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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Mar 02. 2020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첫사랑이 아픈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환영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책을 펴더라도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유명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도 자신들의 사랑이 실패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랑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상이 욕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이 허상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가장 성공에 가까운 실패가 조금 더 나을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사랑의 실패를 재치있게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페파가 간절하게 원하는 상대 이반은 바람둥이다. 사랑의 실패는 이반이 바람을 피우지 않고 페파에게만 온전히 사랑을 주어도 실패고, 계속해서 바람을 피워도 실패다. 어떻게 해도 실패인 이 서사는 때로는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 비극은 결국은 죽음인데, 죽음보다 더한 것은 상대방이 죽더라도 내 사랑의 실패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재치 있게 페파의 성장으로 끝을 낸다.      


  처음엔 페파의 꿈이 이반이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반이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렇다면 이반은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옆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d 추측은 뒷 서사를 따라가보면 적절치 못하다. 페파는 이반이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아버지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밝혀지지만 페파는 임신 상태다. 즉,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 전체를 다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의 실체는 이반과 페파가 녹음하는 녹음실 장면과 유사하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는 실제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게 나의 환상을 씌워놓은 것이다. 이반이 화면에 나온 영화 속 이미지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씌우는 것과 유사하다. 관객들은 이반의 목소리가 들려도 화면 속 인물로 인지한다. 아마도 녹음실에서 페파가 눈물을 흘리고 쓰러진 것은 이반의 목소리가 들려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지만 쓰러지는 건 자신의 사랑이 충족될 수 없음을 깨닫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페파가 결혼 장면을 녹음하는 장면은 위트가 넘치는데, 남자를 믿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콘돔을 건네는 장면이다. 이건 분명하게 임신에 대한 경고다. 즉, 남자가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지 말라는 것과 같다.      


  페파는 점점 무너진다. 가스파초에 수면제를 타고, 침대에 불을 지른다. 정확하게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가 돼버린다. 가스파초에 탄 수면제는 누가 보아도 마시면 죽을 수 있는 양이며, 침대에 불을 지르는 것 또한 페파가 원하는 애정의 표시다. 불을 지른다는 것은 모두 재가 되어 타버리는 것과도 같지만 프로이트의 지적에 따르면 방화벽이 있는 사람들은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불의 따뜻함. 페파는 그 불을 잠시 바라만 본다. 하지만 이반을 찾으러 가도, 이반이 오기를 기다려도 이반은 돌아오지 않는다.     


  페파와 같이 시련의 상태인 페파의 친구 칸텔라와 카를로스와 그에게 시련을 당할 마리스가 페파의 집에 모인다. 칸델라의 자살 소동극이 끝나고 마리스는 수면제를 탄 가스파초를 마시고 잠이 든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 장면 이후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페파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의아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인해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 번째 볼 때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가스파초의 수면제. 페파가 이 부분을 고백할 때 페파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찍는다. 이건 정면으로 찍어선 안되는 장면이다. 이반을 잡아두기 위한 처절한 수단. 그걸 지금 이반의 아들과 친구 칸델라에게 들킨 것이다. 그리고 택시에서 간신히 참은 눈물을 흘린다. 놀라운 건 택시 기사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의 울음에 보답한다. 어쩌면 알모도바르가 페파에게 보낸 수호천사일지도 모른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서 수호천사의 방법과 같이 인물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순간이 있다. 자꾸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페파가 공중전화 부스에 있을 때, 페파의 이웃 안나가 남자친구와 싸울 때, 변호가 모랄레스가 이반의 가방을 차에 실을 때 그러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페파와 안나는 떨어지는 물건에 맞지 않는데 모랄레스는 맞는다. 이건 정신 차리라고 알모도바르가 떨어뜨리는 것이다. 전화를 하는 페파에게, 남자친구와 싸우는 안나에게, 이반의 가방을 넣는 모랄레스에게. 모랄레스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페파와 안나보다 정신 나간 짓을 하니까.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격도 포기하고, 변호사로서의 윤리도 버린 이반에게 미친 여자는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페파는 모랄레스를 만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카를로스와 대화를 하면서 이반이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페파는 이반의 가방을 버린다. 더 이상 이반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페파는 이반을 남편의 자리에 있길 바라는 마음보다 아버지의 자리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바꿔 말하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가 아니라 임신한 여자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보통의 환경에서 자라길 바란다. 이반이 아버지의 위치에 있을 수 없다면 남편의 위치에도 올 수 없다.     


  마리스는 꿈에서 오르가즘을 느낀다. 마리스가 이 꿈을 꾸는 것은 칸델라의 말 때문이다. 칸델라는 사귀었던 테러범과 계속해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을 마리스는 분명하게 본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스는 이 꿈을 꾸는 것이다. 카를로스가 없어도 오르가즘은 가능하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정확하다. 상대방과의 섹스나 혼자 하는 자위나 마찬가지다. 혼자 상상하던 이미지를 보며 하는 자위와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보지 못하고 이미지를 씌워놓은 상대방과의 섹스는 무엇이 다른가?     

 

  한데 한바탕의 소동이 끝난 뒤 페파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이반을 왜 구하러 가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추정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가 신경 쇠약의 여자를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반의 전 아내는 페파와 동일하다. 알모도바르는 마지막 그녀들의 통화를 거울을 보는 것처럼 정중앙에 인물을 놓고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게 찍었다. 이반을 구한다기보다는 그녀를 구하는 것이다. 한데 이 추측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반을 구하는 장면에서 이반과의 작별 인사가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 있다. 페파는 이반과 작별을 하기 위해서 이반을 구했다고. 이반의 전 아내는 이반이 죽으면 끝날 수 있다고 믿지만 그건 거짓이다. 이반이 죽으면 대상이 죽은 것이지 욕망의 실패는 남는다. 욕망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대상이 죽으면 그 욕망은 더욱더 불가능한 욕망이 된다. 즉, 페파는 작별하는 것이 이 이룰 수 없는 욕망을 가장 빠르게 포기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집으로 돌아온 페파. 마리스는 깨어나고 칸델라와 카를로스가 껴안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페파는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은 것이다. 어차피 대상이 바뀌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허상이라고 이미 지적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대상에 씌워놓은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실패한다. 하지만 이 유쾌한 결말은 무엇일까. 그건 실패한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마리스는 지금까지는 처녀였지만 방금 꾼 꿈으로 인해 처녀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어쩌면 사랑의 시작은 사랑의 실패를 알고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내가 씌워놓은 이미지에 실망하거나 상대방을 객체로 만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다가 실패할 테니까.      


2020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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