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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Oct 02. 2021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

  기타노 다케시의 최고작으로 뽑히는 <소나티네>. 아무래도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알 수 없는 허무감과 충격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느낌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시간을 두고 두 번 보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만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다시 보기로 결심하고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 영화를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갖고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나로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다시 보았다. (최근의) 첫 번째 관람에서 느꼈던 것은 결국 야쿠자를 그만두고 싶었던 무라카와라는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비애감이다. 그건 두 번째 관람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느꼈는데 두 번째 관람에서는 그 이유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다시 보려고 결심한 것은 <그 남자 흉폭하다>에서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일전에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보고 느꼈던, 내가 영화에서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매력은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에서 극점에 달한 부분일 것이다. 내가 대사없는 영화에 매혹되는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요즘은 대사가  없음이 방점이 아니라 이미지로 진행되는 영화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하간 이 질문은 이미지의 교환가치로 이어지는데, 그렇다면 왜 나는 브레송보다는 멜빌의 영화에서 매혹을 느끼고,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그 매혹을 왜 못 느끼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영화의 완성도를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매혹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는 멜빌의 후기 느와르 삼부작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서 느꼈던 매혹은 멜빌과 비슷한 종류의 것과 내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다시 본 영화들과 예전에 봤던 영화들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기타노의 영화에서 줌 인 트랙 아웃을 사용한 기억은 없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지만 <소나티네>에서 그 쇼트를 보았을 때 이상한 감각은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보았던 그 현기증을 일으키는 쇼트가 아니라 무라카와의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마치 그것은 밖으로 나가고 싶으나 안에 이끌려있는 인물의 상태라는 것을 유추했다. 다만 이 유추에서 떠올랐던 것은 멜빌의 <사무라이>의 오프닝이다. 난 <사무라이>의 오프닝만이 유일하게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의 오프닝과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오프닝의 훌륭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강렬해서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오프닝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오프닝 명단에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지금 이 두 편에 견줄만한 오프닝은 단연 존 포드의 <수색자>일 것이다. 여하간 <사무라이>의 오프닝이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줌 인 트랙 아웃의 사용일 것이다. 도대체 왜 오프닝을 그렇게 찍었는가. 난 그 답을 <소나티네>에서 답을 얻었다. 제프 코스텔로의 상태. 여하간 난 이미지의 교환가치를 미학적으로 접근했는데 어쩌면 멜빌 또한 알랭 드롱의 그 고독한 이미지를 단순히 어떤 미학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마도 <형사>에서의 기차 강도 장면이나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보석 강도 장면은 그들의 프로페셔널을 강조하고 그들의 운동이 결국 노동으로 이어지는 점과 더불어 <사무라이>에서의 의상 교환 장면은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유치함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문득 영화를 보다가 <소나티네>에서 또한 인물들의 무기력함과 권태로움은 단순 미학이 아니라 그것이 어쩌면 현대인의 표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닿았다.      

  아마도 이 생각에 닿는 것이 그리도 힘들었던 까닭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나 <3-4x 10월>에서나 똑같은 방식으로 배우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이야기했던 아주 약간의 연기. 브레송이 이야기했던 모델. 여하간 그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 어떤 목표를 갖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이미지의 교환 방식의 원리에 따라 찍었던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결국 모델의 얼굴 문제 혹은 영화의 방식에 있어서 한 쇼트가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결합하는 문제. 요즘에, 아니 이전부터 난 현대인이 좀비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어쩌면 <소나티네>의 인물들은 이미 좀비화 된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일에 지치고, 결국 일을 그만둔다는 것. 그러나 일을 그만둔다는 문제는 한 인간의 한 면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라카와라는 인물의 정체성은 오로지 야쿠자였기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것일까.     


  영화의 오프닝은 그림으로 시작한다. 작살에 관통당한 물고기. 이미 죽어있는 이미지. 이 불길한 그림 위에 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오락실에서 알바생의 바스트 숏. 여기서 카메라가 뒤로 빠진다. 이 순간 보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붙는다. 하지만 이어 무라카와와 그의 부하가 들어온다. 카메라는 무라카와가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있다. 미리 알고 있다는 불길함. 편집도 같은 방식이다. 무라카와가 나오기 전에 카메라는 밖을 비춘다. 그리고 무라카와가 나온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보다 기타노 다케시가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이 더 복잡하다. 이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구로사와는 보통 카메라의 동선으로 공간을 확장한다면 기타노 다케시는 편집, 카메라의 동선 등 영화적 요소들을 두루 사용한다. 무라카와가 오락실에 갔을 때 마치 알바생만 있는 것 같은 공간이 편집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무라카와가 그 장소에 나와서 걸어가는 쇼트의 수평 트래킹에는 카페 알바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카메라가 그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라카와가 걷는 거리를 쫓는 카메라의 공간은 일전에 나온 카페 알바생이 있는 카페다. 이런 방식으로 공간이 확장되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세계는 뻗어나간다. 그렇지만 공간의 확장이 뻗어나가는 것과는 별개로 인물들의 공허감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다.      


