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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철 Nov 08. 2016

인사동에서 DDP까지

<스토리펀딩> 6화

인사동길
인사동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들뜬다. 문화와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전시를 자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인사동은 나에게 많은 창작 동기를 불어넣어 준다. 머잖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어서 더욱 관심이 가는 곳이다. 모든 미술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가 이곳 인사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사동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에 속한 지역이어서 가운데의 ‘인(仁)’자를 따고, 갑오개혁 당시 이 지역을 불렀던 ‘대사동(大寺洞)’이라는 명칭의 가운데 글자인 ‘사(寺)’자를 따서 합성한 명칭이다. 중심거리인 인사동길은 차 없는 거리 시행으로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은 누구나 한 번씩은 들르는 곳이어서 거리는 늘 내국인 반, 외국인 반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에 좌판을 늘어놓은 외국인들도 쉽게 눈에 띈다. 국제적인 문화의 거리답게 거리 곳곳에는 거리의 악사나 다양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예술가들로 이 거리를 찾는 관광객들의 흥미를 돋군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가 되다 보니 주변의 건물들은 온통 상업공간으로 뒤바뀌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해 간다. 그 많던 갤러리들이 요즘은 비싼 임대료 탓에 점차로 사라져 가고 있어 앞으로도 예술이 살아 숨쉬는 인사동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래의 그림들은 여름날 인사동 길을 흑백의 드로잉과 그 위에 컬러로 드로잉 한 것이다 


여름의 인사동 길 흑백 드로잉


흑백 드로잉 위에 컬러링



운현궁
인사동을 나와 덕성여대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운현궁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운현궁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운현궁이란 이름은 원래 이 지역의 지명이었던 ‘구름재’에서 따 온 이름이다. 운현궁은 원래 지금의 교동초등학교와 삼환기업, 그리고 일본대사관까지 달하는 큰 규모였지만 권불십년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점차 지금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현재는 입구의 앞마당과 노안당과 노안당 그리고 뒤쪽의 이로당만 남아 있다. 매표소를 들러서면 남북으로 길다란 앞마당이 놓여 있다. 방금 무슨 공연이 있었는지 무대세트 제거작업이 한창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을 만난다. 높다란 기단위에 앉혀진 세도가의 사랑채에서 전통 한옥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노안당 안쪽의 중문은 뒤쪽의 노락당(老樂堂)으로 연결된다. 안채에 해당하는 노락당은 고종이 민비와 가례를 치렀던 곳이고 이후 고종이 운현궁을 들를 때 거처로 사용하였다. 안채가 고종의 처소로 사용되다보니 안채가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락당 뒤쪽으로 실질적인 안채 역할을 하는 이로당(二老堂)이 지어졌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러한 복도는 일반 사대부 가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궁궐의 복도를 사대부 가옥에 적용한 것이니 당대의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아래의 그림은 노락당 앞마당에서 이로당 쪽을 바라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운현궁 노락당 앞마당 전경


구 공간사옥
운현궁을 뒤로 하고 창덕궁 방향으로 걷다보면 현대사옥 끝자락에 위치한 건물 상단에 ‘空間, SPACE’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현대건축에 큰 족적을 남겼던 ‘김수근(1931~1986)’의 대표 유작이다. 그가 만든 설계사무소의 이름이기도 하고 건축을 포함한 국내 최장수 예술잡지 ‘空間’을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건물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로 인해 시원스레 보이는 이 건물은 반 층씩 층이 엇갈려 설계되었고 그 반 층을 오르내릴 때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공간들이 끊임없이 연결된다. 특히 지하에 있는 소극장은 김덕수 사물놀이를 탄생케 하는 등 수많은 예술 활동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었다. 옆쪽에 투명한 유리로 지어진 신사옥은 김수근의 뒤를 이어 공간을 이끌었던 장세양(1947~1996)이 설계한 것이다. 김수근은 자신의 책상 앞에 있는 창을 통하여 창덕궁을 바라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았다 한다. 장세양은 돌아가신 스승 김수근이 책상 앞 유리창을 통해 창덕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신사옥을 투명한 유리로 마감하였다 한다. 근래에 설계사무소를 매각하기에 이르자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이 건물의 보존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 결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아라리오 미술관이  인수하여 문화공간으로서의 명맥을 잇고 있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통하여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공간사옥이 앞으로도 많은 이에게 건축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산실로 영원히 남아있기를 기대한다. 아래의 그림은 길 건너 빌딩에서 창덕궁에 면해 있는 공간사옥을 내려다 본 모습을 그린 것이다.


