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은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아마도 이창동이라는 한 사람의 감독이 이전에 보여준 행보와는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배우 유아인이 페미니스트들과 불화에 휩쓸리면서 논란은 거세졌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를 떠나 어떠한 작품이든 예술가의 손에서 떠난 작품은 온전히 관람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아인이라는 배우, 이창동이라는 감독을 떠나 온전히 <버닝>만 보고 나는 긍정적인 의미로 역겨웠다. 다시 보고 난 다음 내가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난 벤이 등장하고 난 다음부터 역겨움이 몰려왔으며 곱창전골 집에서는 구역질이 났다. 이것은 아마도 <건축학개론>에서의 대학 선배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물론 <버닝>은 <건축학개론>과는 달리 더 사실적이고 더 노골적이다. 난 이 장면에서 내가 벤을 죽이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종수가 벤을 죽일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물론 이는 어쩌면 너무 비약적인 관객의 태도일지도 모르지만 영화가 그 장면을 보여줬을 때 나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타협을 느꼈다. 그렇다, 분명 나는 타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생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버닝>의 논란은 영화 외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청년의 무기력함이나 패배감, 혹은 어떤 상실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영화 자체가 너무 미스터리하게 흘러가서 투명한 것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창동 감독의 의도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일리 있어 보인다.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 퍼즐이 맞춰지지 않게 계산했을 것이다. 서사도, 플롯도, 그리고 이미지도. 이 영화의 첫 쇼트는 무엇인가. 트럭의 뒷모습인가, 혹은 백지인가, 아니면 흐릿하게 보이는 은행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연기인가. 이 묘한 쇼트는 어떤 것도 단정 짓지 않는다. 영화의 프레임부터 시작하여, 장면, 시퀀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화 자체는 결론을 내릴만한 어떠한 도착 지점을 알려주지 않는다. 표지판만 늘어놓고는 관객에게 안내해 줄 뿐이다. 하지만 그 안내 표지판은 흐릿하거나 혹은 다른 표지판과 대척점에 놓인다. 그러면 이런 미스터리는 왜 필요한가. 이창동 감독은 지금 젊은 세대가 느끼는 불안이 이 미스터리에 근거한다고 본다. 알 수 없는 개츠비같은 인물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21세기 개츠비는 더 이상 한 여자를 바라보는 낭만적이고 연민 어린 인물이 아니라 이제는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약탈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미가 벤에게 살해당했는지, 혹은 우물이 있었는지, 그런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이창동 감독이 젊은 세대에게서 본 분노와 불안, 그리고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해미는 아르바이트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런 해미는 종수를 한눈에 알아보지만 종수는 해미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미가 종수에게 처음으로 묻는 질문(춤을 추는 아르바이트 생으로서가 아니라)은 ‘여자친구 있어?’이다. 이건 누가 봐도 시계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그 시계는 종수를 거쳐 해미에게로 향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종수의 여자친구는 이제 해미다. 하지만 영화의 진행과는 다르게 서사는 둘을 연인이라고 볼 수 없게 만든다. 해미가 술을 권유하고 둘이 술을 마시는 자리의 종결부에서 종수는 옆에 있는 커플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본다. 나는 이 장면이 <버닝>이라는 영화에서 계속 변주되는 관계라고 본다. 삼각관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종수와 해미의 대화만 바라보기 때문에 제 삼자가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을 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해미의 대사다. 여기서 해미는 중요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팬터마임과 헝거에 대한. 귤을 까는 팬터마임을 선보이는 해미는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는 것을 잊으라고 말한다. 없다는 것을 잊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해야 침이 고인다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신체의 기관들이 활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다. 팬터마임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실제하지 않는 것들을. 두 번째로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리틀 헝거는 단순히 배가 고픈 사람이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가 고픈 사람들이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결합시키면 삶의 의미는 팬터마임으로 가질 수 없다. 그러니까 실재하지 않은 것들은 팬터마임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건 꽤나 중요하다. 해미가 사라진 후 종수는 팬터마임으로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으면 되지만 동시에 그곳에는 사랑하는 해미를 곁에 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실재하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서 종수가 해미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해미는 종수의 팔짱을 낀다. 종수의 반응을 보면 둘은 그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해미의 집으로 들어갈 때 집주인 아주머니를 본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종수와 해미를 바라본다. 그 불편한 시선, 그 엉큼한 시각이 들어맞다는 것을 곧 보게 된다. 하지만 그전에 해미의 방을 설명해야 한다. 해미의 방은 작은 원룸으로 북향으로 나있는 창이 하나 있다. 그곳에서 매일 아주 짧은 시간 한 번 남산타워에 비친 햇살이 방 안 구석으로 아주 조금 들어온다. 해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7살 때 우물에 빠져서 구출되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어쩌면 해미는 지금도 하루 한 번 햇살이라는 아주 희미하고 적은 온기에 기대 누군가에게 구출 받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7살 때 그랬던 것처럼 종수가 자신을 구출해 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여하간 해미는 자신의 구원자를 여럿 갈아치웠을 지도 모른다. 콘돔도 낄 줄 모르는 종수에 반해 해미는 혼자 살고 있는 집에 콘돔을 구비해놓고, 그리고 종수가 콘돔을 잘 못 끼자 자신이 끼워준다. 그리고 둘의 섹스는 시작된다. 하지만 이 섹스 또한 이상하다. 종수와 해미가 하는 섹스인데, 영화는 마치 종수가 빛과 섹스하는 것처럼 편집했다. 이 이상한 편집은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뒤에도 이어진다. 종수는 해미의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하기도 하지만 해미의 사진보다 남산 타워의 비친 빛을 보고 자위를 한다. 이 빛은 무엇인가. 이 설정이 이상하게 에로틱한 까닭은 어쩌면 햇살이 창을 뚫고 들어온다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창동의 영화는 <버닝> 또한 예외 없이 문학적이다.
