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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Sep 24. 2022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

  단순히 표지가 너무 예뻤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읽을 책이 산더미였다. 표지에 이끌려 클릭했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로버트 레드포드”란 이름이었다. 의아한 이름.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혹은 <보통 사람들>의 감독, 혹은 <흐르는 강물처럼>의 감독, 혹은 그 유명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의 기자 밥 우드워드, 그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제임스 설터는 그에게 영화 시나리오로 이 이야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내가 이 부분에 끌렸던 이유는 내 꿈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문학이, 웹툰이, 때때로는 시가 영화로 옮겨지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게 집어든 책은 처음부터 미국 소설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캘리포니아의 빛을 그린다. 난 캘리포니아의 빛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션 베이커의 영화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에서 수없이 캘리포니아를 봤다. 누군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 분위기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이건 제임스 설터의 재능이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미지의 세계가 느껴진다. 카프카의 문체에서는 적어도 난 프라하의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 미지의 세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빼쩨르부르그가 느껴진다. 하지만 난 빼쩨르부르그를 가본 적도 없고 거의 그 지역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냥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상상하고 있는 공간이 빼쩨르부르그라는 감각만 남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감각이다.      


  <고독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은 내리쬐는 햇빛, 물론 강렬하면서도 때때로는 부드럽게 퍼지는, 물안개가 섞인, 그런 햇빛이 교회 지붕에 있는 노동자들을 비치고 있는 이상하리만치 나른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괴리감이다. 이 괴리감이 느껴지는 까닭은 내가 지붕 위에서 강렬한 태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일 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면 나른할 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괴리감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것이 기시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하지만 중요한 무대는 드뤼이다. 캘리포니아가 느껴지는 문체는 여전한데 장소는 프랑스로 변했고, 마치 이 문체가 묘사하는 드뤼를 포함한 산들과 풍경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장소에 도착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느낌이 마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주인공 랜드의 감각과 닮아있는데 이러한 기시감이 사라지는 순간들은 랜드가 등반을 할 때다. 그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공간에 낯선 모습으로 들어온 랜드보다는 랜드의 눈 앞에 보이는 산의 아주 작은 일부분과 랜드의 행동만이 머릿속에서 그려질 뿐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괴리감에서 기시감으로, 기시감에서 안정감으로 옮겨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것의 입체감은 동시에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장소로, 낯선 장소에서 위험한 장소로 옮겨가는 이상한 모순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이러한 부분이 영화라는 매체와 이 이야기가 어울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소설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드는 것이기에 공간을 이동하면서 랜드의 감정이 점점 안정감을 찾는다는 것을 얼굴(face)로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제임스 설터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 이유를 주인공이 너무 과묵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글쎄. 영화감독들의 인터뷰를 믿지 말라는 평론가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할 때는 랜드가 과묵해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시각화시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랜드가 과묵하다고 하더라도 랜드의 심리상태는 소설에서(물론 시나리오는 읽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충실히 묘사된다. 예를 들어 랜드의 꿈이 소설 전반에 걸쳐 몇 번 묘사되는데 맨 처음 묘사되는 꿈인 챕터 10에서 정확하게 꿈을 충족하는 꿈이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묘사하는 꿈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왔다라는 것을 명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나오는 꿈은 랜드의 소망이다. 지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꿈은 당연히도 챕터 20에서 나오는 캐벗이 죽는 꿈이다. 랜드는 캐벗의 죽음을 소망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챕터 18에서 캐벗의 등반에서 랜드는 제외됐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과묵한 주인공은 영화로 찍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묵한 인물을 찍은 영화감독들은 수도 없이 많다. 문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 빙벽>이 떠오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75년에 찍은 <아이거 빙벽>은 스위스 알프스를 등반하는 첩보 요원에 관한 이야기다. <고독한 얼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영화 역사상 등반 장면 중 가장 리얼하고 세심하게 찍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등반 장면을 찍다가 한 명의 스태프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된 것이 1979년이니 제임스 설터가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시나리오를 건넨 건 197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 빙벽>은 단순 첩보 스릴러물이다. 하지만 <고독한 얼굴>은 등반 장면 자체가 삶의 투쟁처럼 보여야 한다.      


