데리고 나갔지만 일레인은 벤자민에게 떠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나간다. 행동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행위이다. 결국 벤자민과 일레인은 어둠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둘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아간다. 사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이건 납득하기 힘든 전개다.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 이들의 데이트의 전부다. 단 하루 데이트를 했고, 그 다음날 만나기로 한 날에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을 협박했고, 결국 벤자민은 일레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으며 그다음 이들은 단 한 번도 만나적 없고, 벤자민은 버클리에 와서 일레인에게 구애를 한 것이다. 영화적으로 생략된 시간은 없다. 이들이 서로에게 품는 확신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욕망과 관련이 있다. 즉, 로빈슨이 벤자민을 유혹한 것과 벤자민이 잠수복을 입고 난 뒤 로빈슨 부인의 유혹을 받아들인 것과 벤자민과 일레인의 마음은 일치하는 것이다.      


  그 어둠을 벗어나려는 행위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일레인과 벤자민은 이미 포획당했다. 로빈슨 부인의 다리가 벤자민을 포획했듯 칼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을 벤자민에게 고백했을 때 그들이 농구 골대 사각의 틀에 갇혀있는 미장센이라는 건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는 명확한 것이다. 벤자민은 결혼반지를 산 뒤 방으로 돌아온다. 어두운 방 안에는 로빈슨 씨가 앉아있다. 로빈슨 씨는 어두운 방에 앉아있었더니 벤자민의 표정까지 다 보인다고 말한다. 벤자민이 없는 어두운 방에서 벤자민의 표정을 보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결국 어두운 방이 벤자민의 상태를 대변한다는 걸 우회한 표현이 아닌가? 결국 벤자민이 다시 어두운 방으로 돌아온 것은 로빈슨 씨를 대면하기 위한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 장면에선 한가지를 더 지적해야겠다. 벤자민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 장면은 반지를 사는 장면이다. 하지만 반지를 살때까지만해도 하늘은 맑다. 하지만 벤자민이 꽃과 무언가를 더 사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는 젖어있다. 즉, 비를 맞은 것이다. 영화에선 물의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벤자민이 비를 맞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일레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러 갈 때다. 지금은 로빈슨 씨가 모든 사실을 알고 벤자민에게 경고를 하러 왔다. 영화는 계속해서 희미하게 앞의 상황을 뒤의 상황에 겹쳐놓는다.      


  이제 영화는 3막으로 치닫는다. 일레인은 벤자민에게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열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쉽게 떠나버린다. 칼과 벤자민의 사이에서 고민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빛 중 어느 것이 밝은 빛인지를 고민한 것이다. 일레인은 칼이라는 빛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빛은 로빈슨 부인의 과거를 그대로 따라가는 행위라고 영화가 이야기한다. 벤자민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듣는 이야기는 ‘속도위반’이다. 즉, 다시 한번 카섹스를 불러온다. 벤자민은 결국 결혼식장으로 침입하여 일레인을 데리고 나온다. 갈팡질팡하던 일레인은 다시 벤자민이라는 빛을 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레인이 주변 사람들을 바라봤을 때 그들의 음성이 소거되었다는 점이다. 이 선택은 벤자민이 로빈슨 부인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것을 암시한다. 칼이라는 빛도, 벤자민이라는 빛도 결국은 밝은 빛이 아니라 다시금 어둠으로 들어가는 빛일 뿐이다. 너무나도 낭만적이게 벤자민과 일레인은 손을 붙잡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버스에 올라탄 벤자민과 일레인의 얼굴엔 웃음이 사라진다. 그 노란 버스는 아마도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건 젊은이들의 방황이 아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에 보내는 SOS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당신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나요? 당신들의 말대로 살아가면 당신들처럼 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아도 당신들처럼 될 것만 같아요.” <졸업>은 아마도 몇십년, 몇백년이 지나도 그 물음이 지속될만한 걸작이다.      


어둠이여,

나의 옛 친구여.

또다시 그대와 얘기를 하려고 왔다네.

왜냐하면 환영(幻影)이 조용히 찾아와,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 씨앗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네.

환영은 나의 뇌리에 새겨져 지금도 침묵의 소리 속에 멎어 있기 때문이네.

쉬는 일이 없는 꿈속에서 나는 홀로 걷네.

자갈 투성이의 길을,

가로등 불빛 아래를,

냉기와 습기에 옷깃을 세우면서.

네온의 섬광이 내 눈을 쏠 때,

그것이 밤을 갈기갈기 찢어 침묵의 소리에 닿았네.

벌거숭이의 빛 속에서 나는 보았네.

1만 명이라든가 그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말없이 얘기하는 사람들을,

듣지 않고 듣는 사람들을,

목소리가 되지 않는 노래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누구 한 사람 침묵의 음을 흩트려 놓으려 하는 자는 없네.

‘바보 같은 자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대들은 모르는가.

침묵이 암처럼 퍼지는 것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가르쳐 줄 테니까.

그대에게 뻗치는 내 팔을 잡아요’.

그러나 내 말은 침묵의 빗방울처럼 정막의 우물 속에서 메아리쳤네.

그리고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네.

스스로 만들어낸 네온의 신에게.

그러자 네온은 말을 만들어 경고를 발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예언자의 말은 지하도의 벽과,

싸구려 아파트의 복도에 적혀 있다’라고.

그리고는 침묵의 음 속에서 속삭였네.     


Simon & Garfunkel - The Sounds Of Silence      



  2020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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