종수는 아버지의 일로 아버지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파주라는 공간에는 대남방송, 아버지, 청년 실업 방송,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 트럼프 등이 있다. 아마도 트럼프 얼굴에 종수의 소변보는 장면을 한 프레임에 담은 까닭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하간 이창동은 우리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무언가 닿지 않는 요소들을 파주로 끌고 들어온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남북문제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그런 문제는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해미의 태도와는 반대다. 없다는 것을 있게 하는 것과 있다는 것을 잊는다는 문제. 그러니까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은 이런 형태를 취한다. 벤은 있는 문제를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혹은 단순히 재미있게 바라본다. 해미는 그 반대다. 종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종수는 포크너의 소설과 닮아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포크너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창동 감독은 포크너의 테마는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에게 옮겨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수 또한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는 종수에게로 옮겨진다. 마치 가난이 대물림되듯이. 아버지의 변호사는 종수의 아버지 친구다. 우리는 변호사가 종수에게 아버지에 관한 소설을 써보라고 하는 대목에서 종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종수 아버지의 고집처럼 종수 또한 고집이 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해미가 한국으로 벤과 함께 돌아오면서 진행된다. 딱히 어떠한 사건도 없고, 종수가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다만 벤의 도착 자체가 종수와 해미에게는 사건이다. 그들의 삶을 뒤흔들 사건.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창동 감독은 노골적으로 벤과 종수를 투 쇼트로 잡는다. 곧이어 쓰리 숏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벤이 통화하면서 느끼는 위화감은 관객들도 느낄 것이다. 이 장면 또한 나는 <건축학개론>과 <기생충>을 소환할 수밖에 없다. <건축학개론>에서는 승민(이제훈 역)이 뒷좌석에 탔고, 선배(유연석 역)와 서연(수지 역)은 앞에 탔다. 그리고 대학 선배는 승민의 게스 티셔츠가 짝퉁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압서방이라는 단어를 꺼낸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 역)은 기택(송강호 역)에게 드라이브를 잘 한다며 선을 넘지 않는 것을 칭찬한다. 하지만 한 차 안에서 냄새만은 선을 지키지 못한다는 게 흠이다. 종수는 벤의 통화 소리에 승민과 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기택과 같은 위치에 자리한다. 곱창집으로 이어지면 우리는 벤이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창동 감독은 벤을 자꾸 소시오패스 혹은 사이코패스로 상상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다. 다만 분명한 건 그레이트 헝거로서 해미의 고민이 벤에게는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해미가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종수는 묵묵히 듣는다. 종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벤은 해미를 즐긴다. 해미는 죽는 건 무섭고, 단지 사라지고 싶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을 잊으면 되지만 있는 것이 없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곱창집에서 벤의 아는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등장한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그는 공항에서 종수의 트럭을 따라온 것처럼 보인다. 이제 종수와 해미의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종수는 해미와 섹스를 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을 연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4일 동안 공항에서 친해진 벤이 그들 사이에 들어온다. 그러고는 트럭의 조수석 자리는 비워지고, 포르쉐의 옆자리는 채워진다. 아마도 난 이 약탈에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 분노를 승민은 택시 기사와 서연에게 푼다. 과녁이 잘못됐다. 그건 승민이 스무살이여서다. 기택은 정확하게 박 사장의 복부를 찌른다. 과녁이 명중했다. 하지만 극장에서는 “뭐야, 왜 저러는 거야?”라는 소리가 들린다. 종수 역시 마찬가지다. 과녁이 명중하고 벤의 복부는 피를 토해내는 것과 동시에 극장에서는 “해미를 죽인 거야?”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 질문은 둘 중 하나다. 무감각하거나,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거나.
