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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Oct 04. 2021

조나단 글레이저의 <탄생>

  조나단 글레이저. <언더 더 스킨>을 보고 기억한 이름이다. 2000년부터 그는 장편 영화를 단지 3편만 선보였다. 가장 최근의 작품이 <언더 더 스킨>인데, 난 이 영화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봤다. 정말 재미있었다. 순전히 쾌감적인 부분만을 지적하더라도 그렇다. 어느 날 멜빌의 <사무라이>를 보고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람평을 물었더니 졸았거나 지루하다는 평도 상당히 많았다. 난 너무 당혹스러웠다. 현대 오락 영화와 필적할만한 재미를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가 영화를 찍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다음 영화를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광고 감독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으로도 알려졌다.      


  그의 3편의 영화 중 데뷔작인 <섹시 비스트>를 아직 보지 못했다. 난 <탄생>을 보고 난 뒤 조나단은 타자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매개로 계속해서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아무 정보 없이 보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섹시 비스트>의 줄거리를 읽어보니 역시 누군가가 주인공에게 나타나는 내용이다. <섹시 비스트>가 아마도 누군가가 주인공에게 나타난 영화인 것처럼 보이는데, <탄생> 또한 주인공 션이라는 아이가 애나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언더 더 스킨>은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조나단은 어쩌면 우리와 같은 인물에게서 시작해서 조금씩 관객의 위치를 타자의 위치로 옮겨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세 편밖에 영화를 찍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에 매달리고 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휴머니티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탄생>은 역시나 첫 쇼트부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오프닝에 등장하는 션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다. 사진으로라도 보여줄 법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러니까 션은 익명의 인물로 남는다. 션이라는 이름은 단지 그를 지칭하는 것일 뿐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가 어린 션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션이 조깅을 하는 장면에 내레이션이 흐른다. 만약 자신의 아내인 애나가 죽어서 다음 날 새로 환생하여 자신에게 애나라고 소개한다면 자신은 어떡할 것인가. 믿을 수도 있을 것이고, 새와 사랑을 나눌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하며 그는 자신이 과학자이기 때문에 미신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무엇인가. 과학과 이성으로 지배된 이 사회에서 미신은 믿지 않겠지만 사랑은 믿을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사랑. 그렇다. 난 이 영화가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오프닝 쇼트에서 내가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것은 조깅하는 과정에서 길을 건너는 강아지들은 과연 연출된 것인지다. <언더 더 스킨>은 확실히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을 찾기는 힘들었는데, 오프닝 쇼트에서 이 부분을 보았을 때 놀라운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한국 영화 <끝까지 간다>의 오프닝에서도 강아지가 등장한다. 여기서는 확실히 연출된 강아지다. 이 강아지는 분명한 기능이 있다. 하지만 <탄생>에서의 강아지들은 전혀 기능이 없다. 그들은 그저 길을 건널 뿐이다. 만약 이게 촬영 중에 얻어진 것이라면 조나단은 축복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과연 저것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션은 션이 환생한 것일까, 아닐까. 둘 다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션은 조깅을 하다 죽는다. 왜 죽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흰 눈이 세상을 덮고 있지만 그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죽는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면 물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들어올려진다. 션의 환생인 것인가.      


  션이 처음으로 등장하면 애나와 조셉이 결혼을 발표하는 자리에 클리포드와 클라라가 등장한다. 사실상 중요한 등장인물이 여기서 모두 등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여기서 어린 션이 션의 환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인물인지도 모르고, 클리포드와 클라라가 애나와 조셉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클라라는 애나와 조셉을 만나러 가지 않고 클리포드를 남겨둔 채로 어딘가로 떠난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어린 션이 쫓는다. 클라라는 애나에게 줄 선물을 땅에 묻고 새로운 선물을 구매한다. 클라라가 그 자리에 동참한 장면은 나오지 않고, 클리포드가 애나와 조셉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우리는 마주한다. 그런데 여기서 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클라라가 왜 올라가지 못하고 새로 선물을 샀는지는 뒤에 나오지만 여기서 받은 이상한 느낌 중 클리포드와 애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은 영화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클리포드가 조셉의 연설을 듣는 과정에서 그의 표정은 확실히 착잡한 것처럼 느껴진다. 클라라가 건물을 나가고 난 뒤 다시 카메라가 클리포드를 비출 때 음악이 흐른다. 클리포드가 있는 공간에서 흐르는 음악이라고 생각되지만 거리를 가로지르는 클라라로 장면이 전환돼도 음악은 계속 흐른다. 클라라와 클리포드를 연결하고 있는 이 음악은 무엇인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 음악은 도대체 왜 두 공간에서 끊기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일까. 클리포드는 애나가 등장하자 여전히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애나와 클라라의 모습이 번갈아 보인다. 클리포드가 애나에게 다가가자 애나는 당황한다. 분명히 당황한다. 조셉이 나타나자 감정을 추스른다. 클리포드와 애나는 확실히 단순히 친구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클리포드는 자신의 짝이 없는 상태에서 애나를 만나는 것을 기피한다. 10분만 영화를 보았을 뿐인데도 영화에서의 관계를 고급스럽게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클라라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 아이 션은 그곳에 앉아있다. 션에 대한 이상한 감각.      


