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들을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아마도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로 국내에 이름을 알렸을 텐데, 그의 영화들을 접하면 당황스럽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논-픽션>이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대사와 함께 쏟아지며, <퍼스널 쇼퍼>의 경우 종잡을 수 없는 형태의 이야기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두 번 볼 때 비로소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건 영화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서 두 번 보는 경험을 한다기보다는 영화를 힘겹게 쫓아가면서 그의 장면 연출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노련함으로 인해 나의 부족함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맡은 발렌틴이라는 역으로 시작한다. 발렌틴의 미디엄 쇼트로 시작하기 때문에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각은 기차의 흔들림이다. 이 영화는 발렌틴으로 시작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기차로 시작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녀의 통화는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거나 혹은 지형으로 인해 송신이 잘되지 않는다. 또 하나 유념해야 할 점은 핸드폰을 두 개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업무용 핸드폰과 개인적인 핸드폰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 두 핸드폰은 서로 뒤섞인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극작가이자 감독인 발렘의 상을 대리 수상하기 위해 시상식장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마리아는 이혼 절차에 관한 문제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녀가 이혼 절차에 시달린다거나 발렘의 시상식장을 향해 가는 것보다도 오히려 첫 시퀀스에서 이상할 정도로 감춰져 있지만, 두 번째 관람에서 느껴지는 것은 마리아가 발렘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마리아와 발렌틴이 연극 <말로야 스테이크>의 시그리드와 헬레나와 유사한 인물들과 관계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극중 리메이크 버전의 <말로야 스테이크>를 감독하는 클라우스의 말대로 만약 시그리드가 20년 후에 헬레나가 된 것이라면 지금 마리아와 발렌틴은 한 인물의 두 가지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마리아는 발렘의 죽음을 애써 피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발렘의 부고 소식이 전해져 올 때 이혼 절차에 관한 문제로 변호사와 전화 통화를 한다. 최대한 부고 소식을 늦게 들으며 게다가 발렘의 아내 로사에게 전화가 왔을 때도 마리아는 그 전화를 받지 못한다. 마리아는 발렌틴을 이용하여 발렘의 죽음을 최대한 늦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상한 장면 중 하나는 발렘의 시체 수습 장면이다. 우리는 그 시체가 발렘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영화의 흐름상 그 시체는 발렘이 아닐 수는 없다. 로사의 말대로라면 발렘은 이미 죽었고, 저녁나절 외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체는 화창한 날씨의 오전에 수습된다. 아마도 눈 덮인 스위스의 실스마리아는 시체를 수습하러 오기에는 늦었기에 다음 날 오전인 마리아가 부고 소식을 듣는 그 시각 시체를 수습하러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저녁나절이라고 발렌틴이 이야기하는 순간과 시체를 수습하는 장면은 거의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이상한 시간 감각이 발생한다. 동시에 이 장면은 발렘의 시체를 수습하는 장면이지만 실스마리아의 풍경을 찍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실스마리아와 발렘을 무언가 연결 짓고 있다. 혹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실스마리아를 떠나는 발렘을 찍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개의 쇼트가 지나간 후 발렘과 로자가 살던 집을 떠나는 차량이 보인다. 아마 그 차에는 발렘과 로자가 타고 있을 것이다.
