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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Dec 07. 2022

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본 글은 서평 이벤트에 참여하여 쓴 글입니다.


  5년 전 아는 같이 사는 후배와 집에서 영화를 봤다.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 이미 한 번 본 영화였지만 후배가 보고 싶다고 하여 같이 보았던 것인데 영화를 보던 후배가 갑자기 넘겨 보자고 제안을 했다. 난 그때 너무 놀랐다. 영화를 넘겨본다는 것은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관에서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최소 한 장면을 놓치는 것이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기에 영화를 보기 전 화장실을 꼭 갔다가 들어가는 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는 영화를 배속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서 영화를 요약본으로 보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책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갔다. 워낙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던, 넘겨서 보던, 요약본을 보던, 영화를 영화의 순수한 러닝타임과 속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건강식품을 먹을 때 소금을 더 뿌려 먹던 고춧가루를 뿌려 먹던 남들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건 건강식품에 소금을 뿌려 먹은 것이지 건강식품을 먹었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기생충>을 빨리 감기로 본 사람은 <기생충>을 본 것이 아니라 <기생충>을 빨리 감기로 본 것이다. 책의 저자는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를 100%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번역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다른 이야기다. 번역을 예로 든다면 필름도 예로 들어야 한다. 필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한다. 노이즈가 어디에 낀 채로 관람할지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관객이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한 영화학자는 오즈의 영화를 보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고,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웠다. 하지만 그건 학자로서의 노력이지 일반 영화 관객은 불가능한 영역이다. 관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영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모차르트의 음악도 배속으로 들으면서 지루해서라는 이유를 붙일 판이다. 어떤 평론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전시회에 가서 세잔의 그림을 보거나 음악회에 가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난 다음 그 작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더라도 사람들은 작품이 문제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왜 영화는 작품이 문제냐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관객의 발전을 촉구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세잔의 그림도 모차르트의 음악도 잘못되었다고 하는 쪽으로 흘러간다고 느끼는 건 나의 착각일까? 지금의 세상은 ‘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의 저자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이유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한다. 작품의 공급 과다, 바쁜 현대인의 시간 가성비 지향,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품의 증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통계에 근거하고, 인터뷰에 근거한 꽤나 객관적인 통찰이다. 이 책이 훌륭한 점은 적은 분량에 객관적인 통찰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느끼는 아쉬움은 저자의 고민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위 세 가지 말고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실용주의가 너무 지배적이라는 점을 뽑고 싶다. 학생들에게 영화를 교육하고 있는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대학을 가는 것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고, 바쁘고 스트레스 받는 생활에서 영화는 즐기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 즐길 거리도 게임에 밀리고,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에 밀리기 시작한 건 꽤나 오래전 일이다. 극장을 가지 않는 이유로 핸드폰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10대 과반수가 투표한 것은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저자의 첫 번째, 두 번째 분석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더 이상 예술이라는 것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세잔이고 모차르트고 존 포드고 오즈고 뭐가 중요할까. 책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로 끝맺음을 한다. 얼마 전에 타계한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영화의 수명이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껏해야 80년에서 1백20년 정도가 아닐까 한다.”     


  2022년 1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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