  션이 그곳에 앉아있는 모습은 이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를 다시 본 사람만이 그 쇼트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아마도 션은 맨 처음에는 애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가정교사인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묘한 것에 끌려 클라라를 따라갔고, 클라라가 묻어 놓은 애나의 편지를 발견하고 자신이 션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다음 장면에서 션이 침대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것이다. 조나단의 불친절함으로 인해 난 첫 관람에서 처음부터 션이 애나를 찾아왔다가 결국 만나지 못하여 애나의 엄마 생일 파티 때 애나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에 맨 처음 등장한 션은 어린 션일 뿐 애나의 남편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그가 클라라를 따라간 것은 분명 어떤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클라라가 건물을 나설 때 잠시 션을 돌아보는 부분이 있다. 이건 설명할 수 없다. 오로지 그 기분을 느낀 순간을 떠올려야 한다. 불길한 예감이 맞았을 때, 무언가 예상한 일이 너무나도 기적처럼 맞아떨어진 그 순간. 어린 션이 처음 화면에 등장한 쇼트와 애나의 편지를 보고 난 뒤의 션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이 앉아있다. 하지만 션은 마치 그레고리 잠자가 갑충으로 변한 것의 정반대로 변했다. 모습은 그대로지만 내면은 완전히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또래 친구들과 놀 수 있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애나의 엄마인 앨리너의 생일 파티에 들어간 션은 안나와 대화를 하기를 요청한다. 난 이 연출에서 정말 놀랍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션이 애나의 집에 들어가자 불이 꺼지고 애나가 앨리너의 생일 케이크를 들고 온다. 어둠 속에서 촛불만이 빛을 낸다. 앨리너의 생일이자 션의 새로운 생일. 불이 켜지자 션이 애나와 이야기를 나누러 왔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숏-리액션 숏을 일부러 피하거나 고전적 할리우드 문법을 깨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 션에게 리액션 쇼트는 할애되지 않는다. 그 순간 우리는 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션은 이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다시 태어난다. 아이 션은 자신이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 어이없는 주장에 애나는 션을 돌려보낸다. 애나는 그런 다음 돌아와서 이 어이없는 상황을 알리고 조셉과 섹스를 한다. 카메라는 그를 부감으로 내려다보며 점점 멀어진다. 애나의 육체는 조셉과 가장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마치 카메라는 애나가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 그렇게 점점 하늘로 멀어진다.      


  섹스 장면에서 암시하듯 애나의 마음은 요동친다. 다음날 아침 애나는 익명의 편지를 받지만 열어보지 않는다. 조셉 앞에서 열어볼 수 없는 그 편지. 그 편지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애나는 분명히 느끼지만 편지를 개봉한 뒤에 일부러 조셉과 가족에게 그 편지의 내용을 이야기한다. 숨기면 자신의 감정을 들킬까 봐 일부러 편지를 공개한다. 편지를 공개하는 장면을 보면 설정 쇼트는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전에 가족들은 전부 싱글 쇼트로만 등장한다. 숀의 등장에 대한 가족들은 제각각의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 생각의 이면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장면의 종결부에 등장하는 이 가족을 지배하고 있는 조셉을 가운데 놓은 구도이다. 조셉은 이 가족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이다. 하물며 조셉은 이 편지를 자신에게 보여주는 이유를 묻는다. 이건 애나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결국 조셉은 아이 션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아이 션은 더 이상 아이 션이 아니다. 션이 애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그 누구라도 혼란스러울만하다. 션은 애나에게 거부당하자, 혹은 션이 애나와의 만남이 금지되자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그 순간 바그너의 발퀴레가 흐른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바그너의 발퀴레는 흐른다. 발퀴레는 과연 그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애나의 감정 상태인가. 발퀴레 1막. 금지된 남매의 사랑 이야기. 지크문트와 지클렌데는 헤어진 쌍둥이 자매다. 어느 날 둘이 사랑에 빠지고 난 뒤에야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애나는 금지된 사랑에 빠졌다. 비극. 그다음 장면에서 션의 가족이 등장한다. 션은 엄마에게 더 이상 당신의 우스꽝스러운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10살의 션. 청소년기의 션. 사랑에 빠진 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영화가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이건 비극이라는 것만 지적하도록 하자.      