마리아와 발렌틴이 기차에서 내려 호텔방에 도착하고 난 뒤의 편집은 이상하다. 발렘의 죽음을 통해 덕보고 싶은 사람을 보기 싫다고 말하는 마리아는 냉장고에서 술을 꺼낸다. 이 장면은 정확하게 점프컷되어 있다. 여기까지 봤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단순히 시간의 생략을 위해 그런 편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렘의 집으로 돌아와서 로자가 통화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점프컷으로 로자와 마리아를 엮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두 여자의 심정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로자는 유일한 비밀을 마리아와만 공유한다. 그리고 마리아가 로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는 것은 발렌틴과 사진작가 번트와 애정행각을 보는 장면이다. 여기서 마치 마리아가 그들을 보면서 발렘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 근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올리비에는 이 장면에서 독특한 대사를 썼다. “미래의 전 남편.” 이 이상한 시간감각. 미래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 문장. 이 시간감각이 이 영화에서 굉장히 이상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감각이 이 영화를 인상적이게 만든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시상식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헨릭을 만난다. 그와의 과거를 발렌틴에게 이야기해 준다. 18살 때 마리아는 시그리드를 맡았고, 헨릭에게 대시를 받았다. 아마도 잠시 사귀다가 작품이 마무리된 후 헨릭은 마리아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차단했을 것이다. 이 과거는 뻔한 이야기지만 영화에서 이상하게 작동한다. 이 역시 위의 내용처럼 뒤에서 한 번에 이야기할 것이다. 마리아는 헨릭이 무대에 서자 발렌틴과 이상한 기류를 내보인다. 발렌틴이 과거의 마리아의 매력을 칭찬하자 장난인 듯 성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이 반응은 우리가 뒤에서도 계속 보게 된다. 아마도 클라우스와의 대화를 미리 가져와야 할 것 같다. 클라우스와의 대화에서 마리아는 분명하게 자신은 이성애자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발렌틴과 계속해서 레즈비언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건 아마도 마리아가 과거의 시그리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건 마리아가 여전히 시그리드로 살고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마리아는 시그리드를 연기한 18살 때의 마리아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자신이 여전히 시그리드라고 이야기하며 이성애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클라우스에게 헬레나가 시그리드에게 끌린 이유는 젊음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헬레나가 시그리드에게 끌린 이유는 시그리드가 헬레나 내면의 폭력성에 불을 질렀다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동일한 상처를 가진 두 여자의 끌림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올리비에는 이 대화에서 시그리드를 연기하고, 그 그늘 아래에 계속 존재하고 싶은 마리아보다 클라우스 편에 선다. 클라우스가 마리아와 만났을 때는 동일한 위치를 점유하지만 이내 마리아는 클라우스를 내려다보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는 클라우스가 마리아를 내려다본다. 그러면서 둘의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다. 게다가 줄리엣 비노쉬의 훌륭한 연기는 마리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마리아는 클라우스가 떠나기 전 수잔 로젠버그를 언급한다. 헬레나를 연기하고 1년 뒤 차 사고로 죽은 그녀. 헬레나를 연기한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때 마리아는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배우의 삶에 스며드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마리아가 클라우스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마리아가 여전히 자신을 시그리드를 연기한 18살의 마리아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올리비에는 헨릭을 이용한다. 마리아는 헨릭의 유혹을 뿌리친다. 그러고는 그에게 자신의 룸 넘버를 전달한다. 하지만 헨릭은 마리아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다. 마리아는 헨릭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가 관심이 있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18살의 마리아라는 것. 헨릭이 자신을 거절하자 시그리드를 연기할 조앤 앨리스를 검색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제 늙었다. 헨릭이 그것을 증명한 것처럼 마리아는 이제 시그리드를 연기할 수 없고, 헬레나를 연기해야만 한다. 이제 마리아는 헬레나의 모습으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2부가 시작된다.
2부가 시작되면 실스마리아의 경의로운 풍경들이 지나가고 발렌틴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리아는 헬레나의 모습처럼 짧은 머리가 되었다. 길을 잃었다는 발렌틴의 말을 뒤이어 마리아는 현실과 과거가 뒤섞여서 혼란스러운 꿈을 꿨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건 우리가 곧이어 볼 장면들을 예언하는 격이다. 우리는 앞으로 길을 잃을 것이고, 현실과 과거가 뒤섞여서 혼란을 느낄 것이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로자를 만나고 마리아는 로자와 함께 발렘이 죽은 장소로 향한다. 그 장소는 우리가 일전에 봤던 시체 수습 장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눈 덮힌 실스마리아와 그렇지 않은 실스마리아는 다른 아름다움을 내비친다. 우리는 이 장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영화의 후반부에 똑같은 쇼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가 왜 말로야 스네이크인지 항상 궁금했던 것 같다. 그런 마리아에게 말로야 고개를 넘는 구름이 뱀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경이롭지만 악천후 직전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말로야 스네이크의 경이로움에 압도당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좋지 않은 일들을 예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이 100년 전쯤의 영상. 우리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이미지로 처음 접하게 된다. 또 하나 지적할 점은 이 장면에서 마치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 포지션 중 하나는 분명 마리아의 뒤에서 화면을 지켜보고 있다.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한 사람밖에 없다. 발렘의 유령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기 위해 실스마리아에서 배회하고 있다.