구 공간사옥과 창덕궁 전경


서울돈화문국악당
구 공간사옥을 지나 창덕궁 돈화문 맞은편을 바라보면 삼거리 길모퉁이에 낯설은 한옥이 눈에 띈다. 지난 9월 문을 연 국악전문 공연장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모습이다. 2011년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의 작품이 그저 바라만 보는 한옥이 아닌 함께 살아 숨쉬는 한옥으로 우리들 가까이 다가 온 것이다. 출입구를 들어서면 잔디로 덮혀진 아담한 크기의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마당을 한옥으로 지어진 단층짜리 건물이 둘러싸고 있어서 아늑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 잔디마당에서는 다양한 국악 야외 공연이 펼쳐진단다. 140석 규모의 국악 전문 공연장은 이 잔디마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다. 대형공간을 지하화하므로서 지상의 건물들이 위압적이지 않게 우리 전통 건축의 미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과거 돈화문 앞 거리는 조선성악회와 국악사양성소를 비롯한 많은 국악 명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이고 현재도 국악학원과 한복집, 국악기점들이 다수 있어 과거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014년 서울시에서는 남산과 북촌, 돈화문로를 연결하는 국악밸트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특히 돈화문로에서 종로3가를 연결하는 도로를 국악로로 지정하여 전통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1차적으로 창덕궁 앞에 있던 주유소를 매입하여 이 부지 위에 지금과 같은 서울돈화문국악당을 건립한 것이다. 현재 민요박물관과 국악박물관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하니 앞으로 돈화문 앞 국악로가 우리의 전통미를 만끽할 수 있는 멋진 거리로 변모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아래의 그림은 서울돈화문국악당을 모퉁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서울돈화문국악당 전경



대한의원 본관
다음으로 찾아 볼 건축물은 창경궁 옆 서울대학교 병원 내에 있는 대한의원 본관이다. 혜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서울대학교 병원 입구로 들어서면 좌우로 병원 건물들이 밀림같이 나를 에워싼다. 정면에 바라보이는 커다란 매스의 본관을 비껴서서 왼쪽의 낮은 경사로를 오르면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한의원 본관이다. 대한의원은 1907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설립된 교육, 진료, 보건행정 기능을 모두 갖춘 국내 최고의 종합 의료기관이었다. 대한의원은 한일합병 후 총독부의원으로 되었다가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의 대학병원으로의 개편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은행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지로 2가 한국외환은행 자리)과 함께 1900년대 초 서울의 3대 명물로 손꼽혔던 건물이다. 중앙의 시계탑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의 2층 구조인 이 건물은 주출입구나 창 부분은 르네상스 풍의 디자인 모티브를 취하고 있고 시계탑 상층부는 곡선미학의  바로크 풍이 섞여있는 절충주의 양식으로 분류된다. 현재 이 건물 2층에는 국내의 서양의학의 도입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이후 및 현대의 한국의 의학과 관련된 자료와 유물들이 여러 개의 실로 나뉘어 일반인들의 발걸음을 맞이하고 있다. 건물 앞쪽 정원에서 바라보이는 건물의 아늑한 모습은 회복중인 환자들이나 내방객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해 준다.   
 

서울대학병원 내 대한의원 본관 전경



DDP
금번 원고의 마지막 작품으로 대한의원 본관에서 고개 하나 너머에 위치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Dongdaemoon Design Plaza)를 찾아본다. DDP는 구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위치에 공원과 함께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운동장으로 해방 후 80년대 중반까지는 서울운동장으로 그리고 2003년까지는 동대문운동장으로 국내 스포츠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나 잠실 종합운동장 건립이후 그 기능이 점차 약화되었다. 이 부지에 대한 활용방안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의견을 종합한 결과 공원으로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국제지명현상설계를 실시하였는데 이라크 출신의 영국 여성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환유(換喩)의 풍경(Metonymic Landscape)’이라는 제목의 설계안이 당선되었다. 올 해 4월 1일 65세 심장마비로 타계한 자하 하디드는 2004년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급작스런 사망으로 2014년 개관한 DDP는 그녀의 대표 유작이 되고 말았다. 유기체 형상을 한 이 건물은 공사비만도 거의 50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데다 서울의 역사성이나 주변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어찌되었건 이 건물은 주변의 직선적인 20세기 건축물군과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어 그 형태면에서나 크기에 있어서 이 지역의 랜드마크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개관 1년 만에 방문객 1000만명이 넘었고, 이제는 하루 평균 2만명 이상이 이 건물을 찾는 대표적인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제 이 건물이 활발한 문화활동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수익모델을 창출해 수지 측면에서도 ‘예산 잡아먹는 하마’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불식되길 기대한다. 그것이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하 하디드가 대한민국 서울에 남긴 자신의 대표 유작에 기대하는 바람이리라. 아래의 그림은 사거리 모퉁이 건물 위에서 내려다 본 DDP의 모습을 흑백으로 드로잉 한 것과 초겨울의 이미지로 컬러링 한 것이다. 


DDP 흑백 드로잉
초겨울의 컬러를 입힌 D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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