  션은 학교에 가서 애나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그 음성 메시지는 애나의 엄마 앨리너에게 전달된다. 앨리너와 애나는 식사를 한다. 둘의 공통점은 서로 남편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없는 여성은 어머니를 통해서 음성을 전달받아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게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문해 볼 가치는 있다. 왜 앨리너는 조셉과 애나의 결혼을 지지하는가? 왜 애나의 언니는 조셉과의 결혼을 지지하는가? 왜 애나는 조셉에게 결혼을 구걸하는가? 왜 애나의 집은 여성만이 존재하는가? 심지어 애나의 언니는 딸을 낳는다. 여성에게는, 가정에게는 남성이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이런 방식이라면 이 영화는 션이 남성성을 부여받지 못한 상태여서 존재가 부정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왜 하필 션을 검증하는 것은 밥에게 부여되는가?      


  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보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사랑의 관점으로 돌아와서 밥과 션의 대화 장면을 살펴보자. 션은 밥에게 직장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밥은 아이를 가졌다고 이야기한다. 션은 왜 밥이 직장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와 같이 일했을 때 밥은 직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자리 잡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션이 애나와의 관계 이야기를 할 때 영화는 션이 이야기하는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버린다. 그 대화에 녹음테이프를 듣고 있는 애나의 반응 쇼트가 들어간다. 왜 그렇게 편집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3명의 반응 쇼트를 본다. 고백을 받고 있는 애나, 그리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밥, 마지막으로 아이 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이 션의 엄마. 션과 션의 엄마와 애나는 삼각관계를 이룬다. 그다음은 션의 엄마가 션을 데리고 애나의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션을 심문(?) 하는 과정에서 애나와 션의 엄마만이 그 자리에서 배제된다. 카메라는 션의 심문이 아니라 션의 엄마와 애나를 바라본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핵심이다. 첫 번째로 애나와 션, 그리고 조셉. 두 번째로 애나와 션, 그리고 클라라. 세 번째로 애나와 션, 그리고 클리포드. 네 번째로는 션와 클라라, 그리고 클리포드. 다섯 번째로 애나와 션, 그리고 션의 엄마이다. 첫 번째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있다. 두 번째 관계에서는 애나는 끝내 션이 클라라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모른다. 세 번째 또한 션은 애나와 클리포드의 관계를 끝내 알지 못한다. 네 번째도 클리포드는 션과 클라라의 관계를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다섯 번째의 경우 모든 것이 드러났지만 이제 모든 것은 잊힐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사랑의 아이러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하지만 그것은 결혼 아래에 숨겨져야 할 것이 분명하다. 어느 누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이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을까? 혹은 육체적 관계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을까?      


  애나는 이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클리포드와 클라라를 찾아간다.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클라라의 입을 통해 듣는다. 쇼트의 경제성으로 보면 이건 생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텍스트 아래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이들의 관계다. 이들은 알지 못하는 그 관계가 관객에게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서로가 서로의 비밀을 모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만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이 존재한다. 애나는 숀과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왜일까? 애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애나는 왜 클리포드에게 그 애가 자신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해달라는 부탁을 할까? 내가 바라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애나는 지금 기댈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애나는 클리포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알고 있다. 하지만 클라라는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션만을 생각한다.      


  애나는 션의 학교로 찾아간다. 그리고 가벼운 척 진지하게 션에게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묻는다.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애나는 점점 션에게 빠진다. 조셉과 한 약속을 어기고 애나는 션과 시간을 보낸다. 애나가 전화를 받지 않자 조셉은 불길함에 사로잡힌다. 그때 카메라는 밖에서 조셉에게 점점 다가가는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조셉의 육체는 유리창에 비친 나뭇가지들로 난도질당한다. 그다음 바로 붙는 애나의 쇼트는 마치 둘이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편집했지만 애나의 시선에는 아이 션이 철봉을 한다. 그러니까 조셉이 있어야 할 애나의 시선에 아이 션이 있는 것이다. 애나는 션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음악을 듣게 하여 션에게 자신의 결혼을 확신시키고 싶다는 말을 한다. 쇼트가 바뀌면 션은 철봉에서 떨어진다. 실패. 애나는 션의 엄마에게 한 이야기를 실패할 것이다. 그건 예정된 것이다. 그것이 예정된 까닭은 이미 애나가 션을 사랑하고 있어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애나는 욕조에서 션을 받아들인다. 섹스를 할 수 없는 육체. 그 욕조 씬은 사실상 관계다. 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을 누구라도 알만한 장면. 조나단은 묻는다. 만약 진짜 아이 션이 애나의 죽은 남편이라면 이것은 문제인가? 난 이 문제를 논쟁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할 것이다.    

