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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철 Nov 19. 2016

서울역에서 홍지문까지

스토리펀딩  <건축스케치 기행> 7화

서울역


2004년 현대식으로 지어진 신 역사의 등장으로 그간 우리민족의 희로애락을 한 몸에 담아왔던 구 서울역사가 이제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하였다. 1947년까지 경성역으로 불리웠던 구 서울역사는 1925년 일본인의 설계로 완공되었다. 당시 “동양 제1역은 교토역, 제2역은 경성역”이라 할 정도로 구 서울역사는 규모가 큰 역사였다. 건물의 양식은 중앙 돔을 중심으로 비례가 중시된 좌우 대칭의 르네상스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중앙에 놓여진 돔은 사각형 평면위에 원형의 돔을 얹는 형식(펜덴티브 돔)이 특징인 비잔틴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돔 네 귀퉁이에 세워져 있는 탑은 장식적 요소가 많은 바로크 양식의 기법이 더해져 결국 구 서울역사는 여러 가지 양식이 혼합된 절충주의 양식으로 정의된다. 현재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외관을 지녀 사적 284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KTX 열차의 개통과 함께 신 역사가 모든 역사의 기능을 도맡게 됨에 따라 이 건물은 사적 번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개관 이후로 전시, 공연, 컨퍼런스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이어지면서 이 건물을 방문하는 방문객은 매년 급증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 조성공사가 마무리되면 이 건물의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대한민국 수도의 관문에서 아름다운 근대유산을 배경으로 더욱 멋진 대한민국 대표 문화공간으로 정착되길 기대한다.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구 서울역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서울역을 뒤로 하고 발길을 서울 중심으로 움직여 본다. 서울 남대문시장 앞 한국은행 교차로에는 이국적 형태를 뽐내고 있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역사(서울역), 조선호텔 등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전반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이름이 높았다. 유럽의 성채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단아한 르네상스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좌우 원형의 돔 부분과 몸통과 지붕을 연결하는 연결부위에 바로크풍의 장식 요소를 곁들인 절충주의 양식으로 분류된다. 이 건물은 1907년 일본의 침탈이 시작될 즈음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설계되었다. 1912년 조선은행으로 명칭을 바꾸어 완공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직속은행의 역할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87년 이 건물의 뒤편으로 한국은행 신관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한국은행 본관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은행의 주된 기능이 신관에서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 건물은 2001년부터 화폐박물관으로 변신하여 시민들의 발걸음을 맞이하고 있다. 뒤쪽의 신관은 비교적 단순한 매스로 앞쪽의 구관의 형태가 이지러지지 않도록 배려한 모습이 돋보인다. 구관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은 건축적으로 완성도가 높아 우리에게는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화폐 역사와 문화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인 만큼 많은 자라나는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의 발걸음도 꾸준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화폐박물관




명동성당


발걸음을 명동으로 옮겨본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복잡한 명동거리를 통과해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실로 오랜 세월만에 성당에 도착한 나는 갑자기 어떤 외딴 섬에 도착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복잡하고 국내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명동에 이렇게 여유있고 평화로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1898년 미국인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건립되어 사적으로 지정된 고딕양식의 대성당 앞쪽이 넓은 녹지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녹지공간 아래로는 서점, 카페, 갤러리 등 다양한 편의시설과 문화공간이 자리 잡아 도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녹지공간 외곽에는 지상 10층의 서울대교구 신청사를 비롯한 파밀리아 채플과 프란치스코 홀이 열린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는 명동성당의 전체 모습은 뒤쪽에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남산을 배경으로 멋진 도시풍경을 자아낸다. 종종 마련되는 명동성당 대성당 안에서의 음악회는 첨두아치와 리브볼트, 스테인드 글라스 등 고딕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건축미를 감상할 수 있고 공간내부에서 울려퍼지는 멋진 건축 음향에 젖어들 수 있게 해 주는 멋진 기회가 될 것이다.