이제 로자마저 자리를 비켜주고 발렌틴과 마리아 둘만 남는다. 마리아는 발렘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거기엔 욕망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덧붙인다. 영화는 이 이상 마리아와 발렘의 관계를 파고들지 않지만 이들 사이에 단순한 애정 그 이상이 있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이후 발렌틴은 조앤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마리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조앤에 관한 영상을 본다. <퍼스널 쇼퍼>에서는 계속해서 문자 메시지가 나오지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간간이 아이패드 화면이 나온다. 이 디지털 화면이 결코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영화 극 초반부 발렌틴의 아이패드 배경화면이 마치 깨져있는 것 같은 페이크 배경화면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언제나 배우는 그러하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배우에게 존재한다. 발렌틴은 조앤이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조앤을 만났을 때는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조앤의 “진짜”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리아가 발렌틴을 대하는 기묘한 기류를 감지한다. 그녀는 여전히 시그리드가 레즈비언인 것처럼 이성애자이지만 레즈비언의 경향을 내비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헬레나가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그녀의 위치로 가는 연습을 하는 것일까?
영화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마리아는 헬레나 역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헬레나에게 이입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수잔 로젠버그와의 기억, 늙는다는 것의 두려움, 패배감에 둘러싸인 헬레나를 연기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늙어버린 마리아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줄리엣 비노쉬와 겹쳐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가 단순히 나이가 든, 과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던 배우였던 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각본을 쓰고 거장 앙드레 테시네가 연출을 맡은 <랑데부>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주연으로 데뷔했다. 게다가 <랑데부>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맡은 역은 니나다. 조앤이 <갈매기>의 니나라고 언급했지만 오버랩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마리아와 발렌틴의 연습은 우리로 하여금 말 그대로 마리아와 발렌틴, 그리고 시그리드와 헬레나, 또한 시그리드와 같은 발렌틴과 헬레나와 같은 마리아, 과거 줄리엣 비노쉬와 현재 줄리엣 비노쉬가 겹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마리아는 헬레나가 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산속 호숫가에서 옷을 벗고 수영을 한다. 굉장히 이상한 장면이다. 둘의 관계는 어떤 사이인 것인가? 벌거벗고 수영을 한다는 것. 그들은 유토피아에 와있다는 것일까? 혹은 유토피아로의 소망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 이상한 장면도 당혹스럽지만 발렌틴이 번트를 만나러(혹은 만나고 오는) 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순간일 것이다. 마리아는 발렌틴이 번트를 만나러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열쇠를 최대한 늦게 건네준다. 발렌틴이 나가자마자 그녀의 떠나는 모습을 뛰어 올라가서 바라본다. 마리아는 수첩에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단어를 적는다. 마리아는 자신의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계약 파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발렌틴은 구불구불한 도로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이 순간 말로야 스네이크가 화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버랩되는 화면과 이상한 전자음이 귀를 때리고 이내 발렌틴은 차를 세우고 내려서 구토를 한다. 나는 이 장면의 해석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이 장면이 번트를 만나고 오는 길일 거라고 추측한다. 영화의 시간대가 그러하다. 그리고 이 이상한 장면을 곱씹어 보면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마리아가 헨릭에게 차였을 때 굉장히 힘들다고 한 부분. 발렌틴이 시그리드와 겹쳐서 볼 수 있는 캐릭터라면 충분히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수잔 로젠버그의 차 사고. 그녀는 헬레나를 연기하고 죽었다. 그런데 극 중에서 헬레나도 분명 시그리드에게 차였던 것이다. 극 중에서는 트래킹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지만 수잔 로젠버그는 차 사고로 죽었다. 이 두 가지가 이 장면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연출은 너무 과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마리아가 수첩에 말로야 스네이크를 적었을 때 풍겨오는 불안감은 아마도 악천후의 영향일 것이고, 마리아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순간 진짜로 말로야 스네이크를 마주한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로야 스네이크. 이전에 등장했을 때는 다른 영화 화면이었을 뿐이다. 아마도 이제부터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신호일까?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발렌틴을 몰래 들여다본다. 여기서 우리는 발렌틴의 팬티를 주목해야 한다. 산속 호숫가에서 그녀는 흰색의 사각팬티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가 방 문을 열었을 때는 티팬티다. 이건 분명히 성적인 코드다. 발렌틴은 티팬티를 입었지만 아마도 마리아처럼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다음 장면은 정말 이질적인,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분명히 비웃는 할리우드의 저급한 영화들을 지목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극장에서 마리아와 발렌틴은 마치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조앤의 영화를 본다. 마리아는 3D 안경에 호기심이 있다는 듯 벗었다 썼다 한다. 짖굳게도 감독은 이 장면이랑 카지노 장면을 바로 붙였다. 마블 영화를 테마파크라고 표현한 어떤 감독처럼 올리비에도 분명히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좋지 않은 시각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발렌틴의 티셔츠에 배트맨을 그려놓은 것은 시대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시각이 엿보인다. 발렌틴은 번트와 잘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우린 듣지 못한다.