  

  결혼 음악회에서 가족들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애나는 귀신에게 홀리듯 션에게 입술을 빼앗긴다. 그 장면은 빼앗겼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애나는 션에게 홀린 것처럼 묘사된다. 이어 클리포드가 애나의 집에 도착하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션을 클리포드를 보자마자 뛰어가 안는다. 하지만 클리포드는 애나에게 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애나는 맞다고 대답한다. 왜 클리포드는 션이 아니라고 말할까? 단지 얼굴 한 번 봤을 뿐인데. 만약 아이 션이 정말 션이라면 클리포드는 다시 한번 패배감에 젖어야 한다. 클리포드는 클라라도 션에게 빼앗겼고, 애나도 빼앗지 못했다. 이어서 클라라가 등장한다. 흙 묻은 손. 애나의 편지들을 찾지 못한 것이다. 아이 션은 이미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 처음 던지는 말은 애나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 모든 일의 처음에는 클라라가 묻은 애나의 편지를 읽은 아이 션이 그동안 자신이 션이라고 증언한 내용들을 숙지했다고 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런데 아이 션은 단 한 번도 그런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션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션은 오로지 자신이 애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라고 주장한다. 이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클라라가 자신과 션의 부적절한 관계를 고백하자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 애나가 아니라 클라라를 사랑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더 이상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클라라와 헤어진 뒤 아이 션은 나무에 올라간다. 나무에 올라가는 이유는 하나다.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한 션이 살아있을 때의 강연에서 등장한 새와 션은 똑같은 상태다. 션은 나무 위에서 시간을 보낸 뒤 애나에게 자신이 션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프닝에서 션의 내레이션처럼 아이 션은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 션은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다. 하지만 아이 션과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 믿는 바대로 아이 션은 션이 아니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는 영화다. 다시 한번 욕조 장면이 이어진다. 애나는 완전히 마음을 다잡고 션에게 도망가자고 제안하지만 아이 션은 자신이 션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은 오로지 사랑으로만 규정된다는 믿음이다. 아이 션이 대답하고 숏-리액션 숏이 이어지고 난 뒤 풀 쇼트로 전환되면 션이 욕조 안에 들어가서 프레임에서 사라진다. 숏의 개념으로만 보자면 숀은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애나의 상태. 시네마틱 한 감각. 조나단은 천재일지도 모른다. 션은 이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난 션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션은 곧이어 자신의 엄마가 도착한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가서 발퀴레의 근친상간 텍스트. 왜 션과 애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을까. 션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아이 션의 나이였을까. 생각의 가지가 그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참아보지만 영화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제 션과 애나의 관계는 끝났다. 아이 션이 죽은 남편 션이 아니라면 애나와 션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되는 것일까? 여전히 아이 션은 죽은 남편 션이던 그렇지 않던 애나를 사랑한다. 아이 션은 사랑이 아이덴티티를 규정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애나는 누구인가. 션을 사랑하는 애나? 클리포드를 사랑한 애나? 조셉과 결혼할 애나? 그렇다면 클라라는 어떠한가. 션을 사랑하는 클라라? 클리포드의 아내 클라라?       

  영화는 애나의 결혼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애나의 결혼으로 끝난다. 애나의 결혼식에 션의 편지가 읽힌다. 다음 생에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편지를 마무리하는 숀. 그가 애나의 죽은 남편 션이던 그렇지 않던 중요한 건 한 가지다. 숀은 애나를 사랑한다. 만약 숀이 애나를 사랑하는 것만이 중요한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욕조 장면을 반문할 필요가 있다. 그 욕조 장면은 양쪽 어느 선택지를 선택해도 성립될 수 있는 장면인가? 영화에서 오로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아이 숀이라면 그 장면을 성립시킬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까닭은 아이 션은 클라라와 션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영화는 션이 환생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션이 환생했다면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클라라의 고백은 영향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환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죽은 남편 션의 무언가가 아이 션에게 있다면 어떠할까?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러면 아이 션은 죽은 남편 션이 될 수 있을까? 아이 션은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렇다고 믿을 수 있을까? 순수에 가까운 이 사랑을. 애나는 션의 편지를 어떻게 읽었을까. 죽은 남편 션이라고 읽었을 것 같다. 애나는 다음 생이라는 말에 바다에 몸을 던질 듯이 울부짖는다. 혹은 션과 처음으로 만난 바다에서 하염없이 션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내 조셉에게 이끌려서 해변가를 걷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난 이 쇼트가 저승사자에게 이끌려가는 한 여자라고 느껴졌다. 결혼이라는 것. 누군가를 품고 만족하지 못할 누군가와 살아가야 한다는 것. 결혼에 성공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영화는 여전히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삶을 지탱하는, 10년 동안 그 편지들을 버리지 않았던 클라라 같은, 그들을 위한 비극이지 않을까. 그 편지가, 애나의 마음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2021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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