명동성당




석파정


차를 이용하여 광화문을 거쳐 자하문로를 거쳐 부암동으로 향한다. 자하문 터널을 지나 상명대 앞 삼거리에서 유턴을 하여 자하문 터널 입구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에 차를 세운다. 건물이 박스형으로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티케팅을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도로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인왕산의 동북쪽 사면을 배경으로 경사지에 멋진 한옥 여러 채가 층층이 쌓여져 주변의 수목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건물이 흥선 대원군이 흠뻑 빠져 갈취하다시피 한 석파정(石破停)이다. 이 건물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서(별장은 잠깐씩 와서 쉬어가는 공간인데 반해 별서는 오랜 기간 동안 생활을 하는 가옥을 말함)였는데 이 별서가 대원군의 소유가 된 배경에 대하여 조선말 황현이라는 선비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 이렇게 수록하였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이 있었는데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名園)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하였으나 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다시 청하길 “하루만 놀이에 빌려 달라”고 했다. 그 무렵 별장이나 정자를 가진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한양의 풍습이어서 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마침내 임금께 한 번 행차하기를 권해 임금을 모시고 갔다. 흥근은 임금께서 임했던 곳을 신하의 의리로는 감히 다시 쓸 수 없다 하여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답사여행의 길잡이 15-서울, 돌베게) 김흥근이 소유했을 때는 이곳이 삼계동 정사라는 명칭이었으나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라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이곳에 있는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石坡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는 사람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일반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으나 서울미술관 옥상 정원에서 바라보는 한옥의 외관만 하더라도 어떠한 미술작품 못지않게 깊은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이 한 장면의 풍경만으로도 한옥의 경내를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으리라. 석파정. 당대 최고의 권력가가 자신의 호까지 바꿀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건물이었다는 사실에 나 역시 동감이다.   


석파정 




세검정


석파정을 나와 다시 상명대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0m 가량 진행하면 우측 길 가에 위치한 세검정에 다다른다. 홍제천이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丁자형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이 세검정은 예부터 멋진 풍광으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지금도 홍제천 좌우로 많은 연립주택들이 들어서 있어도 세검정 아래에서 위쪽을 바라보면 여전히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세검정(洗劍停)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조반정 때 이귀,·김류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의 경치가 빼어났기에 왕과 사대부, 여염집 자제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놀며 시를 짓기도 하고 바위에 글씨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한다. 세검정의 가장 멋진 구경거리는 소나기가 쏟아질 때의 폭포 구경이었다 한다. 계곡 위쪽에서 바위 사이를 굽이치는 물결과 쏟아지는 폭포는 많은 선비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끌어 술잔과 함께 시를 읊조리게 만든 장본이다. 운이 좋아서일까? 내가 찾았던 가을 그 날도 한바탕 비가 내린 후라 제법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정자 아래쪽 마당바위 앞에 놓여진 보를 넘어선 물길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폭포를 만들어 낸다. 물론 과거에는 이러한 보는 없었겠지만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면 이곳을 찾았던 옛 선비들의 서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던 순간이다. 그림은 세검정 옆 다리 아래에서 계곡 위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세검정




홍지문


세검정에서 아래쪽으로 바깥 차선을 따라 내려오다 상명대 앞 삼거리를 지나면 차 한 대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길 끝자락에 성문 하나가 나를 마주보고 있다. 홍지문(弘智門)이다. 이 문 우측에는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5개의 아치가 있는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물길이 지날 수 있도록 5개의 아치가 있는 다리라 하여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불리운다. 다리 위에는 성벽이었음을 알려주는 성가퀴(성벽위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낮게 덧쌓은 담)가 놓여있다. 그러고 보니 이 성벽은 다리건너 우측 상명대 경사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이 성벽이 탕춘대성(蕩春臺城)이다.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외성인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산성이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자하문)에서 시작하여 북한산 서남쪽 비봉까지 연결되는 약 5km의 구간이다. 탕춘대성의 명칭은 세검정에서 동쪽 약 100여 미터 떨어진 산봉우리(현재 세검정 초등학교)에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가 있었는데 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홍지문은 이 탕춘대성을 통과하는 문으로 한양의 북쪽에 있다하여 ‘한북문’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도로에 의해 성벽의 한 쪽이 잘려져 있는 비대칭의 형상을 하고 있어 오히려 미학적으로는 독특한 미감을 자랑하고 있다. 한양도성 세계문화유산 추진과 함께 이 탕춘대성도 확장 등재될 가능성이 높아 정비가 추진된다고 하니 머잖아 말끔히 단장된 탕춘대성의 새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은 홍제천 아래쪽에서 홍지문과 오간수문을 올려다보며 그린 것이다. 오간수문 위쪽으로 상명대학교 캠퍼스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홍지문과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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