「그곳에는 도시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과 소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결코 거세될 수 없는 남성성이 있다. 이것을 위해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바친다. (p.174)」     


  랜드를 포함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것을 보고 오드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드리의 남편 브레이는 목숨을 잃고, 캐벗은 하반신을 잃는다. 하반신을 잃는다는 것과 남성성을 잃는다는 것의 동질감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산의 의미는 더 다의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는 산에 대한 욕망에 가장 강렬한 애착(내가 생각했을 때는 집착이 아니다)을 보인 것은 당연코 랜드다.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른다고 하여 모두가 다 순수한 애착으로 인해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브레이의 친구 데니스 하트는 이탈리아인들을 구하러 갈 때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건 정말 내려가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랜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데니스 하트도 같이 올라간다. 랜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캐벗의 경우도 애착이라기 보다는 거기에는 랜드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이 묻어있다. 오로지 랜드만이 산 그 자체를 사랑해서 오른다. 우리는 산을 정복했을 때의 어떤 정복감, 승리감 혹은 도취 등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냥 감격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퉁친다. 보통의 이야기 꾼들은 이런 순간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 순간 독자들 혹은 관객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멈췄다. 이렇게 퉁친다라는 것은 작가가 결코 산을 성공적으로 오르는 것에 인물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이 순간까지 이야기를 잘못 따라왔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멈춘 다음 앞의 이야기들을 복기한 뒤 다시 읽었다.      


  랜드의 욕망은 무엇일까.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면 산 정상에서 끝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는 산이 아니라 캐벗의 집이다. 그리고 랜드는 캐벗을 일으켜 세웠다. 작가는 이 순간 또한 퉁치고 넘어간다. 캐벗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휠체어는 비어있었다는 식으로. 랜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순간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투쟁 자체가 중요한 인간이다. 문득 나따위를 랜드와 비교해본다. 나는 왜 영화를 찍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 영화가 좋아서? 혹은 좋은 영화를 찍고 싶어서?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내가 영화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영화를 찍고 싶은 수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인정투쟁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러나 그들은 랜드에 대해 얘기했다. 랜드가 항상 원해온 것이었다.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비범한 인물은 계속 살아남는다. 이윽고 어느 때에 이르러 그들은 그의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랜드는 어떻게든 성공했다. 커다란 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사라졌다. (p.272)」     


  그렇다고 랜드의 욕망을 인정투쟁에만 두는 것은 아니다. 랜드는 드뤼를 정복했고, 이탈리아 인들을 구조했으며, 캐벗을 일으켜세웠다. 그 순간들은 항상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랜드를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랜드는 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 속에 스며든 죽음 또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짜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풍기는 마지막 챕터에서 랜드는 더 이상 “랜드”가 아니라 “그”라고만 묘사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난 그. 그는 이번에는 가정을 꾸리거나 연인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제 2의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고, 새로운 욕망을 투쟁하기에 충분히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는 랜드라는 인물은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 욕망이 얽히고섥혀 있다. 아마도 랜드라는 인물을 표현하려면 적어도 존 포드가 살아 돌아와야 할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고독한 얼굴>을 훌륭한 영화로 찍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거인을 다루는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영화감독들은 거절하기도 한다. 나는 그 거절이 일종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훌륭한 영화로 만났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의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을 지지한다. 가끔은 영화 연출 지망생인 나같은 독자조차도 랜드의 얼굴을 배우의 얼굴로 그리고 싶지 않다. 나에게 랜드는 껍질같은 단단한 피부와 매섭지만 동시에 애정어린 눈빛, 얼굴을 다 뒤덮고 있을만한 수염, 두터운 입술과 제멋대로 생긴 뭉뚝한 코를 가지고 있는 오롯이 나만의 인물이길 바란다. 


2022년 0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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