점점 현실과 그들의 연극 연습의 경계가 흐려진다. 아니 경계가 흐려지는 것과 동시에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는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처럼 된다. 발렌틴은 자신의 의견이 헬레나를 연기하려는 마리아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겨지자 마리아를 떠나는 것을 생각한다. 어스름이 깊게 내려앉자 발렌틴은 마리아에게 불만을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가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와 오버랩된다. 마리아는 연극과 현실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발렌틴은 마리아를 떠나려 하고 마리아는 발렌틴을 붙잡는다.
이제 조앤이 등장한다. 여기서 감독은 조앤을 통해서 레이어 하나를 더 만든다. 조앤과 사귀는 크리스는 유부남이고, 그의 아내는 조앤과 바람난 크리스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다. 이 또한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조앤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유머러스하게 줄리엣 비노쉬의 필모와 오버랩시키게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 니나는 체홉의 <갈매기>가 아니라 앙드레 테시네의 <랑데부>다. 이다음 마리아와 발렌틴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려고 산을 탄다. 발렌틴은 도중에 글은 물체와 같아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그건 발렌틴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앞서 마리아와 로자가 산을 타던 장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똑같은 사이즈와 앵글로 찍었다. 앞에서는 둘 다 프레임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지만 마리아와 발렌틴의 쇼트에서는 마리아와 발렌틴이 사라졌다가 발렌틴은 영영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남다은 평론가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실제 순간 본 자는 관객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영상은 이미지였고, 두 번째는 발렌틴과 디졸브 되면서, 세 번째는 마리아가 발렌틴을 찾기 위해 관객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이한 순간을 관객 또한 실제로 보지는 못한다. 말로야 스네이크가 실재한다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누구도 실제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언젠가는 형성되는 구름이고, 지나가면 기상이 악화되며, 그런 다음 화창한 날씨를 불러올 것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젊음으로 환원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이 기이한 현상이 어떤 것을 비유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어떤 현상인 것이고, 그 신비로움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보기 드문 자연 현상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마리아도 그러했을 것이다. 분명 맑은 날이 있었고, 말로야 스네이크를 만들었을 기이한 신비로움이 있었고, 그다음 악천후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 우리는 다시 맑은 날은 맞이한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젊음을 비유하거나 인생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그 자체로 말로야 스네이크이다. 거기서 발렘이 무엇을 봤는지는 모른다. 시그리드의 20년 후의 이야기를 쓰던 발렘은 그곳에서 자살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발렘이 왜 자살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기 위해 그 자리에 갔다. 혹은 보면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죽어야만 볼 수 있는 것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젊음이 지나간 씁쓸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마리아는 크리스의 아내 도로테아를 보며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조앤의 젊음이 마리아의 성숙함보다 값진 것일까? 다시 한번 지적하자면 우리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이미지이고, 조앤의 실제는 아무도 모르지만 동경의 대상이다. 우리는 그 환영과 힘겹게 싸워내는 마리아를 보았다. 마리아의 부탁을 거절하는 조앤. 그러고 난 뒤 마리아의 표정은 정말 씁쓸한 것이었을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바꿔 말하면 말로야 스네이크다. 실스마리아의 구름. 또 하나의 연극. 클라우스의 말을 빌려 조앤은 지금 마리아 내면의 폭력성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난 마리아가 아마도 이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처럼 최고의 연기를 펼쳐 보일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2021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