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Y Jun 15. 2020

조민재의 <작은 빛>

  망막에 맺힌 스크린의 상들과 고막으로 들어오는 자극을 통해 서사를 따라가거나 혹은 디테일을 해독하는 과정이 영화를 보는 보편의 과정이라면 어떤 영화들은 서사를 따라가는데도 흥미가 없고, 디테일은 그곳에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태도를 취해도 단순히 영화를 보고 있다는 그 감각만으로 묘한 힘을 발휘하는 영화들이 있다. <작은 빛>은 분명 그 부류에 속하는 영화인데, 이 부류의 속하는 영화들은 굉장히 인상적인 연출력으로 뇌리에 박히지만 이상하게도 <작은 빛>은 그런 연출력이 아니라 연출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공기를 허우적거리는 느낌처럼 느껴지는 영화다. 이 신기한 느낌은 도대체 어떤 자극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인지 궁금한 나머지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텍스트는 텍스트 나름의 한계로 내가 느낀 감각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쓴다는 행위가 <작은 빛>을 보았다는 행위에 감응했으면 좋겠다.      


  이런 류의 영화들을 만나면 반가움과 함께 눈이 번뜩인다. 그 번뜩이는 눈으로 개별 영화가 갖고 있는 미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작은 빛>도 역시 고정된 카메라,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 캠코더라는 소품 등을 연결 지어보았지만 매번 실패한 것은 신기함과 아쉬움이 둘 다 느껴지는 양가적 경험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방 안에서 카메라가 배우들의 움직임에 미세하게 움직일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움직임은 전혀 상관없는 것 아닌가라는 마음이 들지만 목욕탕을 다녀오는 가족들을 카메라가 패닝하면서 보여줄 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고정적 카메라라는 컨셉 자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관객에게 그런 것은 보지 말고 그냥 느껴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건 진무가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누웠을 때 바라보는 시선에 따른 편집 또한 같은 생각이다. 영화는 기본적인 액션 쇼트와 리액션 쇼트의 연결로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집에 걸려 있는 처음처럼의 포스터를 바라볼 때, 정확하게는 시점 쇼트의 기능은 아니지만,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주고 난 다음 바라보는 것을 프레임 안에 담는 방식으로 편집했다. 캠코더로 촬영을 할 때조차 촬영자를 보여준 다음 캠코더의 화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시작을 캠코더의 화면으로 한 것을 떠올려봤을 때 이러한 편집은 특이점을 갖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편집에 방점을 찍어 이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달라는 요구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지적하고 싶은 형식은 있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화면에서 피사체가 들어오거나 나가는 도중에 커팅을 한다. 화면에 인물이 없는 상태에서는 관객이 바라볼 것은 풍경밖에 없는데 그 풍경을 찍으려는 쇼트가 아니라면 당연 그런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작은 빛>에서는 인물이 들어오기 전에 화면이 시작하고 인물이 나가고 나서도 카메라가 그곳에 잠시 머무르는 쇼트들이 등장한다. 이건 마치 진무가 비디오 캠코더를 들고 찍는다는 행위와 맞물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걸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희미하게 드러나있는 것들로만 연결해보자면 진무가 비디오 캠코더로 찍는 것은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미래 상황에의 대비다. 영화의 서사는 알다시피 단순하다. 그 단순한 서사에 유일하게 중첩되는 데드타임은 마치 영화가 그걸 기억해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교 때 우리 학교 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를 거닐면서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이 호수는 아주 오래전부터 탄생하는 커플과 헤어지는 커플들을 알고 있겠지.”     


  이 영화엔 서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뇌 수술을 받아야 하는 진무는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것이 전부다. 영화가 시작하고 난 뒤 우리가 진무가 갖고 있는 병에 대한 사실을 아는 것도 그리 빠르진 않다. 우리가 마주하는 무언가 지나쳐가는 풍경들, 그 풍경들 위에 떠오르는 텍스트. 그것이 곧이어 진무가 비디오 캠코더로 찍었을 풍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찍는 진무를 본다. 집에 담을 넘었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실패한(물리적 실패가 아니다) 진무는 문 앞에서 새우 잠을 잔다. 이어 중년의 여자가 진무를 보더니 하는 말을 들으면 이건 엄마와 아들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모자관계이면서 무언가 어색함이 묻어나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모자관계는 아니라는 그 느낌을 풍긴다. 이건 분명 엄마가 웬일이냐고 묻는 대사와 진무가 결코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함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스크린 위에 운동하는 피사체들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감흥 자체가 이 영화를 지지해 주는 강력한 기반이다.     

 

  종종 영화는 자신의 계보를 희미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진무는 형과 술을 먹고 골목길을 걸으면서 버려진 서랍을 함께 들고 형의 집으로 간다. 여기서 방점은 서랍이 아니다. 서랍은 서사의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는 단순히 우리 망막에 맺힌 스크린 위의 운동을 기억하면 된다. 다음 날 진무의 형은 이 거리를 진무도 없이, 서랍도 없이 혼자서 걷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전날 밤에 같이 서랍을 들었던 진무를 불러온다. 그 프레임 안에 없던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다. 영화는 이따금 이런 방식으로 찍어나간다. 하지만 이 역시 미학적인 규칙 따위는 없다. 누나 현이도 진무가 떠난 뒤 어떤 쓸쓸함을 느끼지만 그때 영화는 물리적으로 떠나버린 진무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현이의 얼굴을 찍는다. 그렇게 영화는 어떤 미학적인 이유로 쇼트를 생산해내지 않고 단지 적절하게 느끼기만 하라고 강요한다.      