이제 종수는, 아니 처음부터 종수는 할 일이 없다. 그런 종수에게서 해미까지 빼앗아갔으니 종수는 더더욱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종수는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만 소설을 쓰는 모습을 우리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볼 수 있다.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지만 해미를 빼앗기고 난 다음 컴퓨터 앞에 앉은 종수가 키보드를 두드릴 때 우리는 그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탄원서를 쓴다. 그 탄원서는 공허하다. 아무런 힘이 없다. 게다가 거짓말이다. 이장님에게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을 때 종수의 핸드폰이 울린다. 해미의 연락. 하지만 종수가 도착한 곳은 해미의 옆자리가 아니라 해미의 앞자리다. 곱창집에서 종수는 해미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이제 종수는 해미의 앞자리에 앉는다. 여기서 벤이 손금을 보며 종수를 재미나게 쳐다본다. 해미의 눈빛이 재미난 것인지 혹은 미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종수를 쳐다본다. 다시 한번 소환하는 <건축학개론>. 승민은 서연에게 쌍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종수는 벤과 해미에게서 도망칠 용기(?)도 없다. 자신의 옆자리를 빼앗기고 자신의 여자친구의 손을 주물럭거려도 종수는 파스타를 먹으러 간다.
이제 벤의 집이 등장한다. 해미의 집은 해미를 드러낸다. 종수의 집도 마찬가지다. 종수의 집은 종수 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포크너를 소환한다. 종수는 아버지의 분노를 물려받을 것이다. 창고 안 날카로운 칼들을 휘두를 것이다. 벤의 집은 어떠한가. 벤의 집에 도착하자 우리는 벤이 틀어놓은 음악을 듣는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이 있다. 우리는 파주로 향하면 비 디제시스 사운드의 비지엠을 듣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이 비 디제시스 사운드 비지엠은 파주가 아닌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은 종수가 혼자 있을 때만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수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로 나누어서 영화가 작동하는 이분법적인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벤의 집에서 이창동 감독은 벤을 또 한 번 소시오패스 혹은 사이코패스 같은 방식으로 연출한다. 그는 요리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재물로 먹어치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메타포에 대해서 해미가 묻자 벤은 종수에게 답을 미룬다. 그런데 종수는 여기서 답을 하지 않고 화장실을 묻는다. 여기서 화장실이 어디인지 물을 때 우리는 해미가 벤의 집에 온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메타포 따위는 종수에게 화장실에 버려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화장실은 모순적으로 메타포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화장실에 갔을 때 화장 용품과 여성들이 착용했던 소품들을 발견한다. 이것이 은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벤. 그렇다면 벤을 이 여성 용품에 빗대어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가. 답은 모른다. 이것이 <버닝>의 방식이다. 이 미스터리함. 이 미스터리함은 간단하게 풀릴 수도 있다. 베란다에서 종수와 해미가 담배를 피울 때 종수는 저런 사람이 네가 뭐가 좋아서 만나는지 묻는다. 해미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나 같은 사람이 좋다고. 하지만 질문을 바꾸면 미스터리함에서 멀어진다. 해미는 왜 벤을 만나는가. 종수는 끝내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종수는 끝내 벤에게 해미를 죽였는지 묻지 않는다. 그걸 묻는 순간 <버닝>의 동력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걸 묻지 않는 이유는 승민이 서연에게 대학 선배랑 잔 건지 안 묻는 것이랑 같다. 종수의 아버지와 같은 자존심. 그걸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답을 들었던 것은 기택. 바퀴벌레처럼 테이블 밑에 숨어서 박 사장과 연교의 대화를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들은 기택. 답을 들으면 몰려오는 것은 모멸감. 해미의 대답인 “나 같은 사람 좋아한대”라는 순간에 우리는 종수에게 포커스가 맞는 것을 본다.