  이들의 직업은 야쿠자다. 그가 오락실 사장을 도르래에 매달아서 협박을 하는 장면의 연출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마치 누구나 하는 일을 하는 듯 조용하고, 일상적이다. 기타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야쿠자의 통화 내용을 들은 기억에 따라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화된 그들. 그들의 잔혹함이 방점이 아니라 그들은 그것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이 방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줌 인 트랙 아웃의 경우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공간이 완전히 뒤바뀐다. 카메라는 무라카와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무라카와를 지나쳐 일반인이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무라카와가 바라는 것. 그가 전화 통화하는 그 위치는 그 경계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위에서 언급한 카페라는 공간 내부에서 무라카와를 바라보는 쇼트도 마찬가지다. 카페라는 장소는 우리에게 친근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 중 하나이다. 카메라가 무라카와를 그 공간에서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분리한다. 무라카와의 입장에서 세계는 무라카와와 일반인들이 산다. 그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간은 확장하고 무라카와는 고립된다.      


  무라카와는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로 향한다. 일련의 사건 사고들이 있고 난 뒤에 술집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이상한 총격 장면. 그 누구도 숨거나 몸을 보호하지 않고 그냥 총알에 맞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듯 그냥 총을 쏘아댄다. 이 장면을 보면 무라카와가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무리가 아니라 의심하지 않던 무리가 진짜 적이라는 편집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항상 겪는 일들. 그러고는 음악이 흐르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장면 중 하나가 등장한다. 사실 이 단조로운 영화에는 이상하리만치 뇌리에 남는 장면들이 많다. 어두운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만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이다. 노을 진 하늘,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어스러지는 듯한 그림자만이 움직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또한 죽음의 또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어둠 속에 사라지는 조직원. 인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세계에 머물다 간다.      


  그다음 장면은 오키나와의 한 민가로 이동한다. 마치 존 포드의 <수색자>를 의식한 것과 같은 쇼트가 이어진다. 내부와 외부를 확실히 나눠찍은 쇼트. 이 영화의 백미는 여기부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 이상 무라카와 일행은 할 일이 없다. 누구와 싸우지도 말라고 하며, 죽이지도 말라고 한다. 몸을 숨기고 있으라는 지시. 부하들은 머리에 캔을 올려놓고 총을 쏘는 게임을 한다. 거기에 무라카와가 가담한다. 이젠 캔이 아니라 러시안룰렛이다. 무라카와는 총알을 넣지 않고 부하들에게 장난을 친다. 이 알 수 없는 농담. 단순히 장난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날 밤 무라카와는 그 총에 총알이 들어있어서 자신의 머리가 터지는 꿈을 꾼다. 꿈. 자신의 소원이 드러나는 꿈. 꿈은 반드시 소원 성취를 보여준다고 했던 프로이트의 말 대로라면 무라카와의 소원은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 날 한 여자의 남편을 죽인다. 어쩌면 무라카와는 자신이 죽고 싶은 것을 남을 죽이면서 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다음부터는 무라카와는 유희를 즐긴다. 여기는 말 그대로 유희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발생하는 이익을 기대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이익도 없이 즐기기 위한 나날들이 이어진다. 무라카와는 그 유희 속에서 죽음을 떠올린다. 오키나와라는 장소는 무라카와가 도쿄에서 일하던 공간과는 너무 다르다. 그곳은 마치 유토피아 같은 어떤 이미지와 함께 일본인들에게는 미군 기지가 존재한다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곳이다. 기타노의 인터뷰에서처럼 그곳에서는 마음 놓고 놀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기타노는 물에 들어가는 장면을 찍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무라카와의 상태와 어쩌면 오버랩된다. 무라카와는 그곳에서 유희를 즐기고 여자를 만난다. 하지만 이내 그 유희는 깨진다. 누구나 알 듯이 유토피아는 신기루일 뿐이다. 무라카와는 다시 양복을 입고 다카하시를 죽이러 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엘리베이터 장면이 이어진다. 어쩌면 <신세계>는 이 영화를 오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허접하게 말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야쿠자 세 사람의 표정을 우리는 바라본다. 그 표정은 마치 죽어있는 존재들과 같다. 그들의 표정에 드리운 죽음을 거둬들이기라도 하듯 다카하시와 그의 암살자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이내 총격전이 벌어지고 다카하시와 무라카와를 제외하고 전부 죽는다.      


  그런 다음은 잘 알다시피 <미치광이 피에로>를 오마주한 장면이 이어지고, 클라이맥스의 총격전이 이어진다. 무라카와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결국 스스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긴다. 무라카와는 죽는 것이 두려워지면 죽고 싶다고 말한다. 어쩌면 죽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은 살고 싶다는 것이고, 무라카와에게 살고 싶다는 것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계의 경계선을 허물려면 무라카와에게는 결국 죽음으로 하나의 세계를 파괴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이 허무한 기타노의 갱스터 영화가 우리에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아마도 한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부수기 위한 선택을 내리는 과정이 결국 그의 종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목격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오즈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었던 것처럼 무라카와는 자신의 섭리를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2021년 10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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