  그 강요가 그럴듯한 것은 시청각적 자극이 서사에 복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기서 디테일을 찾겠다는, 혹은 이 영화의 미학은 어떤 미학인지를 파헤치겠다는 태도를 불식시키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우리는 진무 엄마의 집에 갔을 때 오래전 벽이 젖은 흔적에서 눅눅함을 느끼고 어떤 냄새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목욕탕 장면일 것이다. 목욕탕 내부에서 서로의 때를 밀어주는 그 행위가 이들의 감정을 나타내주진 않는다. 물론 아예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조작하기보다는 최소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로만 채우고 있는 것이다. 목욕탕에서 돌아올 때 느껴지는 약간의 쌀쌀함과 상쾌함은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체험이 되어버린다.      


  엄마와 형, 그리고 누나를 만나고 난 뒤 영화는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간다. 정말 희미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어쩌면 아버지의 기억에 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만한 근거는 영화에서 충분히 드러나지만 영화의 앞부분에서 보여준 인물들에 대한 관계와 과거, 그리고 현재는 아버지로 묶이기엔 무언가 이질적인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가 이미 죽어버려서 일지도 모르겠고, 그 아버지가 폭력적인 아버지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낯선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영화를 보는 우리 또한 그 낯섬이 이질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영화에서 가장 긴 쇼트가 등장할 때 아버지는 절대적으로 이 영화에 포함되어야 하는 ‘가족’이다. 심지어 엄마가 찍는 캠코더 앞에 진무가 섰을 때 아버지의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다른 영화였다면 그 의상이 아버지와 진무와의 어떤 관계로서 해석했을 테지만 이 영화는 거기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한 가지 방향성은 있다. 엄마의 한 맺힌 목소리를 아버지 대신에 느끼는 진무의 모습이다. 어쩌면 진무는 그 목소리를 아버지 대신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죽어버린 아버지. 하지만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어머니. 물론 그 과거가 어떤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한이 맺혔다는 표현 또한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진무는 아버지의 옷을 입었을 뿐인데, 거기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무언가 알 수 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게다가 그 순간은, 다시 반복하지만, 엄마가 들고 있는 카메라에 담기는 진무의 모습이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되는 유일한 서사적 순간은 다음날 엄마가 터미널에서 진무에게 캠코더에 담긴 내용을 번복하는 것이다. 진무의 엄마는 진무에게 진무 아버지가 조금 고맙다는 말을 한다. 정말 희미해서 언급하기 민망하기까지 하지만 영화가 진무의 기억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기억을 정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질문만을 남겨놓는다. 아니, 그 희미함 속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는 정도로만 표현하면 적절하려나? 아무튼 이 희미함 속에서 관객들은 분명 자신의 기억을 불러올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시청각적 자극에서 오는 것은 서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오, 무언가 해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단지 스크린 상에서 우리 뇌에 들어오는 것들로만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관객인 나는 <작은 빛>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내 기억을 끌어올리는 체험을 했다. 영화를 보고 영화 밖에서 무언가를 가져와서 끼워 맞추는 것은 흔히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 영화과에서 하지 말라는 것들을 다 골라서 찍은 <작은 빛>이라는 영화이기 때문에 나는 하면 안 되는 일을 했는데, 프레임에 담고 있는 모든 물질들을 통해 나의 감각은 이전의 나의 감각을 자극한 여러 이미지(물론 청각 이미지까지)들을 떠올려야 했다. 그건 사람이라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느 누가 떠오르는 기억을 막거나 보류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관객의 자리에서 떠오르는 그 기억은 영화가 선사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외국 사람의 입장에서 <작은 빛>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언은 위험한 일일 수 있지만 이토록 한국적인 정서로 가득찬  영화 또한 드물다. 정말 잘 만든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나 이용주의 <건축학개론>은 한국의 정서가 없어도 한국의 이해가 있으면 영화를 관람할 수 있지만 <작은 빛>은 한국적 정서가 없다면 절대로 관람할 수 없는 영화라고 추측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많은 관객들이 그렇겠지만, 진무가 형광등을 갈았을 때 깜빡이는 그 순간 누나의 가족과 형의 가족이 등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가족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들이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누나의 아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때 우리는 이 아이가 아버지랑 연락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형이 형의 친엄마랑 밥을 먹을 때 진무와 진무의 누나의 가족이 형과 형의 엄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 어색한 가족 관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명절 때 모르는 얼굴을 마주한 어색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여 있는 사람. 그 뒤 그 사람은 이따금 보이기도 하고 평생을 보지 않기도 한다. 형광등의 얇은 실이 끊어지듯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 가족들. 하지만 우리가 본 진무와 누나, 형, 엄마는 끊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어쩌면 그들은 가까운 가족이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묶여 우리는 그들을 봤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는 진무가 수술 후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을 잃었는지, 혹은 잃지 않았는지, 잃었다면 어느 정도의 기억을 잃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옷을 입고 어머니의 한 맺힌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이 충분치 않았던 것인지 영화는 가족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만든다. 물론 이 장면에 대한 이유는 영화 외적으로 강력하게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버지의 시체를 절단 내어 내려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라는 이름. 죽어서까지 괴롭히는 그 이름. 이 장면은 진무의 꿈같기도 하고 영화의 에필로그 같기도 하다. 녹음의 계절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다가 나무뿌리가 관에 박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갑자기 해골이 등장한다. 이런 편집은 영화에서 처음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시체를 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아버지의 유해. 꿈인지 상상인지 혹은 현실인지 구분이 애매한 이 장면에서 진무의 결단은 어쨌뜬 진무의 결단이다. 굳이 이 결단이 장남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진 모르겠다. 그들은 이제 절단난 아버지의 시체의 부위를 들고 산을 내려온다. 이들이 산을 내려올 때 묘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건 무엇일까? 아무렴 어떠한가. 그 따뜻함을 느낀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2020년 06월 15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