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Y Jan 15. 2020

[무이네] 여행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사진은 필수적이다. 여행뿐 아니라 맛집을 찾더라도 사진은 누군가에겐 필수품이 되었다. SNS에 올리기 위한 사진. 그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도 예외가 될 순 없다. 몇 번의 내일로와 휴가 등 국내 여행 경험으로 내 최고의 풍경은 순천만의 일몰이다. 그 순간은 잊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물론 정상에 오르자마자 일몰은 시작되었고 기다리고 있던 관광객들은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잠시 동안 쳐다봤는데 해가 너무 빨리 저물어가고 있어서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내 찍었었다.      


  사진이라는 이미지에 대해서 논할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사진은 우리가 본 그대로를 담지 못한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렌즈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실제 풍경과 화가가 캔버스에 자신이 느낀 풍경을 그린 것의 차이와도 맞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우리가 사진을 본다는 건 조작된 것을 보는 것이다. 남는 게 사진이라는 것은 추억하기 위한 것이다. 추억은 기억이 아니다. 추억은 언제나 기억에 환상을 더한 것이다.      


  가끔은 여행의 목적 자체가 사진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을 지켜보고 있을 때면 곤혹스럽다. 자신을 어떤 공간의 배경과 같이 담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건 무의미하지 않나. 그럴 거면 그린 스크린으로 합성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헌데 누구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실제 그 공간에 갔다는 증명이 항상 필요하다. 내가 어디에 있다는 사실. 사진엔 그것이 필요하다. 나 같은 염세주의자들은 극단적으로 치우친 시선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나는 여기에 다시 계급을 끌어들인다. 한국을 벗어났다는 우월감. 사진에 찍힌 공간이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면 곳일수록. 혹은 그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여행지를 발견한 곳일수록. 우월감은 높아진다.      

  분명한 건 계급의 우월감을 느끼려면 대상이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대상은 SNS에서 나의 친구들. 아주 더운 나라에서 땀을 삐질 흘리든, 아주 추운 나라에서 얼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느끼던 사진에는 그런 것보다는 그 장소와 피사체의 우월감이 담기게 찍는다. 어느 누구도 여행에서 우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다. 결혼사진과 같은 맥락이다.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는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 것 같은 부부의 모습이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면 안면 근육에 통증이 오고, 뻣뻣한 몸인데도 여러 자세를 요구하는 사진사 때문에 몸의 관절에 통증이 오고, 빨리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고 한다. 조작된 찰나. 이 순간의 포착이 우리에게 환상과 우월감을 더해준다.      


  나는 이것을 비판적 시선으로만 다가갔다. SNS에는 행복한 사람만 존재하고, 잘난 사람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SNS가 쇼윈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고, SNS에 관심이 없다. 거짓된 이미지는 사람을 현혹시키기는 쉽지만 패배만 존재한다. 그걸 알고 있으면 SNS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여행 사진을 올린다는 것은 상대적 우월감을 얻기 위한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 확실히 그 행위가 긍정적으로 비칠 수는 없지만 원래의 시공간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한 뒤 그걸 포착하여 보여주는 행위는 에너지를 재충전한다는 의미에서 생산적인 효과를 얻게 만들고, 긍정적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제 자체가 사회적으로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상대적 우월감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마도 아주 큰 수치로 나타날 테니까. 아마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사진을 업로드할 때 느끼는 상대적 우월감도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우월감은 또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부정적이다. SNS는 적당선을 유지하면 된다. 박탈감을 느낀다면 SNS를 줄이거나 끊어야 한다.      


  하지만 박탈감은 사진을 본 순간 즉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진법의 신호로 전달되는 이미지는 광고효과를 지니고 있다. 나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그건 실제로 가질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자들의 전유물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지면 가질수록 궁핍해지는 것은 비단 카푸어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희망을 이룰 때도 숫자를 생각한다. 통장에 찍혀있는 그 숫자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여행이 필요한 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 감각이 여행으로 채워질 수는 없다. 물론 이건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에서 배운 것이다.      


  여행에서 찍는 사진은 들뜬 기분을 만든다. 미디어에서 접하던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내가 된다. 어떤 식으로 찍어도 화보다. 그때 느끼는 건 우월감이 아니다. 그건 해방감이다. 현실 속 내가 있던 계급에서의 해방감. 29살의, 가난한 청년의, 영화감독이 꿈인,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난다. 해방이라는 환상. 프레임 속에 갇힌 나라는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프레임 속에 갇혔기 때문에 현실에서 벗어난다. 그걸 느끼는 순간 배우가 배역에게서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벗어 던져버리고 싶은 나라는 존재. 화이트 샌듄이라는 사막 한가운데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이미지. 그건 프레임 속에서만 가능하다. 렌즈의 화각을 벗어나면 수십 명의 사람이 셔터를 누르고 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광경도 사라진다. 이제 막 빛을 찾은 하늘 아래에서 사막의 윤곽이 드러나고, 잠에서 덜 깬 기분으로 선선한 공기가 몸을 감싸는 그 순간. 나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건 꿈과 같다. 붕 떠 있는 기분.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 그 순간 오롯이 나를 볼 수 있다.       


  화이트 샌듄의 순간을 느끼기 위해선 사진은 독이다. 순천만에서의 그 마법 같은 기분에서 사진을 꺼내든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 순간은 온전히 느껴야 한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그것이 기분을 망친다. 그 순간 때문에 여행의 모든 순간이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오로지 사진만을 찍기 위한 시공간도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행의 모든 장소에서 좋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다. 무이네는 휴양지다. 심신을 편히 하고 쉬면서 즐기고 오는 곳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즐기는 것도 꽤 좋은 방법이다. 다만 혼동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를. 찍으려고 마음먹었을 땐 마음껏 찍으면 된다. 한국을 벗어났다는 기록, 사막이라는 장소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 순간 일상은 사라졌다는 기적, 나도 너희들처럼 될 수 있다는 증명, 그리고 자유. 그건 얼마 안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글보다 사진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 순간.     


2020년 01월 12일.   

작가의 이전글 [무이네] 여행은 꿈을 꾸는 것일지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