벤은 종수와 해미를 모임에 데리고 간다. 종수는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미는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처럼 그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의 구경거리는 해미이기도 하지만 그레이트 헝거이기도 하다. 삶의 의미가 고픈 사람이 구경거리가 되는 공간인 것이다. 이 모임에서 종수와 해미가 동떨어진 까닭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들의 학력이 어떻고, 그들의 가치관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로지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재력 혹은 그들 부모의 재력. 그들은 종수가 말한 개츠비다. 난 여기에 주석을 달아야 한다고 본다. 사랑 없는 개츠비. 개츠비에게서 사랑을 빼면 퇴폐와 더러움과 수수께끼만 남는다. 개츠비들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들은 따분한 그레이트 헝거를 데리고 클럽으로 향한다. 종수는 클럽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영화는 종수에게 어울리는 곳은 클럽이 아니라 외양간이고, 클럽 음악이 아니라 동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상한 건 동요의 가사 “엄마아~”를 부를 때 해미의 전화가 울린다는 것이다. 해미와 종수 엄마의 공통점은 단 하나. 우물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제 종수의 공간을 벤이 침범한다. 이제 이곳은 비지엠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벤은 대남방송을 듣고 재밌다고 말한다. 그에게 남북문제는 호기심을 발동할 정도의 문제다. 추측일 뿐이지만 벤은 군대를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은 종수가 군대를 다녀온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벤이 우리와 DNA가 다르다는 사실 또한 알려줬을 것이다. 해미는 여기서 우물에 빠진 이야기를 한다. 해미가 살던 집은 없어졌다. 집이 사람들 드러낸다고 했을 때 과거 해미는 사라졌다. 이건 이창동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미는 집이 사라졌고, 어렸을 때 얼굴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수의 기억에서도 해미가 있는지 미스터리다. 해미가 하는 이야기를 종수가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 해미는 그녀의 바람대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은 떨을 한다. 이들의 관계망은 대부분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만 종수는 소설에서는 벤보다 나이가 많은 기성세대로 등장한다는 것이 가장 다른 점이고, 소설에 없는 부분이 영화에 많이 추가되었다. 이 부분이 소설에서도 인상적이지만 영화에서는 더더욱 인상적이다. 그 이유는 해미의 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벤이 해미의 윗옷을 벗기고 춤을 추게끔 연출한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며 해미의 춤이 끝난 후 남자들의 고백이 이어지는 장면 때문일 것이다. 떨을 한 뒤 벤은 마치 해미를 조련하듯 자동차 스피커를 이용해 음악을 켠다. 그러자 해미는 마치 신호라도 받은 듯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해미의 바람대로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혹은 날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카메라가 해미를 프레임 밖으로 빼낸 뒤에 남는 것은 실재하는 것들이다. 그것이 구름이던, 하늘이던, 나무이던. 그 실재하는 것처럼 해미는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종수와 벤은 잠든 해미를 안에다 눕힌다. 종수는 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야기를 한다. 정한석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부분은 분명 이상하다. 곱창집에서 벤이 “난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게 신기해”라는 대사, 혹은 “나는 아버지를 미워해요”라는 대사, 혹은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라는 대사처럼 고백하는 대사들은 리버스 숏으로 처리된다. 발화자는 대사와 쇼트가 맞물리지 않는다.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의도일까. 자연의 도덕 운운할 때나 태울 비닐하우스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대사, 종수가 해미를 사랑하고 있다는 대사에는 풍경 인서트가 등장한다. 아마도 고백에는 무언가 침입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듯싶다. 풍경 인서트는 각각의 기능을 갖고 작동한다.
종수는 돌아가는 해미에게 심한 말을 건넨다. 아마도 그건 승민이 서연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행동일 것이다. 해미는 종수의 말 때문에 사라진 것일까. 혹은 종수 대신 선택한 벤이 자신을 우물에서 구출해 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라진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해미는 벤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해미는 바람대로 사라진다. 그녀가 벤과 함께 떠나고 난 다음 종수는 꿈을 꾼다. 유일하게 나온 꿈 장면이다. 종수는 엄마의 옷을 태우는 대신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그것을 바라본다. 유일하게 영화에서 나오는 비닐하우스가 타는 장면이다. 벤이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는 말 그대로 비닐하우스였을까. 해미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유일하게 영화 속에서 타버리는 종수의 꿈 속의 비닐하우스였을까. 첫 번째는 종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근거가 빈약하다. 세 번째는 벤은 어떻게 알고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던 것인지 의문이 된다. 하지만 벤의 주장대로라면 비닐하우스는 타버렸다. 중요한 건 관객의 눈에 보인 것은 유일하게 종수의 꿈에 나온 비닐하우스라는 것이다.
해미는 사라졌다.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확인한다. 비닐하우스 안이나 근처에서 종수를 찍는 이미지들을 종수의 마음의 풍경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안 된다. 종수는 메타포 따위는 화장실에 버리라고 이야기했다. 메타포가 작동하는 것은 벤과 해미다. 종수가 해미의 집에 찾아가지만 해미는 이미 사라졌다. 보일이도 사라졌다. 마치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종수는 해미의 동료를 찾아간다. 동료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이 피상적인 대사는 왜 필요한 것일까. 종수에게 해미를 위한 공간이 있었을까. 우리는 영화에서 사라진 여자를 두 명 안다. 해미와 종수의 엄마. 종수의 엄마는 종수의 아버지에게서 도망쳤고, 해미는 종수에게서 도망쳤다.
종수는 해미를 찾기 위해 벤을 쫓는다.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증거도 없다. 이제 우리는 이상한 순간과 마주한다. 벤이 종수를 따돌리고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고 있을 때 그는 종수를 내려다본다. 이 이상함은 분명하게도 카메라 위치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종수의 곁을 떠나는 것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점이 벤에게로 옮겨지고 벤은 종수를 내려다본다. 이제 종수는 벤의 대상이 된다. 이 시점이 이상한 까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장면은 이창동 감독이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 이후를 소설로 가정하는 것에 혼란을 주기 위함이다. 유일하게 종수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쓰고 난 다음 장면이다. 벤은 화장실에서 렌즈를 끼고 나와 새로운 여자친구를 화장시킨다. 마치 요리를 하듯. 이 장면과 헬스장 장면은 유일하게 영화에서 종수의 시선을 벗어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용산 참사 현장의 그림들이 있는 전시회장에서 벤과 벤의 식구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벤에게 용산 참사는, 아니 그 어떤 것도 소비할 뿐이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누군가에겐 삶 그 자체다. 영화 속에서는 종수의 아버지가 그렇다. 그리고 이제 종수도 그렇게 될 것이다. 벤은, 그리고 벤의 지인들은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며 그것을 재미있게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종수의 어머니를 마주한다. 사라진 여자가 돌아왔다. 해미도 돌아올 것인가. 종수의 어머니는 종수에게 돈을 요구한다. 종수는 그 돈을 해결해 준다고 답한다. 왜 그랬을까. 해미를 우물에서 구출하지 못한 죄책감이었을까. 여하간 엄마는 우물을 기억한다. 종수는 다시 벤을 찾아간다. 해미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화장실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보일이라고 부르자 자신에게 안기는 것들을 겪은 뒤 종수는 해미에 대해 할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또한 이창동 감독은 미스터리로 처리한다. 종수는 어쩌면 벤의 새로운 여자친구가 해미와 같은 취급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해미가 떠났을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여하간 종수는 해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심한다. 종수의 아버지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는다. 이 선고에 아버지의 쇼트가 아니라 종수의 쇼트가 등장한다. 종수는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아니, 정확하게는 분노뿐만 아니라 처벌까지도 대물림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종수는 해미의 방으로 간다. 종수는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고 자위를 한다. 그러자 해미가 옆에서 자위를 돕는다. 그런데 종수는 왜 섹스가 아니라 자위를 상상했을까. 그리고 왜 이제 빛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일까. 분명 종수는 창을 등진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해미의 집에 빛이 들어오는 것은 섹스와 같다. 이제 종수는 해미와 섹스를 할 수 없다. 오로지 종수는 이제 자위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사랑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미 집의 창은 분명 우물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같을 것이다. 해미의 말처럼 이제 죽는구나 싶었을 때 종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쩌면 종수는 해미와 엄마의 상황을 이해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소설을 쓴 건 아니었을까. 역시 답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종수는 그레이트 헝거 해미처럼 삶의 의미를 구하는 그 자체에 답을 얻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역시 답은 모른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밖으로 빠진다. 그렇기에 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여기서 영화가 끝난 것이라고 착각했다. 이 착각은 내가 결말을 잘못 예상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지만 이내 영화가 다시 시작하면서 벤이 렌즈를 끼고, 비유적으로 요리를 한다. 그리고 종수는 벤을 죽인다. 여기서 이 에필로그와 같은, 혹은 클라이맥스와 같은 이 부분이 소설인지 소설이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 장면은 오로지 한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다. 종수가 소설을 썼고 종수가 벤을 죽였다. 여하간 소설의 내용이더라도 종수가 벤을 죽인 것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왜 죽인 것인가. 해미를 죽여서?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 종수는 벤을 죽이면 안 되는가. 벤이 종수를 난도질한 것은 왜 셈에서 빼야 하는가. 다시 맨 앞 문단에서의 문장을 빌려온다. 21세기 영화가 현실과 부정할 수 없는 타협을 한다. <건축학개론>은 낭만으로, <기생충>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버닝>은 상실과 분노로 말이다